20대 한의사, 암에 걸리다.
3월 17일 10시 30분. 평소보다 병실의 불은 일찍 꺼졌다. 그리고 마음 깊은 곳에 자리했던 어둠이 차차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가슴이 뛴다. 쿵쿵거리는 심장 때문에 온 몸이 들썩거린다. 심호흡을 해보아도 이미 달려버린 황소처럼 멈출 수 없다. 뒤늦게 찾아온 슬픔, 분노, 공포, 절망들이 머릿속을 가득 채운다. 두 눈에는 눈물이, 입으로는 분노가 새어나온다. 울고 싶다. 화내고 싶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 내 옆에 누워있는 아버지에게 슬퍼하고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여주기 싫다. 참을 거다.
누워서 입을 틀어먹고 울었다. 조용히. 입 안에 든 팔뚝을 물어뜯으며 울었다. 그렇게 뒤늦게 울었다. 모두가 위로해줄 때 별 것 아니라며 위로의 주인공의 자리를 거부했다. 나는 그렇게 나약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혼자가 되어버린 밤, 위로해줄 사람들은 자기만의 시간을 가지고 있을 지금. 그 필요성을 느낀다. 슬프고 힘들다. 위로받고 싶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억울하다. 억울해서 눈물 난다.
'다 괜찮다고 이야기하지 말 걸. 하나도 괜찮지 않은데...'
'이겨낼 수 있다고, 걱정 말라고 하지 말 걸. 못 이길 것 같은데...'
'힘들지만 별 수 있겠냐며 남 이야기 하듯 말하지 말 걸. 내 이야기인데...'
앞선 모든 시간들이 후회스럽다. ‘의사’라는 알량한 자존심 하나 지키기 위해 응당 ‘환자’가 받아야 할 위안을 갖다버렸다. 정작 울어야 할 사람은 나였는데, 도리어 안심시키고 설명하고 위로했다. 도대체 왜? 그냥 울었어야 했다. 그때 울었으면 지금은 덜 아팠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비련의 주인공 자리를 걷어찬 사람에게 더 이상 울 무대는 없다.
성상세포종이라도 양성과 악성의 차이가 있다는 거 그때는 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을까? 내 머리에 박혀있는 더러운 암세포들이 금방이라도 뇌를 다 잠식할 것만 같다. 어느 날부터 다리에 힘이 안 들어가 휠체어를 타고, 손이 떨려 글씨도 못 쓰고, 고집 부리고, 오줌 싸고... 서서히 진행하는 암의 위력을 그대로 지켜보는 내 모습이 떠오른다. 어쩌면 치매처럼 정신줄 놓고 살다가 갑자기 돌아온 제정신에 자괴감을 느끼고 무너져버릴지도 모른다. 나는 이제 죽어가는 것이다. 서서히. 주변 사람의 고통을 먹이 삼아 생명을 유지하겠지. 그렇게 살 바에는 차라리 지금 없어지는 게 낫다. 나의 밑바닥을 까뒤집으면서까지 살기 싫다. 동물의 본능만 남은 껍데기는 내가 아니다. 사람으로, 손상되지 않은 내 모습 그대로 모두의 기억 속에 남고 싶다.
슬며시 앉아 침대에 쳐진 커튼을 걷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커튼 처진 창문을 보며 생각해본다.
‘오늘 밤 하늘에는 별이 몇 개 있을까?’
여기서 뛰어내려도 죽는다는 보장은 없다. 오히려 내가 피하고 싶은 그 길에 더 빨리 도달할지도 모른다. 따뜻한 욕조에 상처 낸 손목을 담그고 과다출혈을 노려볼까? 그 전에 발견될 것이다. 독성 높은 한약재들 많다. 그것 먹어보면 어떨까? 죽기 전에 발견되어 살아날 것이다. 살아난 다음은 분명 내가 피하고 싶은 그 길에 놓여있을 거다. 의사에게 부탁해볼까? 말이 안 되는 소리다.
‘존엄사’ 하고 싶다. 하지만 방법이 없다. 무엇보다 자식의 자살을 막지 못했다는 자책감에 시달릴 부모님, 이제 막 대학생이 된 동생. 모두 마음에 걸린다. 내가 없는 세상은 나에겐 없는 세상. 그것을 알면서도 못내 마음에 걸린다. 그냥 수술실에서 죽었어야 했다. 이대로 어둠에 녹아버리고 싶다. 처음부터 없었던 존재처럼.
죽고 싶지만 죽는 것이 무섭다. 죽는 것이 싫어 죽고 싶다. 수술 전에도 죽음에 대한 고민을 많이 했지만 그때의 끝은 마취 상태에서의 종말이었다. 다가올 미래처럼 ‘서서히 죽어감’을 내가 보고 듣고 느껴야 하는 끝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제는 아니다. 치료된 미래가 도저히 떠오르지 않는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까? 나을 수 있을까? 그냥 이대로 심장이 빨리 뛰어 죽어버리고 싶다.
정말 미친 듯이 굴을 팠다. 조금만 더 팠더라면 되돌아올 수 없는 심연의 나락에 떨어졌을지도 모른다. 다행히 그 끝에서 나는 멈추었다. 그곳에서 올려다본 하늘에서 흘러나온 빛 한 줄기. 나는 환상을 보았다.
42 던져진 주사위(하)Ⅱ 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