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내려놓음 43 던져진 주사위(하)Ⅲ

20대 한의사, 암에 걸리다.

by 한남



43 던져진 주사위(하)Ⅲ




모든 것들이 다 아름답고 희망차다. 나만이 할 수 있는 것, 공감, 정신 건강 공부, 다이어트. 이 시간을 통해 얻은 것들이 너무 많다. 어릴 적 미술 학원에서 그려보았던 ‘스크래치화’가 생각난다. 어둠 뒤에 숨겨진 아름다운 세상. 희망의 손길로 긁을 때마다 조금씩 그 모습을 드러낸다. 그렇다. 난 지금 그림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완성된 그림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어둠이 만든 빠른 심장박동. 빛이 만든 빠른 심장박동. 몸의 반응은 같을지 몰라도 마음은 다르다. 흘러나오는 기쁨을 주체할 수 없어 웃음이 터져 나왔다. 악성 뇌종양 진단이라는 거대한 벽을 불과 5시간 만에 넘겼다는 자부심은 불안감도 공포도 다 잊게 하는 마취제가 되고, 귀한 약재를 넣어 끓인 보약처럼 내 몸과 영혼에 난 상처를 금방 메꾼다. 아까 울음을 막기 위해 깨물었던 팔뚝은 이제 웃음을 막고 있다. 오늘 밤 자기는 글렀다.

몇 번이고 돌려보는 드라마 속 달달한 장면처럼 생각을 곱씹으며 아침이 밝아오기를 기다리는 새벽. 역시나 시간은 느리게 흐르지만 오히려 이 좋은 기분을 오래 느낄 수 있어 좋다. 오늘은 아침부터 해야 할 일들이 많다. 좀 바쁘겠다.



7시가 되자마자 민성이 형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는 민성이 형에게 지난여름부터 치아교정을 받고 있었다. 교정이 마무리 되어 가고 이제 교정 유지 장치로 넘어갈 타이밍이었는데 그만 이 사단이 나버린 것이다. 앞으로 항암 치료를 받으려면 바쁠 텐데 치과에 가서 유지 장치를 시술 받을 시간이 없어보였고 방사선 요법과 화학 요법으로 고단할 몸과 마음에 더 짐을 주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교정을 그만 진행하기로 결심하고 그 의중을 전달하고자 전화를 걸었다. 여타 준비물도 많고 고려해야 할 상황도 많기에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아 이른 시간에도 불구하고 전화를 걸었다. 제반 사정을 들은 형은 위로를 전하며 좀 알아보고 난 뒤 이따 연락 주겠다고 했다.


그 다음으로는 만규 형. 입원과정과 수술, 경과, 검사결과들을 열심히 정리하여 여유 있을 때 연락 부탁드린다고 장문의 메시지를 남겼다. 바로 전화가 왔다. 그렇게까지 막 긍정적인 이야기는 듣지 못했지만 현실적인 이야기와 자세한 정보를 들을 수 있어서 좋았다. 희망에 들뜨는 것도 좋지만 그래도 두 다리는 현실을 딛고 서있어야 하는 법이다.

성상세포종(astrocytoma)에서도 grade가 있는데 1,2 grade는 양성, 3 grade부터는 악성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 중 상태가 더 심각하면 교모세포종(glioblastoma)이라고 분류한다고 설명했다. 교모세포종이 아니라면 그 기간이 길더라도 충분히 이겨낼 수 있으며, 이때는 체력 및 정신력 관리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마지막으로 집도의 이름을 물어 교수님의 성함을 말씀드렸더니 형이 아는 사람이었다. 실력 좋은 분이니 그대로 따라가기만 하면 된다며 용기를 북돋아주었다.


전화를 마치고 세면도구를 챙겨 샤워도 하고 면도도 깔끔하게 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금방 나갈 거라는 생각에 병원에서 대충하고 지냈다. 그러나 이제 병원 생활을 인정해야 한다. 병원은 더 이상 잠시 머물 공간이 아닌 나의 새로운 연구실이다. 폐인처럼 있을 수 없다. 여기 있는 의사 간호사 모두 내가 한의사라는 것을 안다. 6층 병동의 한의사 대표는 이제 ‘나’ 김동완이다. 한의사의 이미지는 내가 지켜야 한다.

화장실에서 돌아와 이불을 개고 책상을 펴서 한의학 서적을 읽었다. 가끔 떠오르는 생각이 있으면 노트에 메모도 했다. 그러다 오늘 병문안 온다는 나기 형에게 전화를 걸어 고령에서 오는 길에 운수보건지소에 들러 책 몇 권 들고 와달라고 부탁했다. 『내가 비록 암에 걸렸지만』은 잊지 말고 꼭 들고 와달라고 당부했다. 그리고 전화를 시작한 김에 미처 하지 못했던 연락들을 하나씩 돌렸다.


운수에 계신 김 여사님. 월요일에 병가 부탁한 사람이 2주 넘게 출근도 안하고 수술 받았다는 사실에 얼마나 놀라셨을까? 전화벨 한 번이 다 울리기도 전에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척 반가워하셨다. 승현이 형을 통해 소식을 계속 듣기야 들었겠지만 멀쩡한 목소리를 직접 듣는 것만 못한 법이다. 그동안 있었던 일을 간단히 설명하고 시급한 문제에 대해서도 논의했다. 지금 몸 상태로는 진료가 불가능하기에 아마 의병제대 처리가 될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 지소를 마냥 비워둘 수는 없으니 누군가가 대신 근무해야 하고, 그러면 그를 위해 진료실과 관사를 비워주어야 하는 문제가 생긴다. 그 문제에 대한 논의를 하고 연락을 마쳤다.


그 다음은 얼마 전까지 운수면에서 같이 8년 같은 8개월을 보낸 임 여사님. 지금은 보건소에서 근무 중인 여사님은 항상 나를 아들처럼 여겨주셨다. 전화 너머에서 들리는 목소리가 참으로 반갑다. 어제 겪었던 일들, 생각들 모조리 늘어놓았다. 마음이 편안하다. 여사님의 이야기도 들었다. 들으면 들을수록 지금 눈앞에 있는 일들이 정말 아무 것도 아닌 것 같다. 항상 그랬다. 여사님과 함께 있으면 나는 꼭 2배쯤 커진 듯한 기분이 들었고 그 기세를 몰아 못할 것 같던 일들도 종종 해내곤 했다. 지금도 그럴 수 있을 것 같다. 마지막으로 여사님은 의병 제대 관련해서 보건소장과 이야기도 해보고 도울 방법을 찾아보겠다고 하시며 전화를 마무리했다.




44 던져진 주사위(하)Ⅳ 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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