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내려놓음 44 던져진 주사위(하)Ⅳ

20대 한의사, 암에 걸리다.

by 한남



44 던져진 주사위(하)Ⅳ




그 후로 몇 분에게 더 연락드리고 병실로 돌아오니 퇴원 준비를 하고 있던 신사 아저씨는 나에게 커피 한 잔을 건넸다. 자신의 상사가 뇌종양에 걸려 수술했지만 지금 완전히 복귀하여 유능한 실력을 뽐내고 있다, 재활의학과 교수인 자신의 형에게 내 이야기를 했더니 뇌를 절제하고 이렇게 멀쩡하기가 드문 일이라고 놀라워했다 등등 여러 힘이 되는 이야기들을 많이 해주고 떠나셨다. 많이 아쉬웠다. 신사 아저씨 형의 말을 들으니, 중환자실에서 돌아온 나를 보고 승현이 형이 했던 말이 생각났다.


내가 돌팔이가 된 기분이다. 긴 싸움에 초반에 힘 빼고 중간에 지쳐 버릴까봐 신경 쓰여서 일부러 어머니랑 너한테 일반적인 케이스들을 가르쳐드리고 마음 단단히 먹으라고 부탁했는데 다 틀렸네. 이런 경우는 처음 봐서 머라 말을 못하겠다.


마음이 즐겁다. 다 이겨낼 수 있을 것 같다. 침대도 복도쪽에서 창가로 옮겼다. 쾌적하다. TV도 마음 놓고 볼 수 있다. 앞으로 당분간 이 자리에서 지내야 할 텐데 꽤 마음에 든다. 창밖의 세상을 기대하며 커튼을 걷었다가 이내 다시 닫았다. 칙칙한 건물 벽만 보이는 탓이다. 어젯밤 마지막으로 밤하늘의 별 한 번 볼까 생각했었는데 불가능한 것이었다.

그러고 보면 그때 별의별 생각을 다했다. 심지어 심장이 이렇게 빨리 뛰어 죽고 싶다고 생각하는 와중에도, 심실세동이 아니라 심방세동이 일어나서 괜히 혈전만 생기고 이것이 색전이 되어 뇌혈관을 막아 뇌경색을 일으켜 죽지는 못하고 병신만 되는 것이 아닐까 걱정할 정도였으니 말 다했다. 마음이 편해지고 장소도 쾌적해지니 뒤늦은 잠이 몰려왔다. 기다림도 불안도 공포도 괴롭히지 않는 잠. 이게 정말 얼마만일까? 더 이상 나빠질 것이 없다는 생각이 가져온 평화 속에서 간만에 깊은 잠을 잤다.


푹 자고 일어난 내 옆에는 어머니가 서 있었다. 오늘은 방사선 종양학과 교수와 면담이 잡혀있어서 조퇴했다고 했다.

‘이번에는 꼭 따라가야지. 내가 들어야 더 많이 알아듣기도 하고 필요한 질문도 할 수 있을 거다. 무엇보다 내가 미성년자도 아닌데 왜 자꾸 배제시켜? 자율성 존중의 원칙이 우리나라에서는 너무 자주 무시되는 거 아냐?’


방사선과 교수님이 보호자만 오라고 했다고 따라오지 말라는 부모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바득바득 우겨 따라나섰다. 지하 1층에 있는 방사선 종양학과 외래에 도착하여 간호사의 안내에 따라 대기실에 앉아 기다렸다. 10분 뒤 간호사는 만날 수 없다는 이야기를 전해왔다. 면담을 거부당했다. 괜히 객기 한 번 부렸다가 나도 부모님도 헛걸음한 것. 어쩔 수 없이 다시 병실로 발걸음을 돌려야 했던 그때, 엘바 섬에 유배되었던 불안이 탈출에 성공했고 머리에 상륙하자마자 모든 생각과 감정을 굴복시키고 다시 권좌를 차지했다.


어느 누구도 이야기해주지 않는 grade와 subtype, 종양의 크기

나를 계속 면담에서 배제하는 병원

나만 모르는 거대한 비밀이 하나 존재하는 것 같다.


담담하게 이야기하다 결국 울음을 참지 못한 어머니

교수님께 뇌종양 종류를 물었을 때 잠시 있었던 텀(term)

갑자기 다시 부모님을 모셔간 교수님

그때는 그냥 넘어갔던 것들이 다 의심된다.


《트루먼 쇼》가 떠오른다. 생각하지 않으려 하면 할수록 오히려 더 떠오른다. 트루먼은 진실을 알고 싶어 했고, 결국 조작된 세상 너머로 도전하기를 선택했다. “다시 못 만날 수도 있으니 하루치 인사를 모두 해두죠. 좋은 아침, 좋은 오후, 좋은 밤 되세요.(In case I don’t see ya. good afternoon, good evening, good night.)” 이 말을 남기고. 하지만 나는 무서웠다.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저 거짓으로 쌓아올린 바벨탑 안에서 만든 나만의 왕국 속에서 호의호식 하며 살고 싶었다.

결국 나는 외면하고 도망쳤다. 다시 면담하러 내려오라는 연락이 왔을 때 따라가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냥 종양 크기만 알아와 달라고 부탁하고 병실에 남았다.




45 던져진 주사위(하)Ⅴ 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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