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 한의사, 암에 걸리다.
혼자 남겨진 병실. 요동치는 감정을 주체할 수가 없어 누웠다 앉았다 섰다 걸었다 자세 바꾸기만을 수십 번. 노트를 꺼내 닥치는 대로 휘갈겨 내려갔다. 천재 수학자 갈루아가 결투 전 날 죽음을 예감하고 남긴 메모처럼 글씨는 날아다니고 곳곳에는 쓰다만 낙서들이 가득한 노트. 그것을 갈무리해서 적으면 다음과 같다.
다시 찾아온 불안감에 못 이겨 진실을 목도할 권리를 버렸다.
용기가 안 난다. 겁이 나서 지금 도망치고 있다.
트루먼 쇼의 주인공이 된 기분. 위화감을 지울 수 없다.
하지만 지금이 너무 좋아 거짓된 세계에서 살기를 선택해버렸다.
신경 쓰지 말고 이 순간을 즐기자.
시키는 대로 하다보면 나을 수 있다.
바보 같이 모르고 있더라도 이기면 다 되는 거다.
모르는 게 약이라는 말이 그냥 있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이미 난 기미를 느꼈는데...
아예 의심을 시작 안 했으면 모를까 이미 의심했는데 다시 그 세계에서 아무 생각 없이 살 수 있을까?
엄마, 아빠, 의사, 간호사의 말을 내가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눈치 싸움이 시작되는 건가?
차라리 의심 들기 그 전 순간으로 돌아가고 싶다.
마음 편히 조작된 세계에서 살고 싶다.
더 큰 거짓말로 나의 의심을 누가 확 묻어주면 좋겠다.
한참 생각의 늪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을 때 어머니에게서 전화가 왔다. 면담 이제 끝나서 올라가는 중인데, 가는 길에 카페에 들러 조각케익을 사가지고 갈 것이라 했다. 어머니의 밝은 목소리. 믿을 수 없다. 분명 방사선 치료가 가져올 수 있는 부작용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것이다. 생겨날 수 있는 모든 안 좋은 가능성에 대한 설명을 듣고 동의서를 썼겠지. 그럼 기분이 좋을 리가 없다. 전화하기 전에 마음을 얼마나 다잡아야 했을까? 한바탕 우느라고 전화가 늦었을 수도 있다. 금방 올라올 것처럼 이야기하던 부모님은 꽤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 병실로 돌아왔다. 짐작이 된다.
착잡한 마음으로 부모님의 말씀을 들었다. 의외의 말이 가장 먼저 나왔다. 내가 가장 듣고 싶었던 그 한 마디.
너도 면담 잡혔어.
모든 걱정은 일시에 사라졌다. 트루먼 쇼가 아니구나. 역시 무서운 건 현실이 아니라 내가 만든 상상이구나. 아까 내 머릿속을 지나가던 모든 어두운 생각들은 눈물에 담겨 밖으로 배출되었다. 병원에 입원한 뒤로 가장 크고 서럽게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울었다. 걱정한 나 자신이 한심해서, 그 시간들이 너무 억울해서.
마음이 좀 진정되자 종양 크기를 비롯하여 여러 이야기들을 자세히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얼마 뒤 내가 부탁한 책들을 들고 나기 형이 왔다. 『내가 비록 암에 걸렸지만』 이 책이 앞으로 많은 도움이 될 것 같다. 금방 올 것 같던 홍윤이와 민성이 형이 늦는 동안 나기 형과 병원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이틀 동안 있었던 일과 나의 생각들을 이야기했다. 그때 형은 말했다.
니 그 잡생각 많은 거 패시브 스킬인가보다. 그 짧은 시간에 그만큼 많이 생각하는 것도 능력이라면 능력이다. 그게 니 멘탈 잡는 법인가보네. 신기한 놈. 여튼 너무 붙잡아 두지 말고 둥둥 흘려보내라. 그럴 때는 ‘아 내가 잡생각 하고 있구나~’ 이렇게 생각하면 좀 낫다. 나도 밤에 잠 못 자고 생각 막 하고 그럴 때 자주 쓴다.
얼마 뒤 홍윤이와 민성이 형이 햄버거를 사들고 왔다. 뒤이어 예고도 없이 현재형도 찾아와 주었다. 고맙고 반갑다. 비어있는 옆 침대, 자리 비켜주신 부모님. 우리 밖에 없는 2인실에서 나는 조언도 듣고 때로는 강한 척하며 으스대어 보기도 했다.
46 반격의 시작Ⅰ 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