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내려놓음 45 던져진 주사위(하)Ⅴ

20대 한의사, 암에 걸리다.

by 한남



45 던져진 주사위(하)Ⅴ




혼자 남겨진 병실. 요동치는 감정을 주체할 수가 없어 누웠다 앉았다 섰다 걸었다 자세 바꾸기만을 수십 번. 노트를 꺼내 닥치는 대로 휘갈겨 내려갔다. 천재 수학자 갈루아가 결투 전 날 죽음을 예감하고 남긴 메모처럼 글씨는 날아다니고 곳곳에는 쓰다만 낙서들이 가득한 노트. 그것을 갈무리해서 적으면 다음과 같다.



다시 찾아온 불안감에 못 이겨 진실을 목도할 권리를 버렸다.

용기가 안 난다. 겁이 나서 지금 도망치고 있다.

트루먼 쇼의 주인공이 된 기분. 위화감을 지울 수 없다.

하지만 지금이 너무 좋아 거짓된 세계에서 살기를 선택해버렸다.

신경 쓰지 말고 이 순간을 즐기자.

시키는 대로 하다보면 나을 수 있다.

바보 같이 모르고 있더라도 이기면 다 되는 거다.

모르는 게 약이라는 말이 그냥 있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이미 난 기미를 느꼈는데...

아예 의심을 시작 안 했으면 모를까 이미 의심했는데 다시 그 세계에서 아무 생각 없이 살 수 있을까?

엄마, 아빠, 의사, 간호사의 말을 내가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눈치 싸움이 시작되는 건가?

차라리 의심 들기 그 전 순간으로 돌아가고 싶다.

마음 편히 조작된 세계에서 살고 싶다.

더 큰 거짓말로 나의 의심을 누가 확 묻어주면 좋겠다.



한참 생각의 늪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을 때 어머니에게서 전화가 왔다. 면담 이제 끝나서 올라가는 중인데, 가는 길에 카페에 들러 조각케익을 사가지고 갈 것이라 했다. 어머니의 밝은 목소리. 믿을 수 없다. 분명 방사선 치료가 가져올 수 있는 부작용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것이다. 생겨날 수 있는 모든 안 좋은 가능성에 대한 설명을 듣고 동의서를 썼겠지. 그럼 기분이 좋을 리가 없다. 전화하기 전에 마음을 얼마나 다잡아야 했을까? 한바탕 우느라고 전화가 늦었을 수도 있다. 금방 올라올 것처럼 이야기하던 부모님은 꽤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 병실로 돌아왔다. 짐작이 된다.

착잡한 마음으로 부모님의 말씀을 들었다. 의외의 말이 가장 먼저 나왔다. 내가 가장 듣고 싶었던 그 한 마디.


너도 면담 잡혔어.


모든 걱정은 일시에 사라졌다. 트루먼 쇼가 아니구나. 역시 무서운 건 현실이 아니라 내가 만든 상상이구나. 아까 내 머릿속을 지나가던 모든 어두운 생각들은 눈물에 담겨 밖으로 배출되었다. 병원에 입원한 뒤로 가장 크고 서럽게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울었다. 걱정한 나 자신이 한심해서, 그 시간들이 너무 억울해서.

마음이 좀 진정되자 종양 크기를 비롯하여 여러 이야기들을 자세히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얼마 뒤 내가 부탁한 책들을 들고 나기 형이 왔다. 『내가 비록 암에 걸렸지만』 이 책이 앞으로 많은 도움이 될 것 같다. 금방 올 것 같던 홍윤이와 민성이 형이 늦는 동안 나기 형과 병원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이틀 동안 있었던 일과 나의 생각들을 이야기했다. 그때 형은 말했다.


니 그 잡생각 많은 거 패시브 스킬인가보다. 그 짧은 시간에 그만큼 많이 생각하는 것도 능력이라면 능력이다. 그게 니 멘탈 잡는 법인가보네. 신기한 놈. 여튼 너무 붙잡아 두지 말고 둥둥 흘려보내라. 그럴 때는 ‘아 내가 잡생각 하고 있구나~’ 이렇게 생각하면 좀 낫다. 나도 밤에 잠 못 자고 생각 막 하고 그럴 때 자주 쓴다.


얼마 뒤 홍윤이와 민성이 형이 햄버거를 사들고 왔다. 뒤이어 예고도 없이 현재형도 찾아와 주었다. 고맙고 반갑다. 비어있는 옆 침대, 자리 비켜주신 부모님. 우리 밖에 없는 2인실에서 나는 조언도 듣고 때로는 강한 척하며 으스대어 보기도 했다.




46 반격의 시작Ⅰ 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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