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완서 『노란집』-《우리가 잃어버린 진정 소중한 것》
치졸한 듯한 완숙함이랄까. 그는 불필요한 선을 생략한 게 아니라 기교를 생략함으로써 숨결처럼 섬세한 분위기까지 살아 움직이게 하고 있었다. 잔재주 부리지 않고 도달한 가장 자연스러운 상태, 인간 심층의 선의와 그리움을 불러일으키는 이상한 힘이 바로 예술이라는 것 아닐까. 몇 개의 단순한 곡선만 가지고 어찌 저리도 완벽하게 젖을 물린 어미와 젖을 빠는 아기의 만족감과, 모자간의 소통과 일치를 표현할 수가 있었을까.
(박완서 -『노란집』, 265p)
‘글은 절제와 생략을 통해 더욱 풍부해진다.’
마음 다잡고 글을 써보기 위해 여기저기서 조언을 듣고, 글쓰기에 관련된 이 책 저 책 사서 읽었다. 사람마다 이야기는 조금씩 달랐지만 공통점이 있다면 바로 ‘간략하게 쓸 것’이었다.
예과 2학년 때와 본과 1학년 때, 나는 해부학 학술위원이었다. 그 당시 시험 대비 자료도 만들 겸 공부도 할 겸해서 일일이 삽화를 그려가며 노트필기를 했다. 그림 실력이 모자라 직접 대고 그렸는데 그것마저도 잘 따라 그릴 자신이 없어 선을 잘게 나누어 그림을 그렸다. 그야말로 어설픈 세필화의 끝.
그렇게 열심히 그린 그림과 필기한 노트를 토대로 시험 준비 자료를 만들었는데, 노트로 볼 때는 그럭저럭 봐줄만한 것들이 막상 스캔 떠서 보니 그렇게 조잡할 수 없었다. 결국 그림 솜씨가 뛰어난 회린 누나가 삽화를 다시 그렸다. 그녀는 해부학 교과서를 유심히 보더니 이내 펜을 잡고 수많은 해부도면을 일필휘지(一筆揮之)로 그려내었다. 그녀의 과감한 생략과 펜 터치는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사람의 신경과 혈관이 어디를 지나고, 근육과 뼈는 어디에 붙어있는지 대강 감이 오게 만들었다.
그걸 보면서 나는 중3 시절 미술 수행평가를 떠올렸더랬다. 싸인펜으로 8절 도화지에 점묘화 하나를 제출하는 것이 과제였다. 살면서 음악, 미술, 체육을 80점 이상 맞아본 적이 별로 없을 정도로 예체능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았던 나였다. 음악이나 체육보다는 미술이 그나마 노력으로 커버가 되어 열심히 과제했었는데 그 때 나는 뭉크의 「절규」를 점묘화로 그려 제출했다. 8절 도화지에 어찌나 싸인펜으로 점을 찍어대었는지 도화지가 축축할 정도였다. 빈 공간 없이 점을 찍어대었으니 점묘화로서의 정체성이 있을 리가 만무했다. 그때 선생님은 B+ 점수를 주었다. 노력에 비해 턱없이 적은 점수에 실망했지만 다른 A 맞은 다른 친구들의 작품을 보고 그 마음을 접었다.
흰 바탕에 빨간 펜과 초록 펜으로 예쁘게 그려낸 장미
흰 바탕에 노란 펜과 검은 펜으로 예쁘게 그려낸 나비
끽해야 내가 찍은 수의 1/10도 안 되는 점 가지고 그들이 만들어낸 그림은 나와는 급이 달랐다. 나는 그 때 미술 이론 시간에 말로만 듣고 외우기만 했던 ‘여백의 미’가 어떤 것인지 체감했고 절규했다.
글도 이와 마찬가지이리라.
그렇기에 나도 간결하게 쓰려고 노력했다. 아니 노력만 했다.
그러나 글을 쓰고 나면 어디에서 본 듯한 구절들을 몰래 훔쳐다 억지로 끼워 맞춘 만연체 문장이 되어 있었다. 날 것 그대로 생각을 옮기기에는 너무 부끄러워, 어휘력의 부족을 감추기 위해 꾸밈만 잔뜩 남은 글만 남아있었다.
어떻게든 고쳐보지만 한계가 있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본인의 남루함을 감추려 화려한 치장을 하는 것이 나의 본 모습인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