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나무가 꾼 꿈

박완서 『두부』-《흔들리지 않는 전체》// 박완서 『그 남자네 집』

by 한남


《흔들리지 않는 전체》


만개했을 때는 온 동네를 바람나게 할 것처럼 향기롭고 화려하던 꽃, 누런 살구를 한가마도 더 떨구던 그 다산성, 미풍에도 오묘하게 살랑이던 무성하고 예민한 잎새들, 느린느릿 물들다가 우수수 서글픈 소리를 내며 서둘러 지던 낙엽, 그런 것들이 과연 저 나무가 한 짓이었을까, 믿기지 않으니 혹시 저 나무가 꾼 꿈이 아니었을까.

(박완서 『두부』- 99p)


P.S.
세종로의 은행나무들이 자기 안에 깊숙이 숨어 있던 노랑 중 최고로 순수한 금빛을 환장을 한 것처럼 한꺼번에 분출하던 날, 5호선을 타고 집으로 가다 말고 동대문운동장에서 4호선으로 갈아탔다.
(박완서 『그 남자네 집』- 27p)




5월부터 성당에 나가기 시작했다. 예비자 신분이 되어 교리 교육을 받은 지 벌써 반년이 넘어간다. 강제로 시작된 백수 생활 그때부터 나에게 있어 정해진 일정은 일요일 아침 9시 반에 성당 가는 일 뿐이다. 가족들이 떠들썩거리며 부산스러운 주중 아침에는 곤히 잠들고, 가족들이 간만의 달콤한 늦잠을 즐기는 일요 아침 혼자 부산스럽다.


별 일 없으면 일주일 내내 주차장에서 녹슬어가는 내 차를 몰고 5분 달려 성당 근처에 주차한다. 그리고 30m 정도 오르막길을 걸어 올라가면 있는 성당에서 수업을 듣는다.

그 길에는 은행나무가 줄줄이 서 있었다. 여름에 푸른 부채를 흔드는 모습을 보며, 가을이 오면 은행이 떨어져 냄새 좀 나겠구나 싶었는데 의외로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다 수놈인 모양이다. 왠지 나무가 외로워 보인다.


2016 11 20


일주일 전이었다. 그날도 평소처럼 근처 주차장에 차를 대고 골목길로 접어들었다. 온통 황금빛으로 치장된 골목을 보며 희열을 느꼈다. 바로 휴대폰을 꺼내들고 연신 사진을 찍어댔다. 늦가을 아침의 깨끗한 햇빛을 받은 은행나무는 어떻게 찍어도 예뻤다.

생각했다.

‘박완서 선생님이 말한 「금빛을 환장을 한 것처럼 한꺼번에 분출 한다」는 표현이 이런 것이었구나.’



2016 11 27


그리고 일주일이 지나, 또 평소처럼 근처 주차장에 차를 대고 골목길로 접어들었다. 모든 나뭇잎을 떨어뜨려내고 앙상한 가지만 남은 나목(裸木)이 서 있었다. 쓸쓸해보였다. 그 때처럼 똑같은 구도로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그날의 사진과 비교했다. 불과 일주일 전이었다니 믿겨지지가 않는다.


‘나무가 꾼 꿈 같다는 말이 이거였구나.’


나무가 꾼 꿈. 내가 느낀 이 감정을 이처럼 잘 표현한 말이 있을까 싶다. 그분이 먼저 태어나 이런 작품을 남긴 것에 감사와 질투를 동시에 느낀다.

내가 할 수 있었는데 선생님이 먼저 선수쳐버린 것 같아 질투도 나고, 느낌은 있었으되 실력이 부족하여 표현되지 못한 채 남아있어야 했던 걸 대신 이야기 해주셔서 감사도 하다. 표현되지 못한 느낌은 간직하기 힘든 법이니까.


어쩌면 길가의 노란 은행잎을 보면서 금빛을 환장한 것처럼 내뿜을 느낄 수 있는 것도,

갑자기 사라져버린 수많은 잎을 보며 나무가 꾼 꿈을 떠올릴 수 있는 것도 그 분 덕분일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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