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완서 『꼴찌에게 보내는 갈채』-《봄에의 열망》
달력의 마지막 장이 낙엽의 신세가 되어 초라하게 달려 있다. 설경(雪景)이 그려져 있다. 오늘밤쯤 혹시 눈이 오려나, 날이 침침하다.
막연히 눈을 기다려 본다. 세월 가는 소리라도 듣자는 걸까? 올 1년은 산 것 같지도 않고 잃어버린 것 같다. 실물(失物)을 한 허망함과 억울함. 그러나 신고할 곳은 없다.
(박완서 -『꼴찌에게 보내는 갈채』, 173p)
2016년 11월 26일. 대구에 첫 눈이 내렸다. 따지고 보면 1월과 2월에 눈이 안 내렸겠냐마는 사람들에게 첫 눈이란 본격적인 겨울의 시작을 의미하기에 오늘이 첫 눈일 것이다.
올해의 첫 눈을 보며 광화문 광장에 있을, 그리고 전국 각지의 시위 현장에 있을 그들을 생각했다.
‘많이 춥지 않기를.’
수많은 사람을 추위에 떨게 할 눈을 잠시 원망하다 거두었다. 비보다는 눈이 나을 테니. 전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시위가 되었다. 소요 사태 하나 없고, 길거리의 쓰레기들을 스스로 줍고, 시위이기보다는 흥겨운 축제라고. 이 눈발이 무대를 장식하는 꽃가루가 되어주길 바란다. 덤으로 혹독한 기상현상에도 꺾이지 않는 국민의 열망을 청기와 속 공주가 조금이라도 느꼈으면 한다.
이번에 아프지 않았다면 난 어디에 있었을까 상상해본다.
광화문?
동성로?
아니면 지금처럼 집?
결국 집이었을 것 같다. 난 항상 소시민이었으니까. 온 국민이 기뻐 날뛰던 2002년 월드컵 때도 광장에 나갈 엄두조차 못 냈던 소심이가 나다. 지금처럼 8시에 불 끌 준비 정도나 하고 있었겠지.
창문 앞에 앉아 첫 눈을 구경했다. 어차피 남는 게 시간이니까. 뻥튀기를 제멋대로 찢어 날리는 것 같은 눈. 꽤 많이 내린 듯한데 바닥은 그저 젖을뿐 쌓이지 않는다. 허무하다.
사람이란 참 간사하다. 아니, 나만 간사한가? 작년에는 하늘에 눈발이 날리기만 하면 쌓이면 어떡하지 걱정했다. 출근길이 힘들까봐, 침 맞으러 오는 할머니가 미끄러질까봐. 그런데 이제 출근할 일도 없고 할머니들도 눈에 안 보이니 다 잊어버리고 눈이 쌓이길 원한다. 보기에 이쁘니까.
아침에 구글 포토 앱에서 알람이 왔다. 「이 날의 재발견」 이란다.
지난 달 20일에는 2년 전의 그 날 찍었던 사진들을 앨범으로 만들어 보여주더니 이번에는 작년 사진이다. 사진을 보니 전주 한옥 마을이었다. 기억을 더듬었다.
‘아~ 종길이 형이랑 민수 형이랑 갔었던 거구나.’
3명이서 민수 형 차타고 전주에 2박 3일로 놀러갔었다. 엄청 많이 내린 눈 때문에 미끌미끌 거리는 바닥을 조심조심 걸으며 여기저기 쏘다녔다. 밤에 술 마시면서 별별 시답지 않은 것 까지 이야기했었다. 나중에 결혼하면 경제권을 누가 가질지, 생활비는 얼마 줄 것인지 이야기했다.
호기 있게 큰 금액을 외치던 종길이 형은 벌써 개업도 했고 결혼도 했다. 그에 못지않은 액수를 이야기한 민수 형은 페이 닥터로 바쁜 삶을 보내고 있다. 결혼은 먼 세상 이야기라며 한 발 빼던 나는 지금 이렇게 집에 앉아 흩날리는 눈발을 지켜보고 있다.
나에게 있어 올 한 해는 어떤 시간이었을까? 전진했을까? 후퇴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다.
수많은 일들이 벌어지는 삶이다. 일직선으로 표현할 수 없다. 최소 평면은 되리라.
그렇다면... 폭은 넓어진 것 같다.
방향도 조금 바뀐 것 같고
목적지도 조금 바뀐 것 같다.
그런데 그 목적지도 방향도 아직은 모르겠다. 그래서일까? 지난 1년이 뿌듯하기도 허망하기도 하고, 잔뜩 얻은 것 같기도 잃어버린 것 같기도 하다. 잘 모르겠으니까 그냥 만족하고 말란다. 후회해봤자 달라지는 거 하나도 없는 걸. 어차피 내 인생 내가 사는 거, 내가 만족하면 그만이지.
P.S.
긴긴 겨울밤 올해도 얼마 안 남았구나 싶으니 이런 일 저런 일을 돌이켜보게 되고 후회도 하게 된다. 이런저런 시시한 후회 끝에 마지막 남은 후회는 왜 이 어려운 세상에 아이들을 낳아 주었을까 하는 근원적인 후회가 된다. 그리고 황급히 내 마지막 후회를 뉘우친다. 후회를 후회한다고나 할까.
아아, 어서 봄이나 왔으면. 채 겨울이 깊기도 전에 봄에의 열망으로 불안의 밤을 보낸다.
(박완서 -『꼴찌에게 보내는 갈채』 , 175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