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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호 Oct 21. 2017

사육신묘에는 무덤이 7개다.

서울특별시 동작구

                   

사육신공원 입구


노량진에 위치하고 있는 사육신묘는 집에서 가까운 곳에 있지만, 방문한 횟수가 손을 꼽을 정도로 많지 않습니다. 기억 속에서 사육신묘를 처음 방문한 것은 초등학교 1학년 때 소풍이었습니다. 당시 친구들과 줄을 맞추어 걸어 도착한 사육신묘에는 엄마들이 도시락을 가지고 기다리고 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 이후 불꽃놀이를 보기 위해 방문한 것 외에는 특별하게 시간을 내어 방문한 적이 없습니다.


지금은 사육신공원으로 명칭이 바뀐 이곳에는 기계 유씨 가문 중에서도 기개와 충성심이 높았던 유응부가 계십니다. 아이들에게 올바른 역사관을 심어주고 조상님들 중에 훌륭했던 유응부에 대해 알려주기 위해 사육신묘를 방문하였습니다. 이번 방문을 계기로 아이들이 사육신에 대해 알고, 자랑스러운 후손으로서 긍지 있는 생활을 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봅니다.





사육신묘 이전에 있던 사충 서원


많은 분들이 사육신묘는 알고 있지만, 사충서원은 알지 못합니다. 사육신에 비해 4명의 충신이 가지고 있는 위명이 떨어져서인지 사육신공원 입구에 사충 서원터를 알리는 표지판이 있지만 아무도 눈길 한 번 주지 않습니다.


사충서원을 풀이하면 4명의 충신을 제향하며 그분들의 뜻과 학문을 계승하는 학원이 됩니다. 숙종과 장희빈 사이에서 태어나 왕이 되었던 경종을 뒷받침하던 세력이 소론 계열이었습니다. 소론은 경종이 후사를 이을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보고 영조를 왕세제로 책봉하는 것에 분명한 반대를 했습니다. 그러나 노론 계열은 영조를 세제로 책봉해야 한다며 강경하게 나왔습니다. 이에 소론은 노론 계열의 많은 관료들을 경종에 대한 불충이란 죄명으로 제거하는 신임옥사를 일으키게 됩니다.






사육신공원 입구에 있는 홍살문


이후 경종이 죽고 영조가 왕이 되면서 소론은 밀려나고 노론이 권력을 잡게 됩니다. 노론은 자신들의 정당성을 강화시키고자 신임옥사 때  죽은 김창집, 이건명, 조태채, 이이명을 제향하기 위해 현재 동작구 노량진 지역에 사충서원을 세웠습니다. 사충서원은 흥선대원군이 전국의 서원을 없애버리던 시절에도 살아남았다가 1968년에 경기도 하남시로 이전하였고, 사육신 공원 입구에는 사충 서원터만 알리는 증표만 남겨두었습니다.


단종을 복위시키려 했던 사육신만이 아니라 영조를 왕으로 만들고자 했던 사충신을 같은 장소에서 기렸다는 점에서 사육신공원이 더 특별하게 느껴집니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현재에도 노량진에는 많은 젊은이들이 국가와 국민을 위해 열심히 공부하고 있는 장소이기도 합니다.





사육신묘를 가기 위해 지나가야 하는 불이문


사육신 공원을 조금만 올라가면 우측으로 불이문이 보입니다. '불이문'이라 현판을 통해서 두 명의 임금을 모시지 않겠다는 사육신의 절개를 느껴볼 수 있습니다. 목숨을 버릴지언정 옳지 못한 일은 따를 수 없음을 직접 보여준 사육신의 숭고한 뜻이 세 글자 안에 충분히 담겨 있습니다. 그렇기에 현판만 봐도 고개를 끄덕이며 그 뜻을 충분히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사육신을 모셔놓은 의절사


사육신에 대하여 간략하게 설명하면 세조가 조카 단종을 내쫓고 왕위에 오르자 많은 사람들이 옳지 못한 일이라며 세조를 따르지 않았습니다. 그중 박팽년, 성삼문, 이개, 유성원, 하위지, 유응부 여섯 분은 명나라 사신을 맞이하는 자리에서 세조를 죽이고 단종을 복위시키려고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명나라 사신을 맞이하는 장소가 갑작스럽게 변경되면서 거사가 뒤로 미루어지게 됩니다. 거사가 실패할 것이라 생각한 김질이 장인이었던 정찬손과 논의 끝에 세조에게 거사계획을 알리며 배반합니다. 이에 세조는 매우 노하며 사육신과 관련된 70여 명을 처형하게 됩니다.





신도비각


미리 자결한 유성원을 제외한 사육신은 사지가 수레에 묶여 갈기갈기 찢어 죽이는 무서운 거열형을 당하면서 시신이 온전하게 남은 것이 없었습니다. 김시습은 이미 형체도 알아볼 수 없는 사육신의 시신을 한데 모와서 노량진 강변에 임시로 묻어두었습니다.


1691년 숙종 때 사육신을 복위시키면서 사육신이 묻힌 노량진에서 매년 제를 지내고 나라에 대한 충성심을 강조했습니다. 그 후 정조대왕 때 사육신묘를 정비하면서 6분의 신묘를 모셨으나, 박정희 전 대통령 시절 사육신묘를 재정비하면서 7분의 위패를 모시게 되는 이해하기 어려운 모습을 보이게 됩니다.





신도비각


신도비에는 有明朝鮮國六臣墓碑銘(유명조선국육신묘비명)이라 새겨져 있습니다. 한자를 해석해보면 조선시대 여섯 명의 충신을 위한 묘비가 됩니다. 그러나 의절사 뒤에 있는 묘는 총 7기로 비문에 적혀있는 숫자와 맞지 않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6.25 전쟁 이후 사육신을 기념한 비


사육신을 모셔놓은 의절사를 바라보면 우측에 1955년에 조성한 비를 볼 수 있습니다. 이 비를 둘러봐도 성삼문ㆍ박팽년ㆍ이개ㆍ유성원ㆍ하위지ㆍ유응부 6분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일부에서 사육신이라고 주장하는 김문기는 어디에도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데 1977년부터 김문기를 유응부 대신 사육신에 넣어야 한다고 김녕 김씨에서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 근거로 세조실록에 유응부보다 김문기가 더 많이 거론된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 외 어디에서도 김문기를 사육신으로 거론하지 않았습니다. 숙종 때부터 지금까지 성삼문ㆍ박팽년ㆍ이개ㆍ유성원ㆍ하위지ㆍ유응부를 사육신으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사육신을 위해 향을 올릴 수 있는 의절사


그럼 1977년 갑자기 김문기가 사육신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어디서 나온 것일까? 그 배경에는 1970년대 대한민국에서 최고의 권력을 가지고 있었던 김재규가 있었습니다. 김재규는 자신의 선조였던 김문기를 사육신으로 편입시켜 국민들에게 자신의 가치를 높여 보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김재규는 사육신에서 유일한 무인이었던 유응부를 빼고 자신의 선조인 김문기를 넣고자 했습니다. 유신체제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시절 국사편찬위원회는 조선시대부터 유응부를 사육신의 한 분으로 정해놓고 제사를 올리던 역사와 전통을 무시하고 김문기도 사육신에 포함할 수 있다고 제한적 동의를 하게 됩니다. 그 결과 의절사에 김문기 위패를 설치하고 여섯 분의 사육신 옆으로 김문기의 가묘를 만들게 되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혼동을 주고 있습니다.


사실 김문기란 분은 매우 훌륭하신 분입니다. 단종 복위 운동에 사육신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정조 때 육종영, 사의척, 삼상신, 삼중신 등 세조의 찬탈 과정과 단종 복위를 하다 희생된 분들을 선정해서 사육신과 함께 위패를 두고 제를 올려왔습니다. 김문기는 이때 삼중신으로 선정된 훌륭한 위인입니다. 그러나, 국가에서 사육신을 강조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삼중신은 잘 모른 채 사육신만을 이야기했습니다. 김재규는 역사의식이 낮거나 무지했는지 모르겠지만, 삼중신으로 선정되어 사육신보다 높은 배열에 있던 자신의 조상을 끌어내리며 역사를 조작했습니다. 권력이 있으면 역사를 바꿀 수 있다는 선례와 후세에 잘못된 사실을 남겨주어 혼동을 가중시켰다는 점에서 가슴이 아픈 일입니다. 지금은 이 문제를 두고 사육신 후손들 간에 감정의 골이 커지자, 어디에서도 진위 여부를 따져 역사를 바로잡으려 하지 않고 두리뭉실 넘어가려고 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현재 사육신묘에서 배부하고 있는 안내지에도 김문기 측의 주장도 실어놓고 있습니다.





유응부의 가묘


김시습이 사육신 중 4분의 시신(성삼문, 박팽년, 이개, 유응부)만을 노량진 이곳에 수습했다고 합니다. 즉 사육신묘에 있는 실제 묻혀계신 분 중에 유응부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유응부가 사육신의 한 분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 외에도 생육신 중의 한분이신 남효온이 쓴 '추강집'에서 유응부를 사육신으로 명확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추강집을 바탕으로 조선시대에도 사육신을 모셔왔고, 유성원, 하위지 두 분의 가묘를 추가로 만들었습니다. 그러므로 1977년 이후 사육신공원에 김문기의 가묘를 만든 것은 잘못입니다. 김문기의 훌륭한 업적과 정신을 강조하고 싶었다면 이곳에 사육신 외에도 김문기가 포함된 삼중신을 같이 모셔놓고, 삼중신을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이 바람직했을 것입니다.





의절사 뒤에 있는 가묘들


사육신 중 유응부는 유일하게 문신이 아닌 무신 출신입니다. 평소 세조의 왕위 찬탈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던 유응부가  명나라 사신을 맞이하는 세조를 경호하는 별운검이 됩니다. 사육신은 이 기회가 세조를 죽일 수 있는 천운이라 생각하며 유응부에게 세조를 죽이는 역을 맡아달라고 부탁합니다. 이처럼 세조를 죽이는 역할을 맡았던 유응부가 사육신에서 제외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것입니다.





의절사 뒤에 있는 가묘들


유응부가 단종 복위를 꾀하다 체포되어 국문을 받을 때 있었던 일화는 너무나 유명합니다. 뜨겁게 달구어진 쇠로 몸을 지지는 고문을 받던 유응부는 극심한 고통을 참아내며 입 밖으로 새어 나오는 신음소리도 삼켰습니다. 자신은 옳은 행동을 했기에 어떤 회유와 고통을 가해도 굴복하지 않음을 보여주었습니다. 오히려 씨벌겋게 달구어진 쇠가 고문 과정에서 식어버리면 다시 불에 달구어 오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모진 고문에도 뜻을 굽히지 않는 절개와 역모를 함께 모의했던 사람들을 밀고하지 않는 의리, 그리고 강직함을 가지신 분이었습니다.


사육신묘를 방문하게 되면 유응부의 묘 외에도 다른 분들의 묘비에 이름이 적혀있지 않습니다. 묘비에는 이름이 아니라 유씨지묘, 김씨지묘 등으로 표기되어 있습니다. 그 이유는 사육신이 능지처참되어 시신이 갈기갈기 찢어져 누구의 시신인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훼손되었고, 역모죄로 죽임을 당한 사람의 시신을 거두기만 해도 역적으로 몰리는 상황에서 김시습이 제대로 시신을 수습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단종충신 역사관 및 공부방


이제는 600여 년 전 치열했던 역사는 우리의 기억 속에서만 남아있습니다. 조선 후기에 왕권을 강화시키고 문무백관과 백성들의 충성심을 높이기 위해 국가에서 사육신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던 시대도 지나갔습니다. 이제는 사육신묘는 공원으로 변모하여 노량진 학원가에서 열심히 공부하는 젊은이들이 잠시나마 쉴 수 있는 휴식공간이 되었습니다.





우수 조망명소로 알려진 사육신공원


사육신 공원은 노량진에서 공부하는 젊은이들만이 아니라 많은 시민들이 찾아오는 명소가 되었습니다. 사육신공원이 우수 조망명소로 여의도와 마포 그리고 용산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10월에 여의도 불꽃축제가 벌어지면 날이 어두워지기도 전에 구름같이 많은 인파가 몰려들어 추억을 만드는 장소로 알려져 있습니다.





사육신공원에 있는 운동시설


사육신공원에는 운동시설도 갖추고 있어서 노량진의 수험생들의 피로를 풀어주는 근린공원으로서의 역할도 톡톡히 해내고 있습니다. 주말에 특별하게 갈 곳이 없다면 노량진을 가볼 것을 추천합니다. 노량진의 맛있는 음식을 사 먹은 다음 사육신공원을 둘러보며 역사기행을 하고 한강의 조망을 감상한다면 알찬 하루를 보낼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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