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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호 Jan 24. 2018

탐라국 수도를 내려다보는 도두봉

제주특별자치도

                  

섬머리라 불리는 도두봉공원 안내도

딸들이 비행기를 타고 싶다고 할 때마다 성수기에 비행기를 타고 여행하는 것이 경제적으로 부담되어 차일피일 미루다 보니 아이들이 어느새 초등학생이 되었습니다. 아이들에게 미안한 마음에 큰 마음먹고 여름 성수기에 제주도 여행을 계획한 뒤 많은 고민을 해야 했습니다. 비행기를 처음으로 타본다는 기대감과 함께 제주도에 대한 환상으로 들떠있는 딸들을 위해 맞춤형 제주도 여행코스를 계획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며칠의 고민 끝에 제주도 2박 3일의 여행코스를 계획하고 김포공항에 들어서는 순간 비행기를 보고 두 눈이 휘둥그레진 두 딸의 모습에 귀엽다는 생각과 동시에 미안한 마음이 교차했습니다. 몇 분뒤 비행기가 보이는 유리창에 딱 붙어서 연신 감탄사를 남발하는 아이들이 부끄러워져서 저도 모르게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서야 했습니다. 비행기를 탑승하고 나서는 기내식은 왜 안주냐는 딸들의 질문에 내년에는 기내식을 주는 해외여행을 가자고 딸들과 제 자신에게 약속했습니다. 비행기를 탔다는 것만으로도 너무나 즐거운 아이들과는 달리 가는 내내 저는 미안한 마음이 가득했습니다. 이제는 아이들이 원하는 것을 더 많이 해주겠다는 다짐을 하는 사이, 어느덧 제주공항에 도착했습니다.




도두봉으로 올라가는 길

제주공항에서 내린 후 렌터카를 타고 제일 먼저 향한 곳이 도두봉이었습니다. 제주공항과 멀지 않으면서 제주시 숨은 비경 31에 속하는 도두봉은 해발고도 63m에 불과해서 아이들이 금방 오를 수 있고, 정상에서 바라보는 해안이 아름답기 때문입니다.


도두봉 오름은 섬의 머리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작은 오름이 어떻게 제주도의 머리가 되었는지 생각해보면 탐라국의 역사와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탐라국은 삼국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 제주도를 통치하던 소국이었습니다. 제주도를 대표하는 탐라국 수도가 도두봉 오름에서 내려다보이는 도두동입니다. 백제와 신라에 출발하던 탐라국 사절단이 먼 바다로 나가면 많은 사람들이 도두봉에 올라 안전한 귀가를 기원했고, 사절단이 탐라국 수도로 돌아올 때 제일 먼저 보이는 곳이 도두봉이었기에 섬의 머리라는 이름이 잘 어울립니다.




60년대부터 마을회가 관리하는 제단

제주도 설화에 따르면 고을나, 양을나, 부을나 세명이 삼성혈에서 솟아났다고 합니다. 세명은 벽랑국 세공주와 결혼하여 자손을 낳으며 제주도에 농경생활과 문명을 정착시키며 탐라국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탐라국은 교통의 요지에 위치하면서 늘 주변국들로부터 위협을 받아야 했고, 섬이라는 특성상 팽창하기 어려운 탐라국은 고구려·백제·신라 외에도 중국 당나라와 일본과 수교를 맺으며 나라의 안위를 보존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주변국과 대등한 관계로 수교를 맺을 국력이 없던 탐라국은 신하의 예를 갖추며 관직을 받고 나라의 안위를 보존할 수 있었습니다. 탐라국과 가장 가까우면서도 영향력이 컸던 백제에게 조공을 바치며 좌평이라는 관등을 받았다는 기록에서 약소국이었던 탐라국을 처지를 알 수 있습니다. 백제의 보호 아래 탐라국은 안정을 취하며 발전했으나 백제가 멸망하자 탐라국은 곧바로 신라의 속국임을 자처하며 왕국을 지켜나가게 됩니다.




도두항과 해변가를 전망할 수 있는 풍경

통일신라시대에는 중앙에서 관리를 파견하여 직접 통치하는 방식이 아니라 기존의 지배세력을 끌어들여 간접 통치하는 체제였기에 탐라국의 멸망하지 않고 나라를 보존할 수 있었습니다. 통일 신라가 멸망한 후에도 탐라국은 고려에게 조공을 갖다 바치며 오랜 시간 존속했으나, 고려 중기부터 지방에 관리를 파견해 직접 통치하는 방식으로 변화되는 흐름을 거스르지는 못했습니다.


결국 고려 숙종 때에 탐라국은 지방행정구역으로 편입되어 왕국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하게 됩니다. 이후 의종 때에는 군에서 현으로 격하되고 제주도와 관련된 행정업무를 현령이 담당케 하면서 탐라국 왕실은 실질적인 통치력을 상실합니다. 마침내 1211년 고려 희종 때에는 제주로 명칭이 바뀌면서 탐라국의 왕족들은 성주와 왕자라는 직위만 남아 명맥을 간신히 유지하게 됩니다. 전국을 군현으로 개편하여 중앙에서 파견한 관리를 통해 직접 통치하는 조선시대에는 성주라는 이름이 가지고 있는 의미마저 사라지고 좌도지관·우도지관이라는 관직으로 불리며 중앙행정조직으로 완전히 편입되었고 세종 때에는 왕족들 모두 평민화됩니다.





벤치에 앉아 천천히 여유를 즐길 수 있는 도두봉

문헌기록에 등장한 476년부터 고려의 지방행정구역으로 편입된 1105년까지 계산해도 탐라국은 629년 동안 존속했다는 계산이 나옵니다. 탐라국 왕족이 조선 세종 때까지 명맥을 유지한 기간으로 본다면 1000년이 넘습니다.


결코 짧은 기간이 아닌데 탐라국에 대해 우리는 잘 알지 못하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한반도의 역사에 크게 영향을 주지 않았던 소국이었던 것에 기인합니다. 두 번째는 조선시대 제주도에 극심한 탄압과 수탈이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탐라국을 격하시켰던 것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제주도 사람들에게 본토의 나라와 뿌리가 다르다는 인식을 심어줄 수 있는 탐라국을 없애버림으로써 수탈에 저항하는 제주도 사람들의 구심점을 제거했다고 보면 됩니다. 탐라국 시대 중국과 일본으로까지 사신단을 파견할 정도로 배를 건조하는 기술이 발달했던 제주도가 조선시대에는 뗏목만 사용하여 바다에 나아가야 했던 것은 가혹한 수탈에 도망칠 수도 없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배를 건조하지 못하게 하면서 제주도민들은 선조들이 세웠던 탐라국을 잊고 무기력하게 자신들에게 다가오는 시련의 운명을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도두봉에서 바라본 도두항의 모습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탐라국은 고려시대 현으로 격하되어 일반 마을이 되고, 탐라국의 왕들이 나라의 운명을 고민하던 도두봉 오름은 봉수대로 변합니다. 도두봉 오름이 조선 초 도원 봉수대라 불리며 나라의 위급함을 알리는 장소로 사용되었음을 오름에 세워져 있는 작은 비석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한 나라에서 지방행정조직으로 편입되어 어려운 삶을 살아야 했던 제주도는 2000년대 그 위상이 바뀌었습니다. 이제는 대한민국의 영토로서 한국인만이 아니라 전 세계의 많은 사람들이 제주도의 아름다운 풍경을 보러 옵니다. 


하지만 제주도에서 아직 사람들이 많이 찾지 않는 곳이 도두봉 오름입니다. 그러기에 2009년도에 제주시의 숨은 비경으로 선정되어 소개되고 있습니다. 도두봉이 왜 숨은 비경인지 직접 가보면 알 수 있습니다. 도두봉이라고 알리는 표시가 크지도 않고, 오름 정상에 도달하기까지 작은 야산을 올라가는 듯하여 특별한 볼거리가 없습니다. 오름 정상에 도착해도 해변을 끼고 있는 도두동의 전경은 일반적으로 접할 수 있는 해안마을을 보는 듯했습니다. 도두봉 오름은 분화구도 없기에 제주도만의 특별한 자연경관을 기대한 사람들에게는 다소 실망스러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면 시선이 멈추는 곳마다 각기 다른 풍경을 감상할 수 있으며 지금은 사라진 탐라국을 만날 수 있는 멋진 장소입니다. 더불어 날씨만 덥지 않다면 홀로 벤치에 앉아 음악을 들으며 저녁노을을 감상하고 싶어 지는 곳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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