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 영주시
소수 서원으로 가는 길
우리나라 역사를 배울 때 빠지지 않고 배우는 것 중의 하나가 소수 서원입니다. 수업시간에 우리들은 소수서원을 사액 서원이라고 배웠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액이란 의미도 모른 채 달달달 외우기만 했습니다. 시험 단골 문제로 우리나라 최초의 사액 서원을 묻는 질문이 나올 때마다 기계적으로 소수 서원이라는 답을 채워놓기에만 바빴습니다. 그러다 보니 역사는 의미 없이 무조건 외워야 하는 암기과목이 되어 모두가 기피하는 학문이 되어버렸습니다. 만약 사액 서원이 조선시대 국가로부터 편액(扁額)·서적·토지·노비 등을 하사 받은 사립학교라는 것을 알았다면 소수 서원을 보는 관점이 달라졌을 것입니다. 사액 서원을 통해 조선이 교육을 통치의 근간으로 삼고 가르치는 일에는 무엇하나 아낌없이 지원을 하던 교육 강국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대한민국이 약소국에서 세계 주역으로 성장하는 데 있어 큰 역할을 담당했던 교육의 힘이 오늘날 갑자기 생긴 것이 아니라 오래된 문화와 전통에 기반했음이 자랑스럽기만 합니다.
소수 서원으로 가는 길목에 놓인 당간지주
우리나라 최초로 국가의 지원을 받았던 소수 서원이 위치한 곳은 신라시대부터 숙수사라는 사찰이 있던 곳입니다. 소수 서원의 자리가 예전에는 사찰이었음을 보여주는 당간지주가 서원으로 가는 길목에 남아있습니다. 오솔길 옆으로 키가 높은 당간지주의 규모를 봤을 때 숙수사라는 절이 매우 크지 않았을까 생각해봅니다. 당간지주를 잘 모르는 분들이 계실 것 같은데 당간지주란 사찰을 알리기 위해 불화가 그려진 깃발을 걸었던 당간을 지탱하기 위해 세웠던 기둥을 말합니다. 소수 서원에 있는 당간지주는 많이 훼손된 상태이지만 그 가치를 인정받아 국가로부터 보물 제59호로 지정된 소중한 문화재입니다. 당간지주를 보면서 오묘한 느낌을 받는 것은 저만 그런 듯 대부분의 사람들은 당간지주를 슬쩍 쳐다보며 지나갑니다.
조선시대 불교를 억압하고 성리학을 숭상하는 정책의 일환으로 사찰이 있던 자리에 서원을 만든 것인지, 아니면 우연의 일치인지 궁금해집니다. 소수서원 근처에서 숙수사와 관련되어 출토되는 유물과 유적의 양이 상당하다는 점에서 인근에 위치한 부석사에 뒤지지 않을 큰 사찰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고 하는데 왜 갑자기 사라진 것일까? 성리학이 과거의 영성을 잃어버린 지금 여기서 무엇을 봐야 하는지 머릿속에서 끊임없는 질문이 떠오릅니다.
학생들이 쉬던 취한대
소수 서원으로 가는 길목의 얼어붙은 하천 옆으로 정자가 눈에 뜨입니다. 이 정자의 이름이 취한대로 퇴계 이황이 공부하다 지친 학생들이 쉴 수 있도록 만든 장소입니다. 쉬지도 못하고 공부를 해야 하는 오늘날과는 다르게 휴식의 가치를 이미 알고 실천했음에 감탄하게 됩니다. 지금의 취한대는 복원된 건물로 고적함을 주지는 못하지만 그 위치가 가히 절묘합니다. 취한대는 앞으로는 시원하게 흐르는 죽계천의 물소리를 들으며 뒤편의 낮으막한 야산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마음속의 번잡함을 내려놓고 휴식을 취하는데 부족함이 하나 없어 보입니다.
소수 서원 앞 500년 넘게 그 자리를 지키는 보호수
취한대를 뒤로하고 소수 서원을 들어가기 전 거대한 크기의 나무를 마주하게 됩니다. 수령이 500년을 넘어 나무의 높이와 둘레도 거대하지만, 소수 서원과 함께 시작해 오늘날까지 함께 하고 있다는 점에서 특별함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소수 서원에 수많은 인재들이 모여들고 배움을 통해 훌륭한 인물로 거듭나던 그 옛날에는 작은 나무에 불과했지만, 지금은 소수 서원을 위에서 내려다볼 정도로 자라 보호수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현재는 서원을 방문하는 사람들을 반갑게 맞이하며 소수서원의 가치를 높이고 있습니다. 이 외에도 소수 서원에는 여러 그루의 보호수가 있어 눈을 조금만 돌려도 오랜 역사와 전통을 만날 수 있습니다.
시를 짓고 학문을 토론하던 경렴정
소수 서원 입구의 우측으로 주세봉이 지은 경렴정이란 정자를 마주할 수 있습니다. 경렴정은 서원에서 학문을 닦던 원생들이 모여 시를 짓고 학문을 토론하던 장소입니다. 서원에서 공부하던 학생들이 선생에게 배우고 익힌 학문을 바탕으로 국가가 제 기능을 발휘하여 백성들이 편안한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자신들이 해야 할 일을 모색하던 공간이었습니다.
소수 서원의 시작은 조선 중종 때 풍기군수였던 주세봉이 성리학을 들여왔던 고려시대의 유학자 안향의 위패를 모시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주세봉은 1542년에 안향을 위한 사묘를 세우고 성리학을 인근 양반 자제들에게 가르치기 위해 오늘날 사립학교에 해당하는 백운동 서원을 세우게 됩니다. 이후 풍기군수로 부임했던 퇴계 이황은 백운동 서원을 보면서 전국적으로 보급해야 할 좋은 모델로 생각하게 됩니다. 인근 지역 출신의 훌륭한 성리학자를 배향하여 학생들의 좋은 본보기로 삼고, 조선 현실에 맞게 뿌리내린 성리학을 유생들에게 가르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사람의 도리를 가르치기보다는 양반 자제들을 통해 일반 백성들에게 삶의 도리를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한 이황은 양반의 자제들만을 대상으로 교육하는 서원이야말로 국가에 필요한 최적의 교육기관으로 봅니다. 이에 이황은 조선의 미래를 위해 명종에게 국가 차원에서 서원을 지원해줄 것을 간곡하게 건의합니다. 명종은 퇴계 이황의 건의가 충분히 타당하며 국가를 위해 꼭 필요한 일이라며 '소수 서원'이라는 친필 현판을 하사하며 각종 지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소수 서원은 조선 최초로 국가의 지원을 받는 사액 서원이 됩니다.
제물을 살피던 성생단
서원에서 중요한 기능이 공자나 그의 제자들이 아닌 조선의 선현에 대해 제사를 지내는 일입니다. 조선시대는 성리학의 나라라고 부를 만큼 일상생활에까지 성리학이 뿌리를 내렸습니다. 서원에서는 성리학을 보급한 선현을 기리면서 자신들의 흐트러지는 몸과 마음을 가지런히 할 수 있도록 제사를 올렸습니다. 제사를 통해 현재의 우리가 존재하는 것은 선조들이 있었기에 가능한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감사하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리학을 들여온 안향은 더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안향을 배향하는 데 있어 소수 서원은 필요한 제물을 허투루 다루지 않고 정성을 다했습니다. 서원 앞에 있는 성생단은 매년 봄과 가을에 안향을 위해 제사상에 올릴 가축의 흠결을 살펴보던 곳입니다. 그리고, 제단터 위에 둔턱은 거북이가 알을 품고 있는 모습으로 영귀봉이라 부릅니다. 거북이가 수백 년을 살아가며 알을 품듯 영귀봉에는 수백 년 된 적송이 그 자리를 채우며 장관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 소나무들이 500여 년간 서원에서 흘러나오는 경문을 들으며 선비들의 충절을 배웠다고 해서 학자수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서책을 보관하던 장서각
소수 서원에 들어서면 서책들을 보관하던 장서각을 마주할 수 있습니다. 오랜 역사를 지닌 서원이라 수많은 서책을 보관하는 서고의 규모가 클 것으로 예상했던 것과는 다르게 크기가 아담했습니다. 너무 작은 크기의 서고 장서각에 적지 않게 놀랐습니다. 사실 창덕궁의 규장각도 실제로 보면 규모가 크지 않습니다. 오늘날에 비해 상대적으로 책의 수량이 적을 수도 있고, 출간하는 시설도 적어 유통이 원활하지 않아 그럴수도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만큼 과거에는 책이 매우 귀했다는 사실입니다. 책을 보유하는 것이 어려웠던 시절 국가가 서원에 무상으로 서적을 지원한 이유는 서원이 가지고 있는 교육이라는 기능 때문입니다. 세상에 공짜는 없겠죠. 서원을 다니는 서생들은 몸가짐을 바로하며 학문에 매진해야 했습니다. 만약 과거 시험에만 연연하거나 미풍양속을 해치는 경우 가차 없이 서원에서 쫓겨나야 했습니다.
손 씻는 관세대
서책을 보관하던 장서각 앞에는 관세대가 있습니다. 방문객들은 관세대에 큰 관심을 갖지 않고 스쳐 지나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소수서원을 방문한 분들에게 관세대를 보았냐고 물어보면 고개를 꺄우둥하며 기억하지 못할 분도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관세대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물건입니다. 관세대는 사당을 참배할 때 손을 씻을 수 있도록 대야를 올려놓는 받침돌입니다. 서원의 기능이 문묘종사로 훌륭한 성릭학자를 받들어 그분들의 뜻을 가슴에 새겨야 하는 만큼 서원 내에서는 늘 정갈함과 경건함을 갖추어야 합니다. 그래서 유생들은 늘 이곳에서 손을 씻으며 선현들의 뜻을 이어받고 세상을 바로잡을 학문을 익히며 기상을 마음에 품는 시작점이 바로 관세대입니다.
교수들의 숙소 일신재와 직방재
일신재와 직방재는 교수들이 기거하던 숙소입니다. 전각 이름에서 교수들도 학생들과 같이 학문을 익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밝히고 있습니다. '선생'이란 말이 먼저 세상을 접하면서 겪은 일들을 후대에게 알려주는 먼저 태어난 사람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즉, 선생은 아랫사람이 시행착오를 겪지 않고 지금보다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도록 도와주는 사람으로 봐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일신재와 직방재는 선생의 의미를 적절하게 담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일신재는 일반 교수와 원임들이 쓰던 방으로 '나날이 새로워지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일신재는 교사로 학생들을 가르치는 저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고 반성하게 합니다. 늘 학생들을 위해 교사가 솔선수범해야 하며, 더 나은 수업을 위해 끊임없이 연찬할 것을 저에게 알려주고 있었습니다. 직방재는 원장이 쓰던 방으로 '안과 밖을 곧고 바르게 하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인생을 현명하고 슬기롭게 사는 방법을 알려주어야 하는 교사가 교실 안과 밖에서 이중적인 모습을 보이지 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자신이 내뱉은 말에 책임을 질 수 있도록 경계하라는 직방재 이름에 저절로 고개가 숙여집니다.
시간을 알려주는 일영대
사당 앞에는 시간을 알려주는 일영대가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일영대는 시간을 측정하는 해시계로 지금의 시간 표현방법과는 달리 12 간지로 시간을 알려줍니다. 자기관리에 소홀하면 미래를 이끌 인재로서의 자질을 갖지 못했다 할 수 있습니다. 서원에서는 수업을 받는 양반 자제들이 자기관리를 철저히 할 수 있도록 일영대를 서원 한 복판에 세워두었습니다.
일제는 우리를 식민 통치하면서 코리아 타임이라는 것을 이야기했습니다. 코리아 타임으로 한국인은 시간 개념이 없을 정도로 게을렀기에 식민지가 되었다는 논리로 사용했습니다. 한국 사람들은 자기 관리를 하지 못하는 미개한 사람들이었는데 일제가 한국을 통치하면서 문명인으로 거듭날수 있도록 만들어주었다 이야기하고 다녔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아무런 비판의식도 갖지 못한 채 사실인 듯 말하고 우리 스스로를 비하했습니다. 시간을 알려주는 시계가 보급되지 못했던 사회적 현상을 이해하고, 조선 후기 양반이라는 권위의식에 찌들어 아랫사람을 무턱대고 무시하는 일부 사람들에게만 국한된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지금도 코리아 타임을 이야기하며 한국을 비하하는 사람들에게 일영대와 같이 시계를 늘 옆에 두고 한치의 흐트러짐이 없도록 철저하게 자기 관리했던 역사적 사실을 알려주고 싶습니다.
선현을 모셔놓은 영정각
영정각에는 소수 서원과 관련된 분들이나 퇴계 이황의 문인으로 크게 이름을 떨친 여러 선현을 모셔놓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역사시간에 한 번쯤을 들어봤을 허목, 이원익, 주세봉, 이제현 등 뛰어난 위인들이 모셔져 있습니다. 소수서원을 거친 분들이 4000여 명이 넘으니 조선시대를 이끌었던 훌륭한 지도자들을 얼마나 많이 배출했겠습니까? 그중에서도 소수 서원에서는 최소한 세 분은 알아야 합니다. 소수 서원이 존재할 수 있도록 성리학을 국내에 처음으로 들여온 안향과 백운동 서원을 세워 안향에게 제사를 올리고 그 학풍을 이어가려 했던 주세봉, 그리고 최초의 사액서원이 될 수 있도록 조정에 건의한 이황 선생을 기억하면 됩니다. 아마 이 세분을 기억하신다면 소수 서원과 관련된 문제를 모두 맞힐 수 있을 것입니다.
학생들의 기숙사였던 학구재
유생들이 서원에 머물면서 공부를 하던 기숙사 역할을 하던 전각 이름은 학구재입니다. '학문을 구한다'라는 의미를 가진 학구재는 학생들이 늘 학문을 탐구하는 자세를 놓지 말라고 이야기합니다. 또한 학구재가 세 칸으로 구성된 이유도 3이라는 숫자가 학문을 담고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늘 학업을 닦는 일이 숨을 쉬듯 자연스러운 일상생활과 같아야 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저 같은 사람은 현판을 보자마자 숨이 막히는 압박감을 받습니다. 공부보다는 여행을 다니며 세상을 둘러보는 것이 좋은 저에게는 조선시대에 태어나지 않은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습니다.
소수 서원 사료관의 뒤편
소수 서원을 방문하면서 개인적으로 아쉬웠던 점이 명륜당 보수공사였습니다. 서원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명륜당을 보지 못해 너무 안타까웠습니다. 보수 공사하는 규모를 보면서 강습 공간이었던 명륜당의 모습이 매우 궁금했습니다. 그러나 서원 내에 만들어진 사료관이 있어 위안을 삼을 수 있었습니다. 사료관을 통해 소수 서원의 전반적인 내용을 한눈에 보고 배울 수 있어 명륜당을 보지 못한 아쉬움을 조금이나마 달랠 수 있었습니다.
현재 소수 서원은 영주 시내에서 벗어난 곳에 위치하고 있지만 과거 조선시대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배움을 익히기 위해 몰려들면서 북새통을 이루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만큼 소수 서원에는 오랜 역사와 함께 조선을 이끌었던 인물들이 많이 배출되어 이야깃거리가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조선 후기 서인들이 권력의 중심에 서있으면서 동인 계열의 서원이었던 소수 서원은 거론할 만한 인물들이 많이 나오지 않습니다.
소수 서원 옆으로 흐르는 죽계천
조선 후기 이황 계열의 동인이 권력에서 밀려나지 않았다면 소수 서원은 지금과는 어떻게 다른 모습을 가지고 있을지 궁금합니다. 동인 계열이 몰락하지 않았다면 조선 후기의 역사는 어떻게 변했을지 상상하다 보니 너무 멀리 갔음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크게 의미가 없는 상상을 통해 근심 걱정을 하다 보니 머리가 지끈 아픕니다. 그리고, 몸과 마음이 가벼워지려고 여행을 떠나온 이유를 잠시 망각했음에 허탈감도 밀려왔습니다.
소수 서원을 나와 죽계천을 바라보니 묵직해졌던 마음이 흐르는 물소리와 겨울바람에 흩날리며 머릿속이 상쾌해집니다. 죽계천은 겨울에도 불구하고 풍부한 강수량을 자랑하며 자태를 뽐내며 흐르고 있습니다. 소수 서원 자체로도 멋진 풍경을 자아내지만 서원을 둘러싼 죽계천과 소나무 숲도 천천히 걸으며 복잡한 일상 속에서 벗어나 자연을 감상하기에도 충분한 자격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주세봉이 새겨놓은 敬
소수 서원 옆으로 박물관과 함께 선비촌도 있어 교육과 함께 볼거리와 먹거리가 풍부한 관광지로 개발이 되어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선비촌과 박물관을 담아내지 않았습니다. 옛 모습 그대로를 통해 과거의 모습을 재현해보고 싶었습니다.
죽계천에 주세봉이 '敬'이라는 글자를 붉은색으로 새겨놓은 바위가 있습니다. '공경할 경'을 새겨둔 이유를 생각해봅니다. 조선 시대는 모든 사람들이 도리를 알고 행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 국가 목표였습니다. 그리고, 사람의 도리를 깨닫고 가르치는 것이 선비가 갖추어야 할 덕목이자 의무라고 여겼습니다. 사람의 도리를 가르치는 성리학을 도입한 안향을 배향하고, 성리학을 통해 깨달음을 얻어 실천했던 선현들을 배우고 따르고자 하는 의지를 '敬' 한 글자에 담아놓은 지혜에 감탄할 뿐입니다. 소수 서원을 통해 어르신을 공경하고 받들며 아랫사람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는 것을 제1순위로 여기고 적극적으로 힘써 도와주었던 문화강국이자 교육강국이던 조선을 느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