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평창군
이승복 어린이 동상
지금은 초등학교라 부르지만 과거에는 국민학교라 부르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국민학교라 부르던 시절에 반공교육은 매우 중요한 교육과정으로 늘 강조해도 부족함이 없던 시절이었습니다. 수많은 반공교육 중에서도 이승복 어린이의 '공산당이 싫어요'는 북한의 무자비한 잔혹함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였습니다. 그래서 도덕교과서에는 이승복 어린이가 무참하게 살해되는 과정을 실어놓고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국민학교를 다녔던 세대들은 학습을 통해 이승복 어린이를 모두 알고 있습니다. 현재는 교과서 단원에서 빠지면서 요즘 아이들이 이승복 어린이를 알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승복 어린이의 '공산당이 싫어요'는 실제 사건이 아니라 반공교육을 위해 만들어낸 허구라는 이야기가 퍼져나갔습니다. 1992년 한 매체의 편집국장이었던 김종배라는 분이 이승복 사건은 조작된 사건이라는 글을 쓰면서 사실 유무에 대한 논란이 일었습니다. 수업 시간을 통해 이승복 사건은 의심할 여지가 없이 당연한 사실로 여기고 있던 저는 혼란을 겪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훗날 이승복 사건이 사실이라는 발표가 있었지만, 직접 확인해보지 않았으니 만약 조작된 허구의 사실을 잘못 알고 있는 것은 아닌지 늘 고민을 해야 했습니다.
복원된 이승복 어린이 생가
여름방학을 맞아 가족들을 데리고 여행도 하면서 사실을 확인할 겸 이승복 기념관을 방문했습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승복 어린이는 실존하는 인물이며 실제 있었던 끔찍한 역사입니다. 이승복 사건은 분단으로 인해 겪은 아픔이며, 빠른 시간 내에 통일을 해야 하는 당위성에 무게를 실어주는 사실입니다. 즉, 남북한이 같은 민족임을 재확인하고 서로를 미워하고 싫어하는 해묵은 감정의 골을 해소시켜야 함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이승복 기념관은 누구나 무료로 관람을 할 수 있도록 개방되어있습니다. 이승복 기념관이 위치한 장소는 이승복 어린이가 피살되었던 집이 아니라 늘 가방을 메고 공부를 하러 가던 초등학교 자리입니다. 그래서, 농어촌에 많은 학교들이 폐교되는 오늘날 이승복 기념관은 폐교를 앞둔 학교들의 좋은 모델이 되기도 합니다. 이승복 기념관은 굉장히 넓은 공간에 다양한 체험학습장을 만들어놓아 볼거리가 다양합니다. 반공이라는 무거운 주제만 있는 것이 아니라서 아이들과 방문해서 재미있고 유익한 시간을 보낼 수 있습니다.
강원도 교육청에서 마련한 전시관
이승복 생가 옆으로 강원도 교육청에서 만들어놓은 전시장이 위치하고 있습니다. 강원도 지역 학생들의 옛 모습을 담은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전시관은 어른들의 경우 향수에 잠기고, 어린아이들은 '검정고무신'을 통해 기억하는 60~70년대를 확인하며 가족 간의 소통의 장을 열 수 있는 공간이었습니다. 여러 사진 중에 유독 눈길이 가는 몇 장이 있었습니다. 그중 첫 번째는 너무나 예쁘고 귀여운 다섯 소녀가 카메라를 보며 해맑게 웃고 있는 사진이었습니다. 맨 오른쪽의 아이는 서구적인 외모에 해맑은 미소가 너무 예뻤고, 가운데 소녀는 사춘기에 접어들었는지 어른스러운 모습을 보이고자 하는 모습이 귀엽기만 합니다. 사진 속 아이들은 현재 50대의 중년이 되어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을지 궁금해집니다. 누군가와 예쁜 사랑을 나누며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 살아가는 모습도 궁금하지만, 무엇보다 현재도 저 해맑음 모습이 남아있을지가 너무나 궁금합니다.
이런저런 상상을 하다 소녀들 앞에 있는 수십 마리의 작은 강아지들을 들여다보다 깜짝 놀랐습니다. 작은 강아지들은 소녀들이 잡아온 듯한 새앙쥐였습니다. 어른들이 예전에는 학교에서 쥐를 잡아오는 숙제를 자주 내주어 방과 후에 쥐를 잡는 것이 일상생활이었다고 말씀하시던 것이 떠오릅니다. 당시 쥐를 잡는 것이 힘들기도 했지만 재미있는 놀이도 되었다는 이야기를 사진으로 확인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서울에서 태어나서 자라기도 했지만, 사진 속의 소녀들보다 어린 저에게는 쥐를 잡고 해맑게 웃는 소녀들을 놀란 눈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지금도 쥐를 보면 기겁하고 도망가려는 저는 딸들과 의도치 않게 하나가 될 수 있었습니다.
총검술하는 교련시간
두 번째 사진은 교련시간 총검술을 익히는 사진입니다. 현재는 고등학교 교과목으로 교련이 없지만 1995년까지는 꼭 배워야 하는 필수 교과목이었습니다. 일제강점기 이후 정규 교과목으로 편성되다 사라지기를 반복하다가 1969년부터 고등학교는 연 68시간, 대학교는 연 60시간을 꼭 이수해야 했습니다. 군사정권이 무너지기 시작하는 1990년에는 대학에서 교련과목이 삭제되고 고등학교만 정규과목으로 남게 됩니다. 그리고, 1993년부터는 군사훈련을 하지 않고 안전교육으로 내용이 변경되다 1996년도에는 정규 교과에서 사라지게 됩니다.
저는 고등학교 과정에서 마지막 총검술을 배웠던 세대입니다. 군인으로 제대한 교련 선생님들은 체육선생님보다도 훨씬 무서웠습니다. 군대에 행해지던 구타를 직접 학생들에게 체험시켜주면서 군대를 미리 체험해 볼 수 있도록 해주었습니다. 그리고, 학교 건물 뒤 창고에서 나무로 제작된 총기를 가지고 집총 각개 16개 동작을 익히고 시험 보던 시절이 떠오릅니다. 16개 동작을 잘하지 못하면 교련선생님의 앞으로 취침, 뒤로 취짐 소리에 학교 뒷마당에서 뒹굴던 90년대의 나의 모습을 떠올리다 흠칫 놀랐습니다. 너무나 오래되어 기억을 하지 못했던 것도 놀랍지만,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는 교육과정을 내가 했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도 아이들에게 아빠도 사진 속 학생들처럼 고등학생 때 총검술했다고 말하는 모습 속에서 아재란 사실을 스스로 확인 사살하며 자랑스러워하는 모습에 스스로 기가 막힐 뿐입니다.
화단 조성을 위해 흙을 이고 가는 학생들
이 사진을 보면서 학생들이 단체로 빨래를 하러 가는 줄 알고 의아하게 생각했습니다. 왜 세숫대야를 머리에 이고 줄을 맞추어 이동하고 있는지 작품명을 볼 때까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작품명에서 학생들이 화단을 조성하기 위해 흙을 나르는 모습임을 알게 되면서 문화적 충격을 받았습니다. 오늘날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들이 너무 자연스러워 보였습니다. 만약 아이들을 학교에 보냈는데 수업은 하지 않고 학교를 개보수하는데 동원을 한다면 요즘 학생과 학부모들은 가만있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어린 시절 이렇게까지 학교 공사에 필요한 노동력을 제공하지는 않았지만 학교의 뒷정리를 해야 했습니다. 초등학교 시절 수업이 끝나면 반강제적으로 친구들과 함께 청소를 해야 했습니다. 나무 복도에 왁스를 잔뜩 뿌린 다음 엉덩이를 하늘을 향해 번쩍 추켜올리고, 손에 잡힌 걸래에 힘을 주어 전속력으로 복도 끝까지 달려갔습니다. 옆 친구보다 먼저 복도 끝에 도달하기 위한 작은 시합이 청소시간마다 열렸습니다. 심판도 없는 복도 닦기 달리기 시합은 치열했습니다. 복도 닦기 시합에서 우승하고 나면 남는 것은 시커멓게 더럽혀진 바지와 양말 그리고 소매 끝이었습니다. 그러나 옷이 더러워져도 엄마에게 혼날 걱정은 안 했습니다. 그 당시 바지가 왁스로 번질거리며 더럽혀진 것은 학교생활을 열심히 했다는 증거로 칭찬받을 행동이었습니다.
기념관 내 자연학습장
옛 모습을 담은 재미있는 사진을 보고 아이들과 자연학습장에 들어갔습니다. 자연학습장에는 여러 동물과 식물이 전시되어있어서 동식물에 관심이 있는 아이들에게 교육적으로 효과가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다른 자연학습장처럼 잘 구성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아무래도 이승복 기념관의 주제는 분단의 현실이라 자연학습장의 비중이 낮았습니다. 개인적으로도 자연학습장을 여러 군데 다니다 보니 큰 흥미를 끌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다양한 주제를 가지고 볼거리를 만들어 운영한다는 점에 박수를 보내드리고 싶습니다.
이승복 어린이가 신었던 고무신
이승복 기념관에 들어서면 이승복의 이야기를 영화로 보여줍니다. 영화 속에서 북한 무장공비의 잔혹함은 말로 표현하지 못할 정도로 끔찍했습니다. 영화의 무서움에 온 몸 가득 닭살이 돋았습니다. 개인적으로 공포영화도 웃으면서 볼 정도로 무서움을 잘 타지 않습니다. 그러나 기념관에서 상영되는 영화는 현실을 기반으로 리얼하게 만들었기에 더욱 공감되고 무서웠던 것 같습니다. 영화의 잔혹함에 아이들에게 영화를 보여줘도 되는지 고민도 되었습니다.
이승복은 1959년 생으로 할머니와 부모님 그리고 4형제와 평창에서 살았습니다. 이승복 가족은 산을 일구어 만든 밭에서 옥수수를 재배하며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1968년 울진, 삼척 지역으로 무장공비 130여 명이 침투한 사건이 벌어지게 됩니다. 무장공비들은 국군에 쫓기면서 여러 분대로 흩어져서 북으로 올라가던 중 먹을 것을 구하러 이승복의 집을 습격하게 됩니다. 습격한 무장공비는 이승복 어린이에게 공산당이 좋은지 물어봅니다. 총을 들고 일가족을 위협하며 먹을 것을 뺏어가는 무장공비에게 9살이었던 이승복 어린이는 공산당이 싫다고 대답을 합니다. 이에 화가 난 무장공비는 이승복 어린이의 입을 귀밑까지 찢어서 죽이고, 나머지 일가족도 죽여버립니다. 할머니와 아버지는 도주하여 군관에 신고를 하고 가족들을 구하기 위해 달려오지만, 가족들이 살해된 비참한 현장만을 목격하게 됩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이 큰 아들이 무장공비에게 36군데나 칼을 찔렸지만 살아남아 분단 비극의 아픔을 후대에 알릴 수 있었다는 점입니다.
가슴이 아파 제대로 바라볼 수 없는 이승복 어린이
아직 비판적 사고를 제대로 하지 못하는 어린아이가 학교에서 배운 데로 공산당이 싫다고 대답했다가 일가족이 비참하게 죽은 사건은 누구의 책임인지 생각해봅니다. 이승복 어린이의 죽음은 북한을 개, 돼지로 표현하며 물리쳐야 할 대상으로 교육했던 남한의 잘못일까요? 아니면 무력통일을 위해 민간인의 사살도 서슴지 않았던 북한의 잘못일까요? 저는 남북한이 서로를 죽이며 분단하게 된 역사에서 찾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의 통일을 만들지 못한 남북한 모두에게 책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린 소년이던 이승복이 신고 다니던 검정고무신이 더 이상 흙길을 달리지 못한 채 기념관에 보관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저는 이 사진을 보면서 눈을 질끈 감아야 했습니다. 9살짜리 이승복 어린이와 4살짜리 동생도 죽여버리는 만행을 저지른 공산당이 무섭고 싫어지는 마음도 들었습니다. 좀 더 솔직하자면 공산당이 싫은 마음보다는 무서움이 더 컸습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역사의 비극이 50년이 지난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에 마음이 착잡합니다.
이승복 어린이가 다니던 학교
기념관을 나와 하늘을 한 번 쳐다보고 무거워진 마음을 긴 한숨으로 내뱉어 버리고 이승복 어린이가 다니던 학교를 찾아갑니다. 이승복 어린이가 다니던 학교는 더 이상 학생들이 다니지 않는 폐교가 되었습니다. 아이들에게 국어와 수학을 가르치는 일은 하지 않지만, 분단의 아픈 과거를 통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학교는 과거에 사용하던 교육기자재를 관람할 수 있는 공간과 이승복 어린이가 다니던 교실의 모습을 재현해놓은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승복 어린이가 생활하던 교실
옛날 교육기자재를 아이들에게 설명해주며 교실에 들어설 때까지는 향수에 젖어들며 즐거운 마음으로 관람을 했습니다. 교실에 들어서며 아이들에게 석탄 난로를 통해 추운 겨울을 이겨내며 공부했던 시절을 이야기하다가 이승복 어린이가 앉았던 책걸상을 보게 되었습니다. 오른쪽 두 번째 자리가 이승복 어린이가 앉았던 책걸상으로 이름표가 놓여있었습니다. 이름표를 보는 순간 자리에서 멈춰 설 수밖에 없었습니다. 순간적으로 몸이 경직되어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습니다. 왜 움직일 수 없었는지는 지금도 표현하기가 어렵습니다. 이승복 어린이에 대한 미안함, 슬픔, 두려움, 안타까움 등 여러 감정이 복합되어 명확하게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이승복 기념관에 전시된 탱크
이승복 어린이가 다니던 학교를 나와 민속자료관도 들러 전통 생활도구와 생활상을 관람했습니다. 특별하게 볼 것이 있지 않았고 규모도 그리 크지 않았습니다. 넓은 기념관에는 탱크와 같은 군용 무기들이 전시되어 있어 남자아이들이라면 관심을 보일 수 있을 것 같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우리 가족들은 전쟁기념관을 여러 차례 관람해서 아이들이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제는 이승복 기념관을 뒤로하고 다음 여행지로 출발해야 하는 시점이 되었습니다.
학교 담벼락에 그려진 벽화
이승복 기념관을 나오면서 딸들에게 "공산당이 좋아? 싫어?"라고 물었습니다. 당시 9살짜리 큰딸은 '공산당은 나쁜 사람이니까 싫어.'라고 답을 한 반면, 4살짜리 둘째 딸은 "공산당 좋아."라고 대답을 합니다. 막내딸의 답변에 깜짝 놀란 저는 "왜?"라고 물었습니다. 둘째 딸이 공산당이 좋다고 대답한 이유가 너무나 궁금했습니다.
재차 묻는 저의 질문에 둘째 딸은 "공산당 싫다고 하면 총으로 빵 쏴서 죽이니까 좋다고 해야 해."라고 답하더라고요. 너무나 큰 반전에 머리가 멍해졌습니다. 그리고, 4살짜리 아이가 저보다 인생을 더 잘 아는 것 같았습니다. 난 왜 저런 생각을 못했을까? 나는 이미 고정관념이 자리 잡혀서 열린 사고를 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인생 사는 방법을 딸에게 배웠습니다. 인생 살아가는 방법을 가르쳐준 둘째 딸이 예쁘고 기특해서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볼에 뽀뽀를 해주었습니다. 그리고 9살짜리 큰 딸을 바라보니 이승복 어린이가 이렇게 어린 나이에 죽었구나 하는 생각에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이승복 기념관을 나오면서 이승복 어린이와 중첩되는 큰 딸을 제 품안에 꼭 껴안아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