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 울진군
깊고 길은 불영사 계곡
여행은 주로 1박 2일 일정으로 가족들과 함께 떠납니다. 여행을 자주 할 수 있는 여건이 아니기에 현지에서 먹는 아침식사로 여행을 시작합니다. 그리고 다음날 저녁을 먹고 서울로 출발을 하면 웬만한 2박 3일 코스를 소화하는 여행이 됩니다. 울진으로 떠나는 여행도 모두가 곤히 잠들어 있는 시간에 출발하여 어두컴컴한 밤길을 내달려야 했습니다. 날이 밝아올 무렵 울진으로 들어가는 불영사 계곡 초입에 들어설 수 있었습니다. 울진 초입까지 꼬불꼬불한 산길을 어둠 속에서 달리면서 도로 위 빙판으로 한순간도 긴장을 놓지 못했습니다. 내비게이션에서 불영사가 얼마 남지 않았다고 알려주자 몸에 긴장이 풀리기 시작했습니다. 긴장이 풀리자 주변 경관이 눈에 들어오면서 사랑바위를 구경도 할 겸 잠시 쉬어가기로 했습니다. 차를 세우고 잠들어 있는 가족들을 깨웠지만 잠이 덜 깼는지 차 밖으로 나가기 싫다고 해서 혼자 사랑바위로 향했습니다.
적송 전설이 담겨있는 사랑바위
사랑바위는 남녀가 서로 안고 있는 형태를 가지고 있습니다. 바위를 보면서 당연히 이성 간의 사랑이 얽혀있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사랑바위는 남녀의 사랑이 아니라 남매의 애틋함이 담겨있었습니다. 사랑바위에 내려오는 이야기를 따라가 보면 옛날 고아가 된 오누이가 약초를 캐며 어렵게 살고 있었다고 합니다. 어느 날 오빠의 꿈속에 신령님이 나타나 옥황상제가 매우 아프셔서 큰 걱정이라고 하소연을 하며 부탁을 합니다. 옥황상제를 구할 수 있는 방법은 불영사 계곡에 사는 삼지구엽초를 먹는 것인데 높은 벼랑 끝에 있어 아무도 따오지 못해 하늘에 근심 걱정이 가득하다고 말합니다. 너는 누구보다도 약초를 잘 캐니 옥황상제를 위하여 삼지구엽초를 가져다 달라고 부탁을 하면서 보상으로 큰 선물을 약속합니다. 오빠는 상을 받으면 어여쁜 여동생과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삼지구엽초를 캐러 가지만 안타깝게도 벼랑에서 떨어져 죽고 맙니다. 자신을 위해 약초를 캐러 갔던 오라버니가 죽은 후 삶의 의미를 잃어버린 누이동생은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오빠와 함께 하기 위해 벼랑에 올라 몸을 던짐으로써 이승에서의 삶을 마감합니다. 이를 가엾이 여긴 산신령은 미안하고 애틋한 마음으로 오누이를 바위로 만들었습니다. 바위가 된 오누이는 절대로 떨어지는 일이 없도록 서로를 꼭 껴안았습니다. 두 남매의 사랑이 얼마나 절실했는지 오늘날까지 한 번도 손을 풀지 않고 서로를 따뜻하게 품어주고 있습니다.
훗날 사람들은 누이동생이 오빠를 잃고 슬피 울던 통곡소리가 메아리친다고 하여 통곡산이라 불렀고, 오누이가 벼랑에서 떨어져 흘린 피가 소나무를 붉게 물들였다고 이야기하고 다녔습니다. 그래서 울진 지역의 붉게 물든 소나무를 적송이라 하며 특별히 울진 소나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사랑바위에서 소원을 빌면 사랑이 이루어져서 이별이 없다고 하니, 연인들은 이곳을 방문하여 영원한 사랑을 기도해보는 것도 괜찮을 듯싶습니다.
불영사로 가는 계곡길
불영사로 들어가는 길은 일주문을 통과하여 계곡길을 따라 올라가야 합니다. 차로 불영사를 들어가시는 분들도 계시지만, 저는 일주문부터 불영사까지 걸어가는 것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차를 타고 이동을 하면 많은 것을 놓치는 반면, 걸으면 평소에 보지 못했던 것을 보게 되는 경우가 많아 저는 걷는 여행을 좋아합니다. 특히 새벽에 걷는 불영사 진입로는 높은 절벽 사이로 깊게 나있는 계곡의 풍미와 함께 빽빽한 소나무 사이를 지나다 보면 몸과 마음이 건강해지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불영사로 가는 길목이 겨울에는 고적함을 선사해주면서 동시에 여름에 힘차게 굽이굽이 흘러내리는 물과 우거진 나무로 장관을 상상할 수 있는 선물도 줍니다. 한 겨울에 있으면서 여름을 기대하게 만드는 불영사 계곡입니다.
불영지에 비치는 전각들
불영사는 의상대사가 창건하여 1400년의 역사를 가친 고찰로 여러 설화와 보물을 가지고 있습니다. 신라시대 의상대사가 불영사 계곡을 지나다가 인도의 천축산을 닮은 바위를 보고 기이함을 느껴 가까이 가보니 용이 살고 있었다고 합니다. 의상대사는 용에게 이곳에 부처님의 설법을 펼 수 있는 사찰을 세우고자 하는 뜻을 설명하고 다른 곳으로 거처를 옮겨주기를 부탁합니다. 그러나 용은 이를 거부하고 의상대사를 내쫓으려 하자, 의상대사는 법력을 펼쳐 용을 강제적으로 내쫓게 됩니다. 의상대사의 법력을 이기지 못한 용은 억울함을 참지 못하고 산을 뚫고 홀연히 사라지자, 비로소 사람들은 용이 살던 연못을 메우고 사찰을 지을 수 있었습니다. 이후 의상대사는 용이 살고 있던 산을 천축산이라 부르고, 부처님의 형상이 비추는 연못이라는 의미를 담아 사찰의 이름을 불영사로 불렀습니다. 의상대사가 훗날 불영사를 다시 찾아왔을 때 한 노인이 '부처님이 다시 돌아왔다'라며 환영하였다는 이야기에서 불영사를 불귀사라고도 부르기도 합니다. 현재도 불영사 주변으로 용이 살던 계곡인 오룡소와 산을 뚫었다는 용혈 등이 있으니 불영사를 방문한다면 직접 가서 확인해보는 것도 재미있는 여행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물을 모셔놓은 법영루
불영사에서 가장 아름다운 전각은 화려한 팔작지붕 아래로 불영지를 내려다볼 수 있는 법영루로 흡사 경복궁의 경회루를 연상시킵니다. 법영루는 사물을 모셔놓은 전각으로 만물의 생명에게 부처님의 뜻을 전달하는 장소입니다. 불교에서 사물이란 범종, 법고, 목어, 운판을 가리킵니다. 범종의 소리로 인간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도록 하며, 법고는 네 발 달린 짐승에게 부처님의 마음을 전달하고자 소리를 내며 울립니다. 목어는 물에 사는 생물을, 운판은 하늘을 날아다니는 새들에게 업의 굴레를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한 자리에서 연못과 산을 바라보는 법영루는 날짐슴과 길짐승 그리고 물고기 외에도 사찰을 방문하는 인간 모두에게 부처님의 설법을 전할 수 있는 절묘한 위치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법영루는 오래된 전각이 아니지만 산을 배경 삼아 불영지에 비추어지는 모습이 가히 절경이라 할 수 있습니다. 초록을 다 떨구고, 있는 그대로의 겨울 천축산과 불영사 전각들이 불영지에 오롯이 비추어지는 모습은 흡사 속살이 살짝 비치는 얇은 한복을 입은 아리따운 여인처럼 매혹적인 자태를 풍깁니다. 법영루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하고 흔한 전각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주변 풍경이 있기에 가능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천축산과 불영지로 인해 생명이 불어넣어지고 고혹적인 아름다움을 지니게 된 법영루는 불영사를 대표하는 전각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습니다.
보물로 지정된 대웅보전
불영사의 대웅보전은 조선 후기 18세기에 지어진 전각으로 국가에서 지정한 보물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대웅보전은 석가모니를 모셔놓은 전각으로 사찰의 중심이 됩니다. 대부분의 사찰에서는 대웅보전에 석가모니불을 모시고 좌우에 아미타불과 약사여래를 배치하고 있습니다. 대웅보전에 부처님을 모셔놓고 있는 불단을 수미단이라고 부르는데 그 이유는 수미산 정상에서 부처님이 앉아 세상의 많은 사람들에게 깨달음을 얻어 해탈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대웅보전 내부에는 대부분 많은 탱화가 걸려있는데 그중에서도 석가모니가 영축산에서 제자들에게 설법을 하고 있는 영산회상도를 많이 볼 수 있습니다. 불영사의 대웅보전에도 영조 때에 그려져 보물로 지정된 영산회상도가 삼존불 뒤에 걸려있습니다.
우측에 있는 건물은 황화실로 환생전이라고도 불리고 있습니다. 옛날 울진 현령으로 임명되어가던 백극재라는 사람이 전염병에 걸려 세상을 하직하게 됩니다. 백극재는 집안의 가장으로서 가솔을 잘 이끌며 아내를 사랑하는 다정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남편이 부임 도중 갑작스레 세상을 떠나자 백극재의 부인은 슬픔을 감당하지 못해 남편의 시신을 가지고 불영사를 찾아와 부처님께 극락왕생의 기도를 올립니다. 3일 동안 밤낮을 가리지 않고 남편을 위해 기도를 드리던 부인이 지쳐 잠시 눈을 붙인 사이 꿈을 꾸게 됩니다. 꿈속에서 한 혼백이 나타나 십세(대)에 걸친 원한을 풀라고 소리를 치는 바람에 잠에서 깨어난 부인은 이상한 마음이 들어 남편이 누워있는 관 뚜껑을 열었습니다. 관을 열자 분명 죽어있던 남편이 숨을 내쉬며 깨어있었습니다. 부인은 부처님의 도움으로 남편이 환생할 수 있다고 믿고 감사의 마음으로 전각을 시주한 것이 오늘날 황화실이라고 합니다.
대웅보전을 짊어지고 있는 거북이
불영사의 대웅보전에는 다른 사찰에서 볼 수 없는 거북이 머리를 볼 수 있습니다. 보통 거북이 머리를 귀부라고 하여 비석을 떠받치는 돌을 말합니다. 비석을 받치는 귀부가 거대한 대웅보전을 짊어지고 있는 모습은 의아하면서도 신기하기만 합니다. 거북이가 불영사 대웅보전을 등에 지고 있는 이유는 불영사가 있는 천축산이 화산으로 불의 기운이 매우 높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불의 기운이 많아 사찰에 불이 날 위험이 높다고 여긴 선조들은 불영사를 중건하면서 화재를 막기 위한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그 결과 불의 기운을 다스리기 위해 용왕을 상징하는 거북이를 대웅보전 계단 좌우 밑에 놓아 화재를 막고자 했습니다. 이 외에도 대웅보전 앞에 있는 삼층석탑도 고려 초기의 탑으로 추정되는 유형문화재입니다. 삼층석탑 3층 귀퉁이가 떨어져 나갔으나 불영사에서 가장 오래된 유물로 대웅보전을 둘러싼 모든 것들이 소중한 문화적 가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불영사에서 가장 오래된 전각 응진전
불영사에는 여러 설화가 깃들어있어 이야기를 찾아 떠나는 재미가 솔솔 합니다. 그중 하나가 인현왕후의 자결을 막은 설화입니다. 조선 후기 숙종은 왕실 여인들을 내세워 탕평책을 실시하여 왕권을 강화시키고자 했습니다. 서인으로 대변되는 인현왕후와 남인 출신의 장희빈, 숙종이 어느 여인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서인과 남인은 정계에 진출할 기회를 얻거나 쫓겨나야 했습니다. 이를 환국이라 부르는데 숙종 시대 3번의 환국에서 많은 관료들이 피해를 입어야 했습니다. 예를 들면 장희빈이 숙종의 사랑을 받으면 남인 출신들이 주도권을 잡고 서인들을 내쫓았습니다. 특히 장희빈이 아들을 생산하자 남인들의 권력이 정점에 올라 인현왕후를 폐위시켜 궁궐에서 쫓아내게 됩니다.
궁에서 쫓겨나 힘든 시기를 버텨야 했던 인현왕후는 결국 자살을 결심하고 독물을 마실려는데 끊임없는 회한이 밀려와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다 지쳐 쓰러져 잠이 들게 됩니다. 잠이 든 인현왕후의 꿈속에 한 노승이 나타나 자신은 불영사의 승려로 3일만 더 참으면 좋은 일이 생길 것이니 귀한 목숨을 버리지 말라고 이야기합니다. 인현왕후가 그 말을 믿고 자살을 뒤로 미룬 지 3일 뒤 왕후로 복귀됩니다. 왕후로 되돌아온 후 인현왕후는 숙종에게 자신이 겪었던 기이한 일을 이야기합니다. 숙종은 인현왕후의 말이 사실인지 확인하고자 불영사에 사람을 보내 승려들의 화상을 올려 보내라고 합니다. 인현왕후가 여러 화상 중에 꿈에서 만난 승려를 찾아내어 보니 불영사에서 약 200년 전 머물던 양성 법사였다고 합니다. 숙종은 시대를 거슬러 인현왕후를 살려준 양성 법사의 은혜를 갚고자 불영사 주변 10리의 땅을 불영사에 시주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고 합니다.
깊은 계곡 깊은 곳에 아늑하게 자리 잡은 불영사
불영사는 의상대사가 창건한 사찰로 긴 역사를 가지고 있지만 수많은 화재로 오래된 전각이 많지 않습니다. 조선 후기 불영사를 중건하면서 큰 사찰로 발전하는 듯싶었지만 숭유억불 정책으로 계속 쇠락하며 과거의 영성을 잃어버렸습니다. 동시에 수많은 전설들을 뒷받침해줄 전각들이 사라지면서 불영사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져 갔습니다. 그렇게 쇠락하던 불영사가 90년대 초 일운 스님이 여러 전각을 다시 복원하고, 대중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여러 행사를 계획하고 실행하면서 이제는 울진의 대표적인 사찰이 되었습니다.
불영사를 둘러싼 자연경관도 좋았지만 잊혀가던 우리의 이야기들을 살려냈다는 점이 좋았습니다. 그 결과 선조들의 삶이 녹아있는 이야기를 통해 현재 우리의 삶을 되돌아볼 수 있습니다. 불영사 창건설화는 신라의 통일과정에서 오랜 전쟁이 끝나고 안녕과 평화가 바라는 선조들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불국토에서 평화로운 삶을 살고자 한 선조들에게서 통일을 염원하는 우리를 찾아볼 수 있었습니다. 백극재 설화에서는 가정의 소중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가정의 해체 속에 우리에게 필요한 부분이 무엇인지 생각해볼 수 있었습니다. 인현왕후의 설화에서는 자살이 많아지는 현실에서 생명의 소중함을 인식하고, 내 주변 사람들의 어려움을 살피고 함께 살아가라고 나에게 이야기해 주는 듯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