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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호 Nov 24. 2017

애틋한 사랑을 나눈 신채호와 박자혜

충청북도 청원군

          

신채호 선생의 묘소와 사당

대한민국에 살면서 단재 신채호 선생을 처음 들어보는 분들은 없을 것입니다. 신채호 선생은 언론인으로, 역사학자로, 교육자로, 독립운동가로서 일제에 맞서 싸우시다가 순국하신 분입니다. 살아생전에 나라를 되찾기 위해 많은 일을 하셨지만 우리에게는 식민 사학에 맞서 역사를 바로 세우고자 했던 분으로 많이 기억됩니다. 하지만, 신채호 선생이 하셨던 일을 구체적으로 기억하는 분들은 생각보다 많지 않습니다. 신채호 선생의 역사관이 심오하고 어려우며 독창적인 부분이 많아 이해하기 어려운 측면도 있습니다. 그래서 일제 식민사학에 동조하고 대한민국 역사교육을 좌지우지했던 사람들은 신채호 선생의 역사를 허황되고 허무맹랑한 이야기로 치부해 버렸습니다. 현재 신채호 선생의 사상을 중요하게 거론하고 배우기는 하지만, 선생이 주장했던 역사적 사실은 교과서에 반영되어 있지 않습니다.


현재 우리가 사실로 인지하고 가르치는 역사와 다른 주장을 하는 신채호 선생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풍토가 반영된 것일까요? 신채호 선생의 이름은 많이 알려졌지만 선생과 관련된 유적지는 많지 않습니다. 1978년에 이르러서야 신채호 선생의 묘소와 사당, 그리고 기념관이 충청북도 청원군에 건립되게 됩니다. 역사를 가르치는 사람으로서 대한민국을 누구보다 뜨겁게 사랑하고 지키려 했던 신채호 선생이 태어났고 묻혀있는 묘소를 방문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 되어야 했습니다.






단재 신채호 선생의 사당

신채호 선생의 유허지를 알리는 이정표를 보고 나서도 차로 한참을 달려서야 도착할 정도로 접근성이 좋지 않았습니다. 유허지에는 전날 내린 눈들로 여기저기 산짐승들의 발자국이 보였지만 사람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춥고 눈이 온 겨울이라 그런지, 아니면 접근성이 불편해서인지 정오가 훌쩍 넘은 시간까지 저 외에는 방문한 사람이 없었음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아무도 찾지 않는 신채호 선생의 묘소를 보면서 씁쓸함이 밀려오며 어쩔 수 없는 서운함으로 가슴 한편이 무거웠습니다.


신채호 선생은 '독사신론'에서 우리의 역사를 만들고 운영해 온 것은 일부 사람들이 아니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왕조 중심의 서술이 아닌 민족을 역사의 주체로 삼아 우리가 존재하고 발전했음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또한 조선 시대 600년간 중국의 아류임을 자랑스러워하며, 그 증거로 내세웠던 기자조선을 부정했습니다. 기자 조선이 아닌 부여에 정통성이 있다고 주장하면서 우리의 역사를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한 토대를 마련했습니다.


이는 100년 뒤를 내다보았다 해도 무방할 정도로 오늘날 중국의 동북공정에 맞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우리 민족의 부여, 고구려, 발해를 중국의 지방정권으로 만들려는 동북공정이 수십 년 동안 준비되고 실행되면서 우리 역사의 설자리가 좁아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고등학교 교과서에 부여와 발해의 비중이 크게 늘어나지 않았습니다. 아직 우리의 역사를 제대로 찾아오지 못하고 있음에 한탄이 저절로 나옵니다. 역사를 바로 잡아야 나라가 바로 선다는 말이 있듯이 신채호, 박은식 선생이 없었다면 우리의 역사는 주변국과 내부의 적들로 여기저기 왜곡되고 비틀려 사라져 버렸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신채호 선생이 영원히 잊힐 우리의 역사를 기록하고 후대에 알려주었음에 저절로 고개가 숙여지고 감사를 드리게 됩니다.





사당에서 바라본 입구의 모습

신채호 선생은 글과 말로서만 우리 민족의 독립을 이야기한 것이 아닙니다. 자신 스스로 옳다고 여기는 일을 행동으로 실천하셨기에 우리는 위인으로 바라볼 수 있는 것입니다. 26살에 성균관 박사가 되어 출세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지만, 을사늑약으로 국운이 기울어져 가는 현실 속에서 자신이 잘할 수 있는 일을 하게 됩니다. 황성신문과 대한매일신보 기자로서 국내외의 현실을 국민들이 알리고, 우리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많은 글을 실었습니다. 이후 언론탄압에 한계를 느낀 선생은 신민회의 일원으로 실질적인 자주국가를 만들기 위해 앞장서게 됩니다. 그러나 국권을 상실한 이후 신채호 선생은 국내에서 활동이 어려워지면서 중국으로 넘어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큰 기여를 합니다. 하지만,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기 활동이 외교노선 위주로 흘러가면서 선생과 여러 부문에서 의견 충돌이 일어나게 됩니다. 선생은 결국 기존의 임시정부를 없애고 새로운 임시정부를 세울 것을 주장하면서 무장 투쟁론에 힘을 싣고 활동하게 됩니다. 여러 활동 중 의열단에 조선혁명선언을 써 준 글은 이후 무장 독립운동가들의 사상적 배경이 됩니다.

*조선혁명선언
강도(强盜) 일본이 우리의 국호를 없이 하며, 우리의 정권을 빼앗으며, 우리의 생존적 필요조건을 다 박탈하여 온간 만행을 거침 없이 자행하는 강도정치가 조선민족 생존의 적임을 선언함과 동시에 혁명으로 우리의 생존의 적인 강도 일본을 살벌(殺伐)하는 것이 조선민족의 정당한 수단이다.  





신채호 선생 사적비

신채호 선생은 누구들처럼 말로만 이야기하는 분이 아니었습니다. 스스로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하던 중 1929년 일제에 잡혀 여순감옥에서 옥살이를 하다가 1936년 순국하십니다. 일제강점기 시대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했다고 해서 10년형이 선고되지는 않습니다. 신채호 선생이 나라를 잃어버리기 전부터 언론을 통해 애국심을 고취시키며 일제를 규탄해왔습니다. 국권을 상실한 이후에는 무장독립단체를 지지하며 무정부주의자로서 연해주, 북경, 상해를 다니며 독립운동을 이끌었기에 일제의 두려운 대상으로 오랜 기간 감금하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천 자루의 총보다 한 장의 글이 더 큰 힘을 발휘하는 현실 속에서 단재 신채호 선생은 두 가지 모두를 가진 분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신채호 묘소가 잘 관리되고 있어 안도감과 함께 위안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신채호 선생의 묘소는 1936년 일제의 눈을 피해 모셔온 선생의 유골과 부인이었던 박자혜 여사, 두 분을 함께 모신 합장묘의 형태를 가지고 있습니다. 선생의 묘소에서 가장 눈에 들어오는 것이 묘비로 한용운 선생이 벌석하고, 오세창 선생이 글을 새겨 넣었습니다. 신채호 선생이 독립운동가분들에게 어떠한 위치를 차지하는지 가늠해볼 수 있었습니다. 묘비의 옆과 뒤면에 신채호 선생의 업적과 일생이 가득 채워져 있어 천천히 읽어보면 좀 더 많은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신채호 선생과 부인 박자혜

신채호 선생의 묘소와 사당 아래로 책을 읽고 있는 선생과 묵묵하게 서있는 부인을 형상화한 동상이 있습니다. 신채호 선생만큼이나 나라를 사랑하신 분이며, 지고지순한 사랑을 하신 박자혜 여사는 아기나인으로 궁궐에서 생활하다가 나라를 빼앗기자 궁궐에서 쫓겨나게 됩니다. 쫓겨난 이후 궁궐에서 배운 약간의 의술로 생계를 유지하던 중 3.1 운동이 일어나자 누구보다 먼저 두 손을 걷어붙이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쳤습니다. 3.1 운동을 주도한 일로 일제의 군경을 피해 도망 다니던 박자혜 여사는 북경으로 망명하여 자신이 할 수 있는 독립운동을 찾습니다. 의학을 배워 나라와 민족을 위한 일을 하겠다고 마음먹은 박자혜 여사는 의예과에 진학하여 다니던 중 이회영 부인의 소개로 신채호 선생을 만나 큰 뜻에 감명받고 결혼을 하게 됩니다. 자신의 삶보다는 나라의 독립을 위해 애쓰던 신채호 선생과의 삶은 늘 궁핍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신채호 선생과의 2년여의 달콤했던 결혼생활은 경제적인 궁핍함 때문에 끝이 나게 됩니다. 신채호 선생이 독립운동에 매진할 수 있도록 돕고자 박자혜 여사는 홀로 아이들을 데리고 한국에 돌아와 산파원을 차리게 됩니다. 그러나 국내에 들어와서도 경제사정은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당시 산파원은 돈벌이가 되지 않던 직업으로 수입도 적고 일정치 않았습니다. 하지만 박자혜 여사는 꿋꿋하게 아이들을 키우면서 독립운동을 하는 신채호 선생을 뒷바라지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의열단원들이 국내에 들어오면 박자혜 여사는 그들에게 숙식을 제공하며 독립운동을 펼쳤습니다. 동양척식 주식회사에 폭탄을 던졌던 나석주 의사도 국내에 잠입했을 때 박자혜 여사의 집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의거 활동을 준비하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드러나지 않지만 묵묵하게 독립운동을 하던 박자혜 여사에게 어느 날 갑자기 비보가 들려옵니다. 1929년 신채호 선생이 일제에 검거되어 여순 감옥에 투옥되었다는 소식에 박자혜 여사는 한 걸음으로 달려가고 싶었지만 어려운 경제 형편으로 여순으로 갈 차비조차 없어 속으로 눈물을 감추어야 했습니다. 신채호 선생이 옥중에서 너무 추워 솜이 들어있는 옷을 보내달라고 했는데도, 그 부탁을 들어줄 수 없을 정도로 가난했다고 합니다. 남편을 무엇하나 도와줄 수 없어 늘 죄스런 생활을 하던 박자혜 여사에게 신채호 선생의 죽음은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는 순간이 됩니다. 신채호 선생의 순국을 전해 듣고 “이제는 모든 희망이 아주 끊어지고 말았습니다”라고 이야기하는 말에서 박자혜 여사의 비통함이 얼마나 컸는지를 느낄 수 있습니다. 실제로도 박자혜 여사는 삶의 끈을 내려놓아버렸습니다. 신채호 선생이 돌아가신 후 첫째 아들은 해외로 떠나고 42년에는 둘째 아들을 저 세상으로 먼저 떠나보내게 됩니다. 결국 주위에 아무도 없었던 박자혜 여사는 43년 가난한 셋방에서 병고로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나이차가 많고 짧은 결혼 생활이었지만 두 분의 사랑이 숭고하기만 합니다. 지금은 같은 곳에 나란히 누워계시니 더 이상 외롭지 않게 서로를 보담아 주시고 계실 것입니다. 그리고, 독립을 이룬 대한민국을 때로는 근심 걱정하면서도 흐뭇한 모습으로 바라보고 있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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