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수원시
정문 역할을 하는 장안문
수원 시민들에게 친숙하면서도 자부심을 갖게 하는 유적이 수원 화성입니다. 서울에서 수원까지 전철로 연결되어 있어서 마음만 먹으면 쉽게 갈 수 있지만, 가볍게 나들이 갈 만큼 가깝지도 않은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수원 화성을 가봐야지 하면서도 쉽게 발걸음을 내딛지 못했습니다. 마침 친구가 수원에서 근무를 하게 되면서 친구도 만날 겸 수원 화성을 감상하고자 방문하였습니다.
정문 역할을 하는 장안문
보통 성의 북문은 크게 활용하지 않는데 장안문은 북문이면서도 그 형태가 웅장하게 건축되어 실질적인 정문 역할을 합니다. 장안문이 정문 역할을 갖게 된 이유는 서울에서 내려오는 정조를 맞이하기 위해섭니다. 장안문은 기존에 잘 활용하지 않던 군사적인 기능도 설치해 유사시에 적의 침략을 효과적으로 막을 수 있도록 했습니다. 예를 들어 유성룡이 징비록에서 옹성의 필요성을 역설한 것을 바탕으로 옹성과 함께 불을 끌 수 있는 오성지, 그리고 측면에서 적을 공격할 수 있는 적대를 갖추고 있습니다.
옆에서 바라본 장안문
장안문 옹성을 보면 벽돌로 건축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화강암이 많아 성벽을 쌓을 때 벽돌보다는 돌을 쌓아 올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수원 화성은 부분별로 벽돌이 가진 장점을 이용해 둥근 모양의 옹성이나 서북공심돈처럼 높은 건축물을 쌓아 올렸습니다. 성을 쌓는 전통적인 방식에 주변국의 성 축조 기술을 수용하고 융합했다는 점에서 수원화성의 가치는 한층 더 높아집니다.
수원 화성 성곽길
정조가 조선의 재도약이라는 웅대한 꿈을 가지고 수원 화성을 축성했지만, 수원 화성의 역할과 위상은 오래가지 않아 추락하고 맙니다. 수원 화성 건축 후 정조는 얼마뒤 죽었고 조선의 국운은 기울어집니다. 정조가 죽고 조선은 110여 년 뒤 일제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맙니다. 일제는 한국을 지배하면서 민족 역량이 결집된 모든 건축물들을 철저하게 파괴해버립니다. 서울의 사대문처럼 수원 화성도 1920년에 팔다리가 잘려나가듯 성곽들이 헐려버립니다. 그리고 1950년 6.25 전쟁 당시 장안문 누각이 폭격으로 주저앉아버리고, 시가전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곳곳에 총탄의 흔적을 남기게됩니다. 오늘날에도 화성 성벽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어렵지 않게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도 역사의 일부분으로 받아들여 기억하고 보존해야 할 것입니다.
서북공심돈으로 가는 성곽길
수원 화성을 방문하면서 제일 좋았던 점은 성곽길을 따라 걸으며 수원시와 화성의 야경을 바라보는 것이었습니다. 산책을 나가듯 화성의 성곽길을 걸을 수 있는 120만 명의 수원시민들이 부러웠습니다. 수원화성이 건축되기 전에 이곳은 너른 벌판에 몇 채 안 되는 민가들이 모여 살던 작은 시골이었습니다. 정조가 왕권강화를 위해 계획도시인 화성을 조성하기 위해 인근의 민가들을 옮겨오면서 수원 화성은 거대한 도시로 성장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현재는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도시로서 이름을 알리고 있습니다.
밑에서 바라본 수원 화성
정조는 노론 벽파가 정국의 주도권을 잡고 운영하던 시대에 아버지인 사도세자를 잃어야 했습니다. 이에 정조는 왕이 되자 적극적인 탕평책을 통해 왕권을 강화시키고자 했습니다. 왕권을 강화시키기 위한 방법 중 하나가 화성을 축성하는 것이었습니다. 화성은 군사적 기능과 함께 상업적 기능을 갖추도록 구성했습니다. 군사적 기능을 통해 정조의 직속부대인 장용영으로 군사권을 옮기고, 상업적 기능을 통해 새로운 경제세력을 육성하여 노론 벽파의 자금줄을 막으려 했습니다. 군사력과 경제권을 왕에게 귀속시킴으로써 왕권을 다시 강화시키려 했으나 정조의 급작스런 죽음으로 실패하게 됩니다.
서북 공심돈
정조는 정치적인 의도로 수원 화성을 축성하면서 기존에는 없었던 기술을 동원하여 새로운 건축물을 만듭니다.뛰어난 기술력을 바탕으로 웅장한 화성을 지어 노론 벽파의 기를 누르고 왕의 위엄을 보여주고자 했습니다. 대표적인 예로 서북 공심돈을 들수 있습니다. 서북 공심돈은 기존에는 볼 수 없었던 건축물로 지금도 수원 화성에서만 볼 수 있습니다. 서북 공심돈은 아래 부분은 석축으로, 위로는 벽돌을 쌓아 올린 특이한 형태를 가지고 있습니다. 내부는 3층으로 만들어 동서남북 사방에 총구를 냈습니다. 그래서 서북 공심돈은 성루보다도 더 높은 위치에서 사방으로 몰려드는 적군을 효과적으로 막아낼 수 있는 우수한 군사시설이 됩니다.
서북 공심돈과 화서문
서북 공심돈 옆으로는 화서문이 위치하고 있습니다. 화서문은 화성의 서쪽 관문으로 수원시 마크의 모델이기도 합니다. 화서문은 한쪽으로 터진 옹성을 특징으로 하고 있는데 옹성 안 성벽에는 건축에 참여했던 사람과 책임자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수원 화성의 위대함 가운데 하나가 화성 축성의 전 과정과 동원된 사람들 이름과 임금 지불까지 '화성성역의궤'에 세세하게 기록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현재와 공존하는 수원 화성
수원 화성이 가지고 있는 의의는 이 외에도 수원 시민들과 동떨어지지 않고 사람들과 함께 숨을 쉬며 공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서울의 성과 성곽들은 낮에는 많은 사람들로 북적이지만 저녁이 되면 오로지 그 자리에서 동이 틀 때까지 외로움을 홀로 견뎌내야 합니다. 그러나 수원 화성은 낮에는 아이들이 뛰어다니며 왁자지껄 떠드는 모습을 바라보며, 밤이 되면 밥상에 둘러앉아 티브이를 틀어놓고 두런두런 나누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성곽 주변에 사는 시민들에게 수원 화성은 과거의 유적이 아니라 내가 사는 마을의 일부로 정감 어린 고향이 됩니다. 수원 성곽길을 걸으면서 가장 부러운 부분이 수원 시민들에게 화성이 삶 속에 녹아들어 떼어낼 수 없는 하나라는 점입니다.
과거 가장 아름답다고 극찬받던 화홍문
서장대로 가려던 발걸음을 되돌려 찾아간 곳이 화홍문과 방화수류정이었습니다. 화홍문은 정조가 수원 팔경으로 꼽을 정도로 매우 아름다운 장소로 수간에서 흘러나오는 물줄기가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모습이 장관이라고 합니다. 저녁에 방문해서 확인해 볼 순 없었지만 화홍문에서 흘러나오는 물길을 따라 버드나무가 줄을 맞추어 늘어서 있는 모습은 볼 수 있었습니다. 화홍문에서 버드나무로 조성된 물길을 바라보며 정조가 이곳에서 앉아있는 모습을 상상해봅니다.
특별한 형태의 방화수류정
방화수류정은 동북각루로서 군사 지휘소와 함께 주변 경관을 감상할 수 있는 정자의 역할을 가지고 있습니다. 방화수류정에 올라서면 좌측으로는 화홍문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버드나무 아래로 힘차게 달려가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우측으로는 용연지라고 불리는 연못을 바라볼 수 있어 수원화성 야경중에서 으뜸으로 꼽습니다. 방화수류정은 건축모양이 매우 독특해서 십육각형의 마루 어느 위치에 있느냐에 따라 각기 다른 풍경을 감상할 수 있습니다.
용연지에서 바라본 수원 화성 성곽
방화수류정은 중국 송나라의 정명도가 지은 시에서 '꽃을 찾아 버드나무 길을 따라 지난다'는 구절에서 이름을 따왔다고 합니다. 방화수류정에 올라 아래를 내려다보니 시 구절에 딱 들어맞는 이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듭니다. 오늘날 조명시설로 아름답게 비추는 방화수류정을 정조가 보았다면 이름을 어찌 명명했을까 하는 궁금증이 생깁니다.
용연지에 비친 방화수류정과 화홍문
수원 화성은 어느 곳을 방문해도 빠지는 부분이 하나 없는 훌륭한 문화유산입니다. 수원 화성은 '화성성역의궤'이라는 기록물이 있어서 완벽하게 복원할 수 있었던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문화유산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수원화성을 둘러보면서 아쉽고 우려되는 부분들도 많았습니다. 수 킬로미터에 달하는 수원 화성은 수원 시민과 관람객들이 함께 생활하는 공간입니다. 하지만, 삶의 흔적이라고 하기에는 어려운 담배꽁초와 술병이 화성 곳곳에서 보였습니다. 수원 화성이 화재나 파손 위험성에 많이 노출되어 걱정이 되었습니다. 문화유산이 일상 생활과 함께 하는 것은 우리가 지향하는 일이지만, 그간 여러 번의 사고 등으로 불안한 것도 사실입니다. 이를 해결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문화재로부터 사람을 떨어뜨리기보다는 성숙한 시민의식을 갖추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