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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호 Dec 25. 2017

백성들의 마음을 담은 마이산 돌탑

전라북도 진안

마이산 돌탑 입구

진안의 랜드마크로 많은 사람들이 찾는 마이산이 유명합니다. 마이산에는 이갑용 처사가 쌓아 올렸다는 돌탑과 겨울이 되면 볼 수 있는 역고드름이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그 외에도 마이산에 얽힌 수많은 전설과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와의 인연도 함께 내려오고 있습니다.


마이산은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없는 역암으로 이루어진 특이한 모양의 산입니다. 그러다 보니 과거의 사람들에게는 산 자체가 신으로 비추어지기도 했습니다. 마이산이 생겨난 전설을 따라가 보면 과거 이곳에 부부의 연을 맺은 두 신이 있었다고 합니다. 두 신은 밤낮을 쉬지 않고 열심히 수행을 하며 하늘로 승천할 도량을 채워갔습니다. 부부로서의 금실도 좋았는지 자식도 낳으며 하나 부족함 없이 생활을 하던 중 하늘 올라오라는 소식을 접하게 됩니다.


남신은 서둘러 사람들이 모두 잠드는 밤에 떠나자고 했으나, 여신은 한밤중에 올라가는 가는 것이 무서우니 새벽에 떠나자며 하늘로 승천할 시기를 두고 다투게 되었습니다. 보통 가정 내에서 중요한 결정을 할 경우 아내의 의견을 쫓아가는 경우가 많은 것처럼 결국 남신은 아내의 말을 따르기로 합니다. 새벽에 두 신은 아이를 데리고 승천을 하는 도중, 새벽에 물을 길러 나온 여인네에게 들키고 맙니다. 물을 길러 나온 여인네의 놀라는 소리에 두 신은 승천할 기회를 놓쳐버리며 산으로 변해버렸습니다. 산으로 변화는 과정에서 남신은 하늘로 올라가지 못한 분노를 참지 못하고 여신으로부터 아이를 빼앗아 자신의 옆에 두었습니다. 결국 두 신은 분노와 서러움에 등을 돌려 마주 앉아 오늘날 숫마이봉과 암마이봉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현재까지도 숫마이봉 앞으로는 두 개의 애기봉이 자리하고 있어 엄마를 만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다양한 자세를 취하고 있는 동자승

아마도 이런 전설이 생겨난 것은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와 연관이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고려 말 장수로서 왜구와 싸우며 승리를 이끌었던 이성계는 고려 백성들에게 영웅으로서 어려운 현실을 타개시켜줄 인물이었습니다. 이에 많은 사람들이 이성계에게 기대를 걸고 몰려들면서 새로운 세상을 만들자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결국 그중 하나였던 정도전과 함께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보고자 정변을 일으켜 조선을 세웠습니다. 정변으로 나라를 세운만큼 조선 건국의 정당성을 이야기할 필요성이 제기되면서 많은 전설이 만들어졌습니다. 마이산에도 조선 건국의 정당성과 함께 조선의 수도가 되지 못했음을 아쉬어하는 전설내려오고 있습니다.


1380년 아지발도가 이끄는 왜구를 내쫓아버리고 개경으로 되돌아가던 중 이성계는 꿈속에서 신인을 만나게 됩니다. 꿈속의 신인은 금척(황금으로 된 자)을 내보이며 '이 금척으로 삼한의 강토를 헤아려 보라'라고 합니다. 꿈에서 깨어난 이성계는 꿈을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고 혼자서 골몰하게 됩니다. 과거 신라를 세운 박혁거세가 꿈속에서 신인에게 왕위의 신표로서 금척을 받았다고 합니다. 이후 신라 왕들은 금척을 백성들의 질병을 치유하는 데 사용하며 후대로 물려주다가 잃어버린 후 멸망했다는 전설이 내려져 오는 만큼 금척은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즉, 금척이 나라를 의미하기에 이성계는 꿈 이야기를 특히 조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이후 왜구를 물리치고 개선하는 길에 꿈에서 보았던 금척의 형태를 가진 마이산을 보게 됩니다. 이성계는 꿈속에서 본 금척과 닮은 마이산을 보며 깊은 갈등에 빠지게 됩니다. 갈등을 해소하고자 마이산에 들어가 30일간을 기도하고 고민한 끝에 새로운 나라를 만들 것을 결의했다고 합니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조선의 시작은 마이산에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마이산이 하늘로 올라가지 못하고 웅크리고 있는 산이 되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이후 태종이 마이산 앞을 지나다 말의 귀를 닮았다고 '마이산'으로 명명하고 오늘날 이르고 있으니 조선과 마이산은 깊은 연을 맺고 있다 할 수 있겠습니다.





이갑용 처사가 쌓아 올렸다는 돌탑

하지만, 많은 분들이 마이산으로 오는 이유는 신기하고 오묘한 돌탑을 보기 위해서입니다. 저도 수많은 돌탑과 함께 다양한 석상들을 마주 보는 순간 정말 잘 왔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만약 이곳을 방문하지 않았다면 이런 장관을 보지 못했을 거라 생각하니 아찔했습니다. 티브이에서 본 마이산과 실제로 보는 마이산은 크나큰 차이를 보였습니다. 얼기설기 돌을 쌓아 올린 것 같은데 100여 년을 넘어지지 않고 지금까지 버텨온 돌탑이 신기하기만 합니다. 예전 마이산을 설명하는 방송에서 여름에 비가 많이 오면 마이봉에서 흘러내리는 거대한 폭포수가 돌탑을 향해 떨어진다고 들었습니다. 마이봉에서 떨어지는 폭포수를 보는 것도 장관이지만 폭포수에도 꿈쩍하지 않는 돌탑의 모습은 가히 할 말을 잊게 한다는 말이 떠올랐습니다. 시간이 된다면 비가 많이 오는 날 이곳을 다시 방문해보고 싶은 욕심을 가져봅니다.


마이산은 세계적으로도 보기 힘든 특이한 자연 지형입니다. 마이산은 형성과정을 살펴보면 1억 년 이전부터 시작됩니다. 수 킬로미터에 걸쳐 2000m의 두께로 돌과 모래가 쌓여있던 지형이 오랫동안 압력을 받아 단단해져 버렸습니다. 거대한 바위 덩어리가 된 지형이 어느 날 솟구쳐 오르게 되면서 나무 살기 어려운 바위산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오랜 세월 동안 비바람에 의해 풍화작용으로 돌들이 떨어져 나가며 구멍이 뚫리기 시작했습니다. 마치 술빵에 있는 콩만 골라 먹은 것처럼 변해버린 것입니다. 이처럼 마이산 군데군데 구멍이 뚫린 부분을 타포니라고 합니다. 오랜 시간 타포니에서 떨어져 나온 역암들로 이갑용 처사는 돌탑을 쌓아 올렸습니다.





돌탑을 보기 위해 많은 사람이 방문하는 마이산

돌탑만큼이나 유명한 것이 마이산의 역고드름입니다. 겨울에 방문하지 못해서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티브이에서 겨울만되면 마이산의 역고드름을 보여줍니다. 과거에는 역고드름의 원리를 해명하지 못해 신비롭고 영험스러운 현상으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과학자들이 자연의 신비를 가만두지 않고 분석하고 연구했습니다. 그 결과 역고드름이 만들어지는 원리를 밝혀내 마이산이 아닌 지역에서도 역고드름을 만들 수 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스테인리스 그릇은 열전도율이 높기 때문에 기온이 낮아지는 경우 바닥에서부터 얼기 시작할 수 있습니다. 바닥에서부터 물이 얼기 시작하면 물표면에 얼지 않은 숨구멍이 나타나게 됩다. 물은 얼면서 팽창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기에 물표면의 숨구멍으로 자연스럽게 물이 빠져나와 얼어붙으면서 역고드름이 만들어지게 됩니다. 물론 바닥에서부터 물이 얼기 위해서는 영하 3~5도로 냉기가 오랫동안 지속되어야 하는 등 여러 까다로운 조건을 충족해야 하지만 불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전설과 역사를 좋아하는 저로서는 자연의 신비한 현상이 과학적으로 밝혀지는 것이 아쉽기만 합니다. 호기심을 충족하는 과정에서 인간이 발전했지만, 때로는 전설이 그대로 보존되어 재미있는 이야깃거리로 남았으면 하는 바람도 있습니다.





섬진강 발원지 마이산

마이산은 해발고도 680m의 높지 않은 산이지만 섬진강과 금강의 발원지이기도 합니다. 섬진강은 전라도를 지나 남해로 흘러가는 강이며, 금강은 충청남도와 전라북도를 지나 서해로 흘러갑니다. 두 발원지 중 섬진강 발원지인 용궁은 돌탑이 있는 곳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용궁 앞에는 물을 마실 수 있도록 바가지 준비되어 있어 한 모금 마셔보았습니다. 용궁의 맛이 특별하게 맛있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한반도에서 가장 넓은 곡창지대인 호남평야를 넉넉히 적시면서 기나긴 세월 동안 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책임졌던 섬진강 원류를 마신다는 것이 남다르게 느껴졌습니다. 아마도 돌탑과 용궁의 기운을 한 번에 받았기에 모든 일이 술술 풀리리란 믿음을 가져봅니다.





이갑용 처사의 후손이 사찰로 등록한 대웅전

마이산 돌탑은 현재 80여 개가 남아있는데 누가 만들었는지에 대한 논쟁이 있습니다.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이갑용 처사가 쌓아 올렸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조선시대 초기 풍수지리에 따라 나라를 보호하기 위해 돌탑이 세워졌다는 설도 있습니다. 아마도 조선 시대부터 있던 돌탑들을 이갑룡 처사가 증축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누가 세웠든 엄청난 정성과 노력으로 만들어진 돌탑들이 무너지지 않고 존재하다는 것은 놀랍고 기이한 일입니다. 돌탑은 자연현상으로는 무너뜨리거나 위협할 순 없지만, 인간들의 방문으로 무너질 수 있습니다. 관광객들의 일부는 돌탑에 기대지 말라는 권고문을 보지 못했는지 아니면 무시하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돌탑에 몸거나 손으로 짚고 포즈를 취하고 있었습니다. 대웅전에 있는 스님은 수도 정진과 기도보다는 돌탑이 훼손될까 봐 끊임없이 돌탑 주변을 살피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관람객들이 돌탑에 기대거나 손을 짚는 순간 큰 소리로 경고를 하고 계셨습니다. 저도 스님의 눈길을 따라가 보니 돌탑이 훼손될까 가슴을 졸여야 할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돌탑을 함부로 만지는 광경을 목도해야 했습니다.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사진을 찍는 것도 좋지만 되도록이면 지킬 것은 지키는 시민으로 성장하기를 바라봅니다.





돌탑의 최고봉 천지탑

대웅전을 지나 돌탑 정상으로 올라갈수록 입이 점점 크게 벌어져 다물기가 어려워집니다. 돌탑의 최고봉인 천지탑은 부부탑으로 팔진법의 배열에 의해 쌓였다고 합니다. 천지탑이 있는 장소는 가장 좋은 기운이 모이는 곳으로 기도를 하면 소원을 이룰 수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많은 어르신들이 이곳에서 기도를 올리고 계셨습니다. 기도를 올리는 어르신들무슨 소원을 빌고 있는지 모르지만 절실한 표정에서 간절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천지탑까지 올라가는 데 있어 경사가 급하기도 하지만 탑의 높이를 볼 때 어떻게 쌓아 올렸는지 기이하기만 했습니다. 그래서 이갑용 처사가 공중 부양해서 천지탑을 쌓아 올렸다는 이야기도 내려오면서 더욱 신성한 장소가 되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훗날 이갑용의 후손이 공중부양으로 쌓지 않았다고 했지만 여전히 돌탑을 둘러싼 기이함을 세간에서는 더 좋아합니다. 저도 이갑용 처사가 전국을 축지법으로 돌아다니며 돌을 가져와 쌓아 올렸다는 이야기가 더 재미있고 흥미롭습니다.





98세에 세상을 떠났다는 이갑용 처사

이갑용 처사는 1860년에 전라북도 임실에서 태어난 평범한 사람이었습니다. 세종대왕의 형이었던 효령대군의 16 세손이라고는 하지만 글자를 읽고 쓸 줄도 모르는 몰락한 양반에 불과했습니다. 25살이 되던 해 명성황후가 시해되는 을미사변을 듣고 분개한 마음에 마이산으로 들어와 솔입을 먹으며 세상과의 연을 끊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오랜 시간 기도와 수련을 하던 중 꿈속에서 신인을 만나 계시를 받고 돌탑을 쌓기 시작했습니다.


전국 명산에 있는 돌을 가져다가 음양오행과 천지의 뜻에 맞게 위치를 잡은 다음 30년 가까운 세월 동안 120여 개의 탑을 쌓았다고 합니다. 어떠한 바람에도 쓰러지지 않는 돌탑에 대한 이야기가 주변으로 널리 퍼지면서 기도를 드리고자 하는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습니다. 기도를 하는 사람들이 조금씩 성의를 표시하는 돈을 내놓으면 이갑용 처사는 사양하지 않고 받았습니다. 그 돈이 모와 지면 황소를 사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훗날 그 황소를 가져간 사람들은 개인의 목적으로 사용한 것이 아니라 독립운동 자금으로 사용했다고 합니다. 일제의 감시를 피해 현금 대신 농사에 필요한 소로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했던 독립운동가이기도 했던 이갑용 처사는 1957년 9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가 만들었던 돌탑은 현재 80여 개가 남아있으며 신인의 계시를 듣고 썼다는 책도 남아있습니다. 그러나, 이갑용 처사가 남긴 가장 큰 것은 나라와 백성을 사랑했던 마음과 실천이 아닌가 싶습니다. 탑을 이갑용 처사가 실제로 쌓아 올렸는지에 대한 사실 유무보다는 그 속에 담긴 의미가 중요하다고 생각됩니다. 나라가 망해가는 시점에서 배우지 못하고 힘이 없는 백성들이 할 수 있는 것은 하늘을 향해 도와달라는 기원 외에는 별다른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백성들의 기원들이 하나둘  염원이 되었고, 작은 변화의 실천을 이끌어냈습니다. 가족의 안녕을 바라는 마음은 독립운동을 하는 아들과 남편에 대한 마음이었고, 탑에 기도를 드리며 내놓은 성금은 독립에 대한 국민의 행동이었을 것입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늘 가까이 있으며 없어서는 안 되는 황소처럼 느리지만 쉬지 않고 묵직하게 앞으로 나아간 선조들의 모습을 이갑용 처사와 돌탑에 투영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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