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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호 Dec 20. 2017

우정총국에서 권력의 정당성을 찾다.

서울특별시 종로구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우체국 건물

우정총국이 있는 자리는 왕이 살던 궁궐과 가까워 조선시대 수많은 인물과 사건들이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조계사에 가려져 많은 분들이 우정총국을 모르고 스쳐 지나가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정총국 건물이 있다는 것을 아는 분들 중에서도 우정총국 내부로 들어가는 분들을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다 보니 우정총국이 세워지기 이전에 이곳에 있던 건축물을 알리는 표지석을 눈여겨보는 사람을 찾기란 쉽지가 않습니다.


우정총국 앞으로 전의감터를 알리는 표지석이 인도 한편에 세워져 있습니다. 전의감은 궁중에 쓰이는 의약을 제조하고 왕실 및 관리들의 병을 관리하는 관청입니다. 고려시대 태의감이 조선시대 전의감으로 이어졌으니 아주 오랜 기간 동안 나라의 건강을 관리하던 관청입니다. 그러나 구한말 서양의학이 들어오면서 점차 역할이 축소되다가 1894년 내의원에 통합되면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집니다.


전의감터 주변으로 도화서터를 알리는 표지석도 있습니다. 고려시대부터 그림에 관련된 일을 하던 도화원이 성종 때 도화서로 이름을 변경하고 구한말까지 존재했습니다. 기록을 중시했던 조선은 글만이 아니라 의궤처럼 그림을 통해서도 많은 것을 후대에 남기려 했습니다. 특히 조선 후기 성리학이 뿌리를 내리면서 의례의 형식과 절차가 중요해졌고, 그림으로 기록을 하는 화원의 규모는 커져만 갔습니다. 그러나, 조선 500년 동안 그려진 많은 어진과 의궤 등전란과 화재 등으로 많이 사라지거나 빼앗겨버려 오늘날 남아있는 것이 많지 않아 가슴을 아프게 합니다.





우정총국 중수 기념비

현재는 전의감이나 도화서는 흔적 없이 사라지고 우정총국만이 남아 우리를 만나고 있습니다. 우정총국 중수 기념비에 따르면 갑신정변 이후 우정총국이 폐지되고 건물은 일제강점기 시절에 교육기관으로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광복 이후 1956년 체신부에서 관리를 하다가 1972년 건물을 중수하고 보존함으로써 오늘날 우리가 만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정총국은 다른 전각들과는 달리 체신부 기념관으로 사람들에게 개방되어 있는 모습은 환영합니다. 대부분의 전각들이 실제 사용되지 못하고 외형만 보여주는 형태에 그치는 것에 비해 다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체신부 기념관에 들어섰을 때 기분이 썩 좋지만은 않았습니다. 기념관이 작은 규모라서 실망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기념관의 내용들이 빈약하기 때문에 실망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규모나 내용 때문이 아니라 관리하는 사람에게 실망스러웠습니다. 기념관에 들어서는 순간 연세가 어느 정도 되어 보이는 관리하는 아저씨가 전화통화를 하고 계셨습니다. 기념관에 어떠한 분이 관리직으로 파견되는지는 모르지만, 관람하는 내내 아저씨가 친구와 약속시간과 장소를 잡으며 나누는 시답잖은 일상생활의 내용을 들어야 했습니다. 20분 넘게 기념관을 둘러보는 저를 개이치 않는 듯 큰 목소리로 통화를 이어갔습니다. 기념관의 기록을 읽으면서도 머릿속에는 관리하는 아저씨의 대화 내용만 들어왔습니다. 더운 여름날 불쾌감이 높아지기도 했지만 기념관의 관리형태가 우려되기도 했습니다. 체신부 기념관 관리의 전반적인 문제이기보다는 개인의 문제였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봅니다.





기념관 내부의 모습

우리나라에서 우편제도는 구한 말 일본과 미국에 파견되었던 조사 시찰단과 보빙사들이 우편업무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우정총국을 신설할 것을 건의한데서 시작합니다. 1882년 고종의 명으로 우정총국을 만들 준비가 이루어져 우정국의 규칙을 제정하고 우리나라 최초의 우표인 문위우표 5종이 만듭니다. 그러나, 1884년 우정국 축하연을 이용하여 갑신정변을 일으킨 급진 개화파들에 의해 우정국은 한 달도 가지 못하고 문을 닫게 됩니다. 하지만, 우편업무는 세계적인 추세로 포기할 수 없었던 근대화 작업이었습니다. 조선은 1896년 독일의 인쇄기계를 도입하여 이화 우표를 발행하면서 우편업무를 이어가면서 오늘날에 이르고 있습니다.


기념관의 실내는 작지만 우편업무의 초창기의 역사와 모습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습니다. 기념관에는 우체국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도록 여러 자료들도 구비되어 있습니다. 이 외에도 만국우편연합에 참석하기 위해 민상호에게 발급되었던 최초의 여권과 초창기 우체국의 모습, 그리고 우체부의 의복 등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우정총국의 시작과 함께 할 수밖에 없는 홍영식과 관련된 자료들과 흉상도 만날 수 있습니다.





홍영식 흉상

홍영식은 우정총국과 갑신정변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입니다. 홍영식은 1855년에 영의정이었던 홍순목의 아들로 태어나 무엇 하나 부족함이 없이 자랐습니다. 풍족한 경제력으로 어렸을 적부터 박규수와 유홍기 등 당대 학자들로부터 신사상을 익히며 18살에 급제를 하게 됩니다. 좋은 집안에서 태어났을 뿐 아니라 영석한 머리를 가졌던 홍영식은 1881년 26살에 조사시찰단의 일원으로 일본에 가게 됩니다. 이후 1883년이 되던 해에는 미국 보빙사 일행에 발탁되어 새로운 세상을 마주하며 근대 문물 수용에 앞장서게 됩니다.

하지만, 임오군란 이후 청의 내정간섭이 심해지는 상황 속에서 개혁은 더디게만 진행됩니다. 결국, 1884년 김옥균·박영효와 함께 정변을 일으켜 조선을 새롭게 바꾸려 했으나 실패하게 됩니다. 정변을 일으켰던 동지들 대부분은 일본이나 미국으로 망명해버렸던 것과는 달리 홍영식은 끝까지 고종 곁에서 호위를 하다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때 나이가 29살로 안타까운 죽음이라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개인적으로 갑신정변을 좋게 평가하지 않습니다. 중고등학교 시절 선생님들은 갑신정변을 설명할 때 자주적인 모습을 강조하면서 안타깝다는 말을 많이 하셨습니다. 그러나, 시대가 변하면서 갑신정변에 대한 평가도 달라지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도 갑신정변을 일으키고 자주국을 만들고자 했던 그들의 뜻은 이해하나 방법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갑신정변에 대해 간단히 설명을 하면 임오군란 때 백성들의 분노에 쫓겨났던 명성황후와 민씨 정권은 청나라의 도움으로 정권을 되찾게 됩니다. 그 이후 민씨 정권은 청에 눈치를 보며 개혁에 소극적일 뿐 아니라 청의 내정간섭으로 자주권이 훼손되어버립니다. 결국 김옥균을 중심으로 하는 급진파는 일본을 끌어 들어 정변을 일으켜 자주적인 나라를 만들려고 했으나 청군대의 개입과 일본의 모름 쇠로 삼일 만에 실패합니다. 우리는 이 사건을 갑신정변 또는 삼일천하라고 합니다.





한성순보

갑신정변의 주역이었던 홍영식의 나이가 29살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정변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세상을  변화시킬 수 없는 현실에서 패기가 넘치는 젊은 나이의 급진파들은 답답하기 그지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의 정변은 젊은 나이의 치기라고 밖에는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국제정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일본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맹신했습니다. 자국의 이익 앞에서 영원한 우방은 없다는 사실을 파악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또한 역사를 제대로 알지 못했습니다. 자신의 문제를 타인을 끌어들여 해결하려 한 수많은 국가는 결국 믿었던 국가에게 멸망해버렸습니다. 수많은 역사적 사실이 이를 알려주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나는 예외일 것이다라는 맹신을 가지고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이는 갑신정변의 주역들이 엘리트 코스로 살아온 사람들로 실패와 어려움을 많이 겪지 않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홍영식만 봐도 29살에 오늘날 국방부 차관직에 해당하는 병조참판까지 올라갔으니 백성들의 고충과 생각을 알지 못하는 괴리가 분명 존재했을 것입니다.


1876년 강화도조약 이후 일본으로부터 값산 면직물이 들어오면서 대부분의 농가들은 경제적 타격을 크게 입게 됩니다. 여자들이 만든 베가 팔리지 않게 되면서 생활이 더 곤궁하게 된 백성들은 일본을 굉장히 미워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일본을 끌어 들어 정변을 일으켰으니, 백성들의 외면을 당할 수 밖에는 없었습니다.


그리고, 폭력을 통해 세상을 바꾸려 했던 과정은 어떠한 방법으로도 용납될 수 없습니다. 다른 나라의 지배를 받는 상황이라면 예외이겠지만, 국내의 문제는 대화와 협치로 해결해야만 합니다. 사람답게 살고자 하는 목적을 가지고 이루어진 나라가 다른 사람을 희생시키는 폭력을 통해 자신의 의사를 관철시킨다면 분쟁의 앙금만이 남을 뿐입니다. 가정에서 아이들에게 매를 드는 경우 잠시 동안은 부모의 뜻대로 아이들이 따라올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 관계는 오래가지 못합니다. 서로 대화를 통해 의견을 모으고 실천하는 가정이 바람직한 모습이라는 것과 같은 맥락에서 설명수 있습니다.





우정총국과 회화나무

결론적으로 갑신정변의 주역들은 왕과 소통하지 못했습니다. 자신들과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과 소통하지 못했습니다. 국민들과 소통하지 못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주변국과도 제대로 소통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우물 안 개구리가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갑신정변은 과정이 잘못되었습니다. 갑신정변을 통해 만들고자 하는 세상이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절차가 잘못되었습니다. 정변 즉 쿠데타를 일으켰을 때, 처음의 뜻과는 다르게 시간이 지나면서 변질되는 경우를 우리는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합의로 만들어진 법과 질서를 무시하고 이루어지는 모든 일은 정당성을 가질 수 없습니다.


갑신정변이 일어난 지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아쉬움이 큽니다. 젊고 능력 있던 많은 인재들의 경솔함으로 나라를 위험에 빠뜨렸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희생됨으로써 나라를 지켜낼 수 있는 인적자원을 많이 잃어버렸습니다. 조금만 더 시간을 가지고 세상을 바꾸려 했다면 우리는 아픈 역사를 겪지 않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홍영식에 대해서 잘 알지는 못하지만 갑신정변에서 생을 마감한 것은 매우 안타깝습니다. 정변을 같이 일으켰던 많은 사람들이 개인의 일신과 훗날을 도모하고자 다른 나라로 망명한 것과는 달리, 홍영식은 고종을 끝까지 호위하다가 죽었습니다. 자신의 행동에 끝까지 책임을 지려고 했던 모습에서 특별함이 보였습니다.


우정총국을 방문하면서 일을 도모함에 있어 정당성을 생각해봅니다. 누구나 자신의 생각만이 옳기 때문에 과정을 문제 삼지 않고, 결과만 좋으면 된다는 풍토가 형성된다면 그 사회는 오래가지 못할 것입니다. 폭력을 통해서 쉽게 세상을 가질 수는 있겠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오히려 세상을 퇴보시키는 행동이라고 생각합니다. 우정총국을 통해 과거의 역사에 아쉬움을 느끼며, 오늘생각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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