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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호 Dec 30. 2017

김구 선생을 만나러 간 마곡사

충청남도 공주시

마곡사를 알리는 입구

백범일지를 읽으면서 늘 가고 싶었던 장소가 마곡사였습니다. 백범 김구 선생님은 탈옥 후 사람들의 눈을 피할 수 있는 수많은 장소를 놔두고 왜 마곡사로 도망을 왔는지 너무나 궁금했습니다. 마곡사는 어떠한 역사를 가진 곳이기에 이곳까지 도망 와서 출가를 했는지 알기 위해 마곡사를 향해 출발했습니다. 물론 100여 년 전의 마곡사와 비교할 수 없겠지만 제가 가장 존경하는 김구 선생님의 발자취를 찾아 충남 공주의 마곡사를 방문했습니다. 그리고 마곡사에서 백범 김구 선생님만이 아니라 수많은 역사적 인물과 전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마곡사는 신라의 고승이었던 자장율사가 640년에 창건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640년은 신라와 백제는 치열하게 전쟁을 하던 시기였습니다. 또한 마곡사가 위치한 공주는 백제의 수도였던 사비와 지척의 거리로 수도와 다를 바 없는 제2의 도시였습니다. 그렇기에 자장율사가 창건했다는 설 외에도 신라의 승려였던 무염이 창건하면서 스승이었던 마곡보철에서 이름을 빌려왔다는 설과 이곳이 마씨 성을 가진 사람들이 살던 지역에서 유래되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져 내려옵니다.




해탈을 하겠다는 의지를 담은 해탈문

보통의 사찰로 들어서는 첫 번째 문은 일주문이라고 하며 온갖 번뇌를 버리고 들어오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일주문을 지나 천왕문 그리고 불이문을 지나면 법당을 마주하게 되는 일반적인 사찰의 구조와는 다르게 마곡사에는 일주문과 천왕문 사이에 해탈문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마곡사 해탈문에서는 금강역사들과 함께 지혜를 상징하는 문수동자와 행(行)을 상징하는 보현 동자를 만날 수 있습니다.


오랜 세월을 머금은 해탈문을 보며 마곡사가 번창했다고 생각하기 쉬우나 실제로는 많은 우여곡절을 겪어야 했던 사찰이었습니다. 통일신라 말 전국에 도적들이 들끓고 사회가 혼란해졌을 때 마곡사도 전란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부처님을 모시던 법당은 사라지고 도적들이 머무르는 소굴로 변해버려 사람들이 더 이상 찾지 않는 곳이 되어버렸습니다.


훗날 보조국사 지눌이 왕명에 따라 이곳에 사찰을 다시 지을 때까지 마곡사는 부처님과는 거리가 먼 곳이었습니다. 오랜 세월 도적들의 보금자리였던 곳을 지눌 대사가 빼앗아 사찰을 세우려 하자 도적들은 난동을 자주 부렸습니다. 도적들의 방해로 사찰을 세우는 일이 어려워지자 지눌 대사는 법력으로 호랑이를 만들어 도적들을 내쫓아버렸습니다. 그 이후 지눌 대사의 법력에 놀란 도적들은 다시는 다른 사람을 괴롭히는 나쁜 짓을 하지 않겠다는 것을 맹세하며 불교에 귀의했다고 하니 마곡사에는 재미있는 설화가 많이 얽혀 있습니다.





두 번째 관문 천왕문

일주문에서 해탈문까지는 한참을 걸어야 도달할 수 있지만 해탈문과 천왕문은 거리가 매우 가깝습니다. 마곡사는 각 전각에 대한 안내판이 잘 갖추어져 있어 처음 방문하는 사람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안내문에는 천왕문이 조선 후기 건립되었으며 사천왕이 안치되어 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불교 용어를 잘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안내문에 사천왕이 부처님이 계신다는 수미산 중턱 사방을 지키면서 인간들을 올바르게 인도하는 신들이라고 덧붙여 자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런 안내판을 통해 마곡사에 많은 사람들이 방문하는 이유를 엿볼 수 있었습니다.


해탈문과 천왕문 모두 조선 후기의 건축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어 충청남도 문화재로 등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정확한 제작 연도는 나와있지 않습니다. 천왕문의 경우 1910년대 중수되었다는 것을 보았을 때 끊임없이 보수가 이루어져 왔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해탈문의 경우 팔작지붕으로 화려함을 느낄 수 있다면 천왕문은 맞배지붕으로 경건함을 표현하고 있어 법당에 들어설수록 몸가짐을 가지런히 하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지장보살과 시왕을 모신 명부전

마곡사에 있는 명부전은 지장보살과 시왕을 모시는 전각으로 1939년에 세워졌습니다. 사찰마다 죽음과 관련된 전각의 명칭과 모시는 부처와 신들이 조금씩 다릅니다. 사찰에 따라 지옥에 있는 중생을 구원하는 지장보살을 모시는 지장전이나, 128개의 지옥을 관리하며 중생의 잘못을 가리고 처벌하는 10명의 시왕을 모시는 시왕전이 있는 곳이 있습니다. 또는 고려말부터 지장전과 시왕전이 합쳐진 명부전이 있는 사찰도 있습니다.


최근 주호민의 '신과 함께'라는 웹툰 만화와 영화가 인기를 끌면서 염라대왕 외에 오관왕, 태산왕 등 시왕이 많이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인지 명부전이 다른 곳보다 더 눈길이 가는지 모르겠습니다.


불가에서는 죽은 지 49일까지 7일마다 7번 시왕의 심판을 받는다고 하여 49재를 통해 돌아가신 많은 분들의 위패를 모셔두고 기도를 올립니다. 사찰 법당돌아가신 분들의 영정사진이 걸려있다면 지장보살과 시왕을 모시는 전각이라고 생각을 한다면 얼추 맞을 것입니다.





최고의 혈로 꼽히는 군왕대

명부전을 뒤로하고 산으로 조금만 올라가면 왕이 나올 만큼 지기가 강하다는 군왕대가 나옵니다. 군왕대 장소를 알리는 표지판 뒤로 작은 공간만이 보입니다. 언뜻 보기에는 보잘것없는 장소이지만 조선시대에 난리를 피할 수 있는 십승지 중의 한 곳입니다. 십승지 중에서도 땅의 기운이 모이는 최고의 혈로 김시습을 찾으러 온 세조가 이곳을 보고 만세불망지지(萬世不忘之地)라고 하며 왕이 나올만한 자리라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후손 중에 큰 인물이 나오기를 바라며 선친의 시신을 군왕대에 암매장하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났다고 합니다. 이에 조선의 왕들은 새로운 나라를 세울 수 있는 인물이 나와 조선을 무너뜨리는 것을 경계하여 군왕대에 암매장한 시신을 모두 파냈습니다. 그러나, 계속 암매장이 비밀리에 이루어지자 다시는 암매장할 수 없도록 돌로 군왕대를 메꾸었다고도 합니다.


아마도 김구 선생도 탈옥 후 발각되지 않으면서도 훗날을 도모할 수 있는 장소를 물색하고 도주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십승지 중에서도 최고로 뽑히는 마곡사에 몸을 피하면서 훗날을 도모하고자 일부러 온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군왕대를 뒤로하고 내려오면서도 군왕대가 왜 최고의 혈인지 저는 알 수 없었습니다. 군왕대에 잠시 있었지만 딱히 좋은 기운을 받았다는 느낌도 없었습니다. 이 놈의 몸은 좋다는 약과 음식을 아무리 먹어도 크게 반응을 보이지 않더니, 왕이 나올 수 있을 만큼 좋은 땅의 기운도 느끼지 못하는 듯싶습니다. 역시 전 평범하고 소심하게 살아가는 것이 운명인가 봅니다.




마곡사 오층 석탑과 대광보전

마곡사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대광보전과 오층 석탑은 너른 마당을 두고 있습니다. 대광보전은 법신불인 비로자나불을 모시는 전각으로 조선 후기 건축형태를 잘 보여주고 있어 현재 보물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대광보전이 문화재로서 가치도 높지만, 옛이야기를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법당에 깃든 기이한 일들이 더욱 매력적으로 다가옵니다.


그 옛날 앉은뱅이가 살고 있었는데 불구라는 사실에 늘 세상을 원망하고 살아갔다고 합니다. 자신도 보통 사람들처럼 서서 걸을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늘 외치고 다녔습니다. 결국 무엇이라도 해보자는 심정으로 마곡사 대광보전에 불편한 몸을 이끌고 들어가 100일 동안 삿자리(참나무 껍질로 엮어서 만든 자리)를 만들며 정성스러운 기도를 올렸습니다. 간절한 소원이 부처님에게 전달되었는지 삿자리를 다 만들자 앉은뱅이는 스스로의 힘으로 일어서서 밖으로 걸어 나올 수 있었다고 합니다.


앉은뱅이가 밖으로 걸어나온 자리에는 다보탑이라고 불리는 오층 석탑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고려 후기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 오층 석탑은 원나라 시기 유행하던 라마 불교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쉽게 볼 수 있는 석탑과는 다르게 상층부가 금속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를 풍마동이라고 합니다. 풍마동 형식의 다보탑은 중국과 인도 그리고 마곡사 단 세 곳에만 남아있는 희귀성을 가진 문화재입니다.


라마식 석탑인 오층 석탑을 보면서 구복 신앙 등 미신적인 요소가 강했던 라마불교의 영향으로 마곡사의 전각 곳곳에는 기적을 행하는 여러 설화들이 많이 내려오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앉은뱅이가 걷게 되었다는 설화와 함께 오층 석탑에는 전국의 기근이 닥쳐왔을 때 3일을 막을 수 있는 힘이 있다는 재미난 이야깃거리가 마곡사에는 많이 있습니다.






석가모니불을 모셔놓은 대웅보전

대광보전과 오층 석탑에만 설화가 깃들여 있는 것은 아닙니다. 석가모니불을 모셔놓은 대웅보전에도 죽음과 관련된 재미있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습니다. 저승에 가서 염라대왕을 만나게 되면 마곡사의 대웅보전을 받치고 있는 싸리나무 기둥을 몇 바퀴나 돌고 왔는지 물어본다고 합니다. 싸리나무로 만든 기둥을 많이 돌면 돌수록 극락에 갈 수 있는 확률이 높아지지만, 한 번도 돌지 않았다면 지옥으로 떨어진다고 합니다. 저와 막내딸은 대웅보전 싸리나무 기둥을 돌며 기도를 올렸으니 지옥으로 떨어지지는 않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또한, 아들을 낳지 못하는 사람들은 싸리나무기둥을 만지며 기도를 간절히 하면 부처님이 아들을 점지해준다고 합니다. 아들 욕심이 없는 저로서는 굳이 기둥을 만지면서 기도를 올릴 필요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과거 남아선호 사상이 강했던 시절에는 아들을 낳기 위해 대웅보전으로 많은 분들이 찾아왔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시대가 흘 가치관이 변화된 오늘날에는 아들을 낳기 위해 이곳에 오는 사람이 얼마나 될지 문득 궁금해집니다.





자장율사를 모시는 조사전

마곡사에는 자장율사를 비롯한 도선 대사와 범일국사를 모시는 조사전이 있습니다. 조사전이란 한 종파를 개창한 승려를 모시는 전각을 말합니다. 마곡사를 개창했다는 자장율사를 모시는 조사전이  있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범일국사와 도선 대사는 왜 마곡사 조사전에 모셔져 있는지 궁금할 수 있습니다. 범일국사는 동지에 선불교를 전파했던 신라 말 고승으로 현재에도 강릉단오제 때 '대관령 국사성황'으로 모셔지고 있습니다. 도선 대사는 국가의 운명을 좌지우지할 정도의 풍수지리의 대가로 주로 전라도 지역에서 제자를 길러냈습니다.


그나마 도선 대사는 십승지 중에서도 가장 지기가 강하다는 군왕대가 있는 마곡사와 연이 맞닿아 있습니다. 도선 대사가 마곡사 터를 보고 삼재가 범접할 수 없는 곳이며 유구와 마곡의 두 냇가 사이의 터는 능히 천명을 살릴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얼핏 보면 범일국사와 도선 대사는 마곡사와는 큰 연관이 없어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신라 말 범일국사와 도선국사는 마곡사를 중수하신 분들로 마곡사와 깊은 연을 맺고 현재 조사전에 모셔져 있습니다.





16 나한을 모신 응진전

마곡사에 많은 전각들이 있지는 않지만, 보통 사찰들에서 만나기 어려운 많은 법당들을 마주할 수 있습니다. 응진전도 그중 하나로, 부처님을 모시는 법당이 아니라 부처님의 제자들인 16 나한을 모시는 곳입니다. 나한이라 하면 깨달음을 얻어 중생들을 이끌 수 있을 정도의 자격을 얻은 분들을 이야기합니다. 16 나한을 모시면 응진전이라는 이름이 붙고, 500 나한을 모시면 5백 나한전이라 일컫습니다.


조선 철종 때 응진전을 중수한 기록이 남아있는 것을 볼 때 마곡사는 보조국사 지눌이 중수한 이후에도 많은 풍파를 맞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임진왜란 당시 마곡사는 불에 타버리고 여기저기 폐허가 되었다가 조선 후기 여러 차례 중수를 거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마곡사 터는 전란을 피할 수 있는 십승지로 널리 알려졌기에 오히려 더 많은 피해를 입은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김구 선생님이 머무셨던 백범당

마곡사를 돌고 돌아 드디어 김구 선생님이 머무셨던 백범당에 도착했습니다. 생각보다 작은 건물이기에 처음에는 실망스러운 면도 없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김구 선생님이 이곳으로 도망쳐왔을 당시를 생각해보면 건물이 작은 것이 이해가 됩니다. 오히려 크다면 그것이 더 이상했을지 모릅니다.


1896년 황해도 안악의 한 주막에서 조선옷으로 변복을 하고 옷 속에 칼을 차고 있던 일본군 장교 쓰치다를 김구 선생님은 목격하게 됩니다. 얼어붙은 강물을 건너오느라 기진맥진한 상황에서도 명성황후를 시해한 인물일 것이라 추정하고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쓰치다를 때려죽입니다. 그 죄목으로 인천 감옥소에서 사형수로 복역을 하던 중 탈옥하여 마곡사로 오게 됩니다. 이곳에서 김구 선생님은 많은 고찰을 한 끝에 원종이라는 법명을 받으며 승려로 출가하게 됩니다.


김구 선생님은 살아생전 4개의 종교를 가졌습니다. 과거를 준비하던 어린 시절에는 유교를 신봉했으며, 동학농민운동 당시에는 동학 접주로서 동학농민군을 이끌고 전쟁에 나서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인천에서 탈옥 후 마곡사에 들어와 승려로 출가하면서 불교를 믿게 됩니다. 이후 상해로 넘어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이끌 당시에는 기독교 신자가 됩니다. 다양한 종교를 두루 경험하면서 특정 종교에 구애받지 않았기에 임시정부를 이끌 때에도 수많은 독립운동 계파를 하나로 통합시키며 이끌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광복 이후 김구 선생님이 심어놓은 향나무

백범당 옆으로 커다란 향나무가 한 그루 서있습니다. 이 향나무는 광복 이후 임시정부 요원들과 함께 이곳을 방문한 백범 김구 선생님이 직접 심어놓은 것입니다. 70년이라는 시간 동안 향나무는 잘 자랐지만, 김구 선생의 마지막은 안타까움만이 가득합니다. 일제가 아닌 그토록 사랑하던 조국의 동포에게 목숨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모든 종교의 최종 종착점은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상입니다. 누구에게도 차별받지 않고 자유롭게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 방법은 다를지 몰라도 도착점은 같습니다. 백범 김구 선생님이 꿈꾸던 한국 사람의 도리를 알고 살아가는 나라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치 않는다.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은 더욱 원치 아니한다.
우리의 부력(富力)은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강력(强力)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높은 문화의 힘이다.


김구 선생님의 어록에 유교의 인(仁), 동학의 인내천, 불교의 자비, 기독교의 사랑이 다 담겨 있습니다. 내가 하기 싫은 일은 남에게 시키지 아니하며(仁), 사람을 하늘처럼 여겨(인내천) 타인을 나처럼 받들고(자비) 사랑하라(기독교) 말을 하고 있습니다.




템플스테이가 이루어지는 요사

잠시 동안이지만 마곡사에서 일반 민생들의 염원을 엿보았고, 역사를 움직인 위인들을 단편적으로나마 만날 수 있었습니다. 짧은 소견으 모든 것을 이해하고 담아내지는 못하지만, 마곡사는 희망을 담아내는 장소인 것 같습니다. 수많은 전란 속에서 마곡사는 사라졌다가 다시 세워지기를 반복했습니다. 도적들의 소굴로 전락한 적도 있으며 왜의 침략으로 모든 것이 다 파괴되기도 했지만, 결국은 희망이라는 단어를 통해 다시 일어섰습니다.


세조가 군왕대에서 본 것도 꿋꿋이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기운을 본 것은 아닐까요. 앉은뱅이의 이야기는 스스로를 믿고 노력하면 걸을 수 있다는 희망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닐까요. 김구 선생님도 사형수로서 죽어야 하는 운명이겨내고 이곳에서 희망이라는 단어를 새기지 않았을까 감히 짐작해봅니다.


아무런 노력 없이 요행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존재하지 않음을 마곡사는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정말 간절하다면 도움을 바라지 말고 스스로 일어서라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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