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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호 Dec 31. 2017

가을과 어우러진 양양향교

강원도 양양군

 양양향교를 알리는 홍살문

양양은 속초와 강릉 사이에 있어 구경하는 사람보다는 지나쳐가는 분들이 많습니다. 양양을 구경한다고 해도 낙산사와 함께 해변을 많이 찾을 뿐 시내로 들어오는 분들이 많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늦은 가을 단풍을 보며 정취를 느끼고자 하는 분들에게 양양향교를 권해드리고 싶습니다.

양양향교는 넓지 않은 면적이지만 충분히 가을을 느낄 수 있는 풍경을 선사하고 있습니다. 제가 양양향교를 방문했던 시기는 11월의 늦은 가을이었습니다. 설악산의 나무들은 이미 단풍을 다 떨구고 앙상한 가지만을 남겨둔 상황에서도 양양 향교는 여전히 가을의 한가운데 있었습니다.


특히 향교를 찾는 분들이 거의 없다 보니 오롯이 나만의 가을을 만들 수 있었습니다. 더욱이 제가 양양향교를 방문할 당시 보수공사를 하고 있어서 가족 외에는 향교에서 사람들을 구경할 수조차 없었습니다. 물론 보수공사로 양양향교를 제대로 관람할 수 없다는 제약이 따르긴 했지만 한편으론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보수공사를 통해 잊혀 가는 우리의 문화유산을 관리하고 전통을 유지하고 있는 모습에 감사함을 느끼며 홍살문으로 들어설 수 있었습니다.



관리가 이루어짐을 확인할 수 있는 양양향교

향교(鄕校)란 한자를 직역해도 쉽게 알 수 있듯이 지방에 위치한 학교를 뜻합니다. 향교는 고려시대에 국가에서 만들기 시작해서 조선시대에 널리 보급되었던 공교육 기관으로 오늘날 중등교육을 담당하던 곳입니다. 국가에서는 유학을 교육하고 공자와 여러 성현에게 제사를 지내면서 지방민의 교화와 함께 인재를 양성할 목적으로 향교에 많은 지원을 하며 보급에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조선 중기 이후 향교는 우리의 성현을 모시며 양반계층만이 공부할 수 있었던 서원에 밀리기 시작했습니다. 신분에 상관없이 배울 수 있던 향교에 비해 양반들만 입학할 수 있었던 서원은 지배계층으로서의 특권 의식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개인의 입신양명에 있어서도 과거급제와 승진하기 유리한 서원에 유생들이 몰리면서 향교는 자연스레 쇠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양양지역의 교육과 인재양성에 힘썼던 분들의 공을 적은 흥학비

양양향교의 경우 고려 충혜왕(재위 1330∼1332, 1339∼1344) 때 안축에 의해 건립되었습니다. 안축이란 분은 우리에게 생소한 이름이지만, 국어 시간에 배웠던 경기체가로 쓰인 관동별곡과 죽계별곡 쓰신 분입니다. 경기체가는 고려 중기부터 조선 선조 때까지 사대부들이 즐겨 쓰던 글의 양식입니다. 글의 마지막 구절에 '경기하여'가 들어가기에 경기체가라고 부르는데 작품의 내용들은 세상을 객관적으로 표현하고 설명하거나 개인의 정서를 주로 담고 있습니다.


안축은 성리학을 고려에 들여왔던 안향과 같은 순흥 안씨로 풍기에서 성장했던 신흥 사대부였습니다. 안향보다 40여 년 늦게 태어났지만 그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음을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일찍부터 학문의 정진이 높아 원나라의 제과에 급제하면서 이름을 널리 알리기도 했습니다. 그러한 안축이 양양에 존무사로 있으면서 교육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양양향교 설립에 큰 기여를 하면서 오늘날 양양향교가 존재하게 됩니다.




단풍으로 가득한 양양향교

고려를 거쳐 조선시대에도 양양향교는 인근 지역의 교육과 교화를 담당하면서 인조 4년(1626)에는 향교의 규모가 크게 넓혀집니다. 그리고 숙종 8년(1682)에는 현재의 임천리로 옮겨오지만, 향교의 쇠퇴와 더불어 일제강점기에는 제 기능을 잃어버리다 6.25 전쟁 때 포화 속에 사라지고 맙니다. 그러나 지역 사회의 부흥 노력으로 1952년에 대성전과 동무·서무, 동재·서재 등 부속 건물을 지어지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양양향교가 다시 만들어진지 짧지 않은 70여 년이란 시간이 흘렀습니다. 길다면 긴 시간 동안 양양향교는 향교재단의 관리 속에 700년에 가까운 향교의 역사와 전통을 지켜올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 인구감소와 이촌향도 현상으로 지방의 많은 학교들이 폐교되어 흉물스러운 모습을 남기는 것과 대조되며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남겨줍니다.

오랜 시간 향교의 기능은 약해지고 쇠퇴했지만 명맥을 유지하며 아직도 문화와 전통 그리고 교육을 담당하는 모습은 주변 환경만을 탓하며 교육을 포기하는 오늘을 반성하게 합니다.



 


학생들을 가르치던 명륜당

향교의 배치는 평지에서는 전묘후학이라고 하여 입구에는 공자 등을 배향하는 사당을 두고 뒤편 건물에서 학업을 수행합니다. 그러나 양양향교처럼 구릉지에 조성되는 경우에는 전학후묘라고 하여 학습을 하는 명륜당이 앞쪽에 배치되고 사당이 건물 뒤편에 위치하게 됩니다. 향교를 많이 다녀보지 않았지만 명륜당 아래로 출입구가 있는 것은 특이해 보였습니다. 향교에 들어서면 자연스럽게 고개를 숙이며 경건한 자세로 입장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조선시대 양양향교는 70여 명의 학생들을 가르쳤다고 합니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향교의 정원이 90, 70, 50, 30명으로 구분되는 것을 보았을 때 양양향교의 규모는 큰 편에 속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향교의 쇠퇴와 향시의 합격율을 보았을 때 양양향교는 지역사회의 교화가 주목적이 아니었을까 생각됩니다.

하지만, 향교는 평민들에게 쉽지는 않았지만 신분상승의 수단으로 활용되기도 했습니다. 향교의 수업은 과거제에 맞추어 글을 쓰는 사장학과 유교 경전을 학습하는 경학으로 수업이 이루어졌습니다. 또한 향교에 일정기간 동안 출석을 하게 되면 과거 응시자격을 주어지기도 했으며, 향교안에 이름이 오르지 않으면 과거 응시에 제한을 두면서 조선시대 사회변동을 일으킬 수 있는 작은 동력의 역할을 수행하기도 했습니다.





기숙사 역할을 하던 동재와 서재

명륜당을 지나치면 학생들이 기거하던 동재와 서재를 만나게 됩니다. 동재는 주로 선배들이 머물던 건축물이며 서재는 후배들이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70여 명이나 되었던 학생들이 기숙하기에는 건축물의 규모로 보았을 때 무리라고 여겨집니다. 아마도 동재와 서재는 공부를 하다 잠시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공간으로 사용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학생들이 추운 겨울날에는 심신이 안정을 취할 수 있도록 동재와 서재는 온돌로 만들어졌습니다. 온돌로 만들어졌다는 것은 향교를 누군가 관리하고 보필해야 함을 의미합니다. 예로부터 우리나라의 경우 공부를 하는 사람에게는 많은 혜택이 주어져 학업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국가에서 도와주었습니다. 지금도 대학원까지 공부를 하는 경우 학생이 원한다면 군 복무를 연기시켜는 주거나, 값싼 학자금 대출을 국가에서 지원해주는 것과 같습니다.


오히려 조선시대에는 학생들에 대한 혜택이 더 컸습니다. 향교에서는 양반에 상관없이 공부를 하는 교생에게는 군역을 면해주는 혜택이 주어졌습니다. 또한 우수한 교수진을 확보하기 위해 관직에 있는 관헌이나 퇴임자를 교수관으로 임명하고 5~7 결 정도의 쌀을 수확할 수 있는 학전(學田)을 지급하여 경비를 보조하였습니다.







공자를 모시는 대성전

그러나, 조선 후기에 가면 이를 악용하는 사례들이 자주 나타나게 되면서 교육의 기능이 사라지게 됩니다. 양민들은 군역을 피하기 위해 향교에 교생으로 등록하기 시작했습니다. 관리들은 힘과 신경을 많이 써야 하지만 자신을 크게 돋보일 수 없는 교수관직을 거부하면서 향교는 조선 후기 문묘배향의 기능만 남게 됩니다.


조선 후기 교육의 쇠퇴는 향교만은 아니라 전반적인 교육기관에서 나타났으니 향교의 목적과 기능을 탓할 것은 아닙니다. 서원의 경우에도 교육의 기능이 사라지고 제사의 기능만 남아있는 사우가 늘어났습니다. 문중과 지방 유지들의 권력유지와 경제적 이익을 충족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서원이 전락하는 상황 속에서 향교도 예외일 수 없었습니다.

서원과 향교의 교육제도와 국가의 지원이 못된 것이 아니라 올바르지 못한 사회풍토 속에서 제대로 된 교육이 무너져 버린 것입니다. 그 결과 조선은 결국 안으로부터 무너졌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양양향교도 조선 후기의 현상에서 예외일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 결과 양양향교도 교육의 기능이 약해지고 문묘배향의 기능만이 남았을 것입니다.

양양향교의 대성전에는 공자를 비롯한 안자, 증자, 자사자, 맹자 5명의 성현과 함께 뛰어난 공자의 제자 10분과 송나라 시대의 6명의 성현을 모시고 있습니다. 지금도 양양향교에서는 제례를 행하고 있어 시간만 맞춘다면 관람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 18분의 학자를 모시는 동무와 서무

대성전 아래로는 우리나라의 18분의 학자를 모시는 동무와 서무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18분의 선현들은 특정 시대에 국한되지 않고 신라시대의 설총과 최치원에서부터 조선 중기 이후의 송시열과 김집 등 뛰어난 유학자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조선 시대 중국을 상국으로 섬기며, 중국의 성현이었던 기자가 세운 기자조선의 후예라는 사실이 너무나 자랑스러웠던 풍토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기자조선을 내세워 힘에서 밀릴 수밖에 없는 중국을 우리의 편으로 만들면서, 주변국보다 우위에 서려던 모습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세계를 이끌어가는 주역으로 성장하는 대한민국인으로서 갖게 되는 아쉬움은 떨쳐낼 수 없습니다. 고려시대 자주적인 성격이 조선시대 안정과 평화를 위해 부득이하게 사대관계를 맺게 된 것은 이해하지만, 사대관계를 넘어서 맹목적이고 교조적인 사대주의로 넘어가는 부분은 한탄스럽기만 합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맹목적인 사대주의를 갖게 되었는지 생각해보면 중등교육기관이었던 향교에서부터 시작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중국인을 최상위로 두고 우리의 선현을 아래로 두었으니 자연스레 사대주의가 만들어질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공자가 훌륭한 분이고 세계에 큰 영향을 주었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우리는 왜 공자와 같은 분을 만들지 못했느냐입니다.


공자와 같이 뛰어난 성현은 살아있을 때보다 사후에 제자와 후손들에 의해 성인화 되어갑니다. 즉, 시간이 지날수록 더 위대해지고 품격이 높아지는 것입니다. 우리도 이제는 과거의 역사와 전통을 계승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공자와 같은 인물을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제는 모델을 외부에서만 찾지 말고 우리에게서 찾았으면 좋겠습니다. 구한말 신채호, 박은식 선생 등이 우리의 선현들을 모델로 위인전기를 쓰신 이유를 다시 생각해봅니다.


글을 쓰다 보니 너무 멀리까지 와버렸습니다. 여하튼 양양향교처럼 우리의 것을 지키려는 노력에 박수를 보내며, 한적한 여행과 더불어 향교의 배치 양식을 제대로 보고 싶다면 양양향교를 방문해보는 것도 좋은 방법일 것입니다. 글은 복잡하고 심각할지 모르지만, 가을에 방문하는 양양향교는 여유로운 여행을 만들어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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