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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호 Feb 16. 2019

앞으로도 큰 스님을 배출할 송광사

송광사로 들어가는 입구

불교에서 귀하게 여기는 불보(佛寶)·법보(法寶)·승보(僧寶)를 가리켜 삼보라고 하며, 이를 대표하는 사찰이 있다. 불보는 부처님의 진신 사리를 의미하며 양산의 통도사를 일컫는다. 법보는 부처님의 진리가 담긴 말씀을 의미하며 고려대장경을 보관하고 있는 합천 해인사를 말한다. 마지막으로 승보는 부처님의 말씀에 따라 진리를 깨닫고 사람들을 올바른 길로 이끄는 승려가 많이 배출된 순천 송광사다. 통도사와 해인사 그리고 송광사를 예로부터 우리나라 삼보사찰이라 하였다. 


16명의 국사(國事)를 배출한 송광사와 주변 경관이 아름답다는 말을 예전부터 들어왔지만 서울에서 순천까지 내려가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늘 마음속으로 꼭 내려가겠다고 벼루다가 2018년 새해를 맞이하여 가족들과 함께 순천 송광사를 향했다. 송광사는 많은 사람들이 찾는 유명한 사찰로 찾아가는데 큰 어려움이 없었다. 최대한 송광사에 가까운 주차장에 차를 두고 자는 아이들을 깨운 뒤 내렸다. 조금은 차가운 공기를 피부로 맞으며 송광사를 향해 걷는 길은 상쾌했다. 그러면서도 산안개 너머로 보이는 소나무와 전각들은 무엇인지 모를 신비감을 주었다. 송광사를 향해 천천히 걸어 올라가면서 개경에서도 먼 이곳에서 지눌대사가 불교정화운동을 펼쳤는지 생각해봤다. 




조계산 송광사를 알리는 비석

지눌대사(1158~1210)는 고려시대 황해도 서흥에서 몸이 약한 아이로 태어났다. 몸이 너무 약해 살아남기 힘들다고 생각한 지눌대사의 아버지는 사찰을 찾아갔다. 부처님을 향해 절을 올리며 아이만 건강해진다면 기꺼이 아이를 바치겠다고 약속했다. 이후 지눌대사가 건강해지자, 아버지는 신라 말에 범일이 강원도 강릉시 굴산사에 개창한 사굴산문으로 출가시켰다. 이곳에서 지눌대사는 어디에도 치우침이 없는 공부 끝에 24살이라는 어린 나이로 승과에 급제하였다. 


지눌대사는 개인의 영달을 이룰 수 있는 승과에 급제했지만, 마음은 무거운 돌이 내려앉은 듯 무거웠다. 당시 무신정변으로 중앙은 끊임없는 정권교체가 이루어졌고, 대내적으로 연이은 전쟁이 일어났다. 이로 인해 고려의 경제는 파탄 나고, 백성들은 차마 죽지 못하고 근근히 살아가야 했다. 어디에도 기댈 곳 없이 힘들어하는 백성들을 돌봐주어야 할 승려들은 오히려 사채놀이와 노비를 이용한 수공업으로 막대한 부를 올리는 세속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러면서도 교종과 선종으로 나누어져서 자신들의 믿음만이 옳다고 싸우고 있었다.



약사전과 영산전

지눌대사는 불교계의 타락을 심각하게 우려하며 정화운동을 펼칠 것을 주장하였다. 우선 불교계의 쇄신을 위해 교(敎)와 선(禪)의 본질이 다른 것이 아님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불교계가 나서서 사회의 혼란과 부조리를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지눌은 자신과 뜻을 함께하는 승려들을 모아서 신앙결사 단체인 정혜사(定慧社)를 만들고 권수정혜결사문(勸修定慧結社文)을 지었다. 그리고 행동으로 옮겼다. 신앙결사의 이름은 나중에 수선사(修禪社)로 바뀌게 된다. 그러나 지눌과 같은 뜻을 가지고 모인 승려들조차 기존의 틀과 악습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자, 지눌은 송광사로 들어와 새롭게 신앙결사운동을 시작하였다.


원래 송광사는 신라 말 체징이 세운 길상사라는 조그만 사찰로, 고려 인종 이후 폐허가 되어 있었다. 지눌이 길상사를 개혁의 터로 잡은 것은 최고의 스승으로 여기던 육조혜능의 머리가 모셔진 쌍계사와 멀지 않았고, 굳은 절개와 의지를 상징하는 소나무가 많은 송광산이 자신의 의지를 보여주기에 최적이라고 여겼는지 모르겠다. 여기에 폐허가 된 길상사를 복원하는 과정처럼 불교계가 쇄신되기를 바라는 마음도 담았을 것이다. 지눌은 소나무가 많아 송광산이라 불리던 이름도 혜능의 조계 보림사에서 이름을 가져와 조계산으로 바꾸었다. 이처럼 불교계가 쇄신되기를 바라는 강력한 마음을 송광사에 담았다. 그리고 선종과 교종을 통합한 조계종을 개창하였다. 



대웅보전

우리나라 불교계에서 가장 큰 종파인 조계종이 시작된 송광사이게 굉장히 많은 전각을 기대하지만, 막상 경내에 들어서면 많은 전각이 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그 옛날 송광사가 80여동의 전각으로 이루어졌을 때, 큰 비가 와도 전각 밑으로만 다니면 비를 맞지 않고 경내를 다녔다는 말이 거짓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여기에는 아픈 역사가 담겨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당시 순천이 왜의 마지막 거점이 되면서 송광사는 폐허가 되었고, 1842년에는 큰불로 대웅전을 비롯한 많은 건물이 불에 타버렸다. 이후 어느 정도 복구를 한 송광사는 대한민국이 건국되는 과정에서 여수 순천 사건과 6·25 전쟁에서 대웅전이 또다시 불타는 불운을 겪었다. 




숭보전

그 결과 송광사는 수차례의 복원으로 현재 50여동의 전각이 자리하고 있다. 그렇다보니 오히려 전각보다는 대웅보전 앞의 넓은 마당이 깊은 인상을 준다. 여느 사찰보다도 훨씬 넓은 마당을 가진 대웅보전 앞에 서있으면, ‘부처님 오신 날’의 웅장한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진다. 때마침 대웅보전에서 중후하게 울려 퍼지는 스님들의 예불 소리는 깊은 울림을 나에게 주었다. 예불소리에 취해 넋놓고 대웅보전을 바라보고 있자니, 어느덧 예불이 끝나고 수십 명의 스님들이 줄 맞추어 대웅보전을 나왔다. 수십 명의 스님이 모습을 드러내는 것만으로도 넓은 마당이 한 가득 채우지는 것 같은 장관이었다. 지금의 모습만으로도 위용이 대단한데 과거 승보사찰로 많은 스님과 신도들이 모여들던 송광사의 모습이 어땠을지 상상조차 어려웠다.




공양하던 밥을 보관하던 비사리구시

조선시대에 송광사를 찾아오는 많은 신도를 공양하기 위해 밥을 담아 두었던 비사리구시는 쌀 일곱 가마분의 밥이 담겼다고 한다. 일곱 가마는 4천여 명이 먹을 수 있는 양으로 숭유억불의 조선시대에서도 송광사가 위치가 어떠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그 당시 사용되던 비사리구시는 승보사 옆에 보존되어 있어 누구나 쉽게 살펴볼 수 있다. 이 비사리구시에는 재미난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조선 경종 4년인 1724년에 불어 닥친 태풍으로 남원 송동면 세전리에 800년이 넘게 살아온 싸리나무가 쓰러졌다. 당시 마을 사람들은 싸리나무를 세 토막내어 인근의 큰 사찰로 보내기로 결정하였다. 싸리나무에서도 가장 굵은 아랫부분을 곡성에 위치한 도림사로 운반하려 했으나 어찌된 일인지 꼼짝하지 않았다. 이에 구례의 화엄사로 목적지를 바꾸어 옮기려 했으나 움직이지 않는 것은 매한가지였다. 마지막으로 마을사람들이 송광사로 옮기기로 결정하자 싸리나무 밑동은 언제 그랬냐는 듯 스르륵 움직였다. 그래서일까? 비사리구시는 현재 송광사의 3대 보물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 



지눌이 왔을 때 다시 살아난다는 고향수

송광사에는 이외에도 많은 전설이 깃들어져 있다. 송광사 일주문 앞으로 돌무더기에 꽂힌 나무기둥이 하나 서있다. 이 나무기둥의 이름은 고향수로, 보조국사 지눌이 짚고 다니던 지팡이라고 전해진다. 지눌이 지팡이를 땅에 꽂자 잎이 나고 꽃이 피는 나무가 되어 자라다가, 스님이 열반에 들자 잎을 떨구고 따라 죽으면서 지금과 같이 앙상한 기둥으로 남았다고 한다. 비록 고향수가 지금은 죽어있지만 훗날 지눌이 송광사를 다시 찾게 되면 다시 살아난다는 이야기가 전해져오고 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수많은 전란과 화재에서도 고향수가 불에 타지 않고 오늘날까지 전해진다는 것이 더 놀랍다. 


송광사는 찬란했던 역사와 기이한 전설을 보여주는 전각 외에도 조선시대 숭유억불정책으로 왕실에 종속되어 활동했음을 보여주는 관음전도 있다. 현재의 관음전은 부처님에게 고종황제의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황실기도처로 1903년 성수전이란 이름으로 지어졌다. 성수전에는 다른 전각과는 달리 고종을 태양으로, 명성황후를 달로 상징하는 일월오병도가 있다. 또한 좌우 벽으로 2품 이상의 고관대신들이 국궁 배례하는 품계도를 그리고, 외벽에는 십장생 벽화를 그렸다. 1957년 성수전 앞에 있던 관음전을 해체하는 과정에서 관음보살상을 성수전으로 옮긴 뒤, 관음전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것은 종교가 국가와 사회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음을 보여주는 사례로 조선이 멸망한 현실이 반영된 근현대사의 역사라 할 수 있다.



관음전

이 외에도 송광사에는 수많은 보물과 전설을 모두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다. 그러나 무엇보다 승보사찰이라는 이름답게 고려시대 지눌에서부터 시작하여 16명의 국사를 배출한 전통이 현재에도 이어지고 있다는 점이 인상 깊다. 송광사에는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무소유의 법정스님과 불교계에 큰 영향을 미친 구산선사가 이곳에서 깨달음을 얻고 가르침을 설파하였다. 그리고 앞으로도 큰 스님이 송광사에서 계속 배출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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