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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호 Apr 26. 2019

변화가 필요한 탑골공원

탑골공원 정문 - 삼일문

민족운동의 발상지로 3·1운동이 시작된 탑골공원 앞을 나는 셀 수도 없이 많이 다녔지만, 정작 탑골공원으로 들어간 적은 없었다.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탑골공원 앞은 악취가 났고, 어르신들이 주로 찾아가는 장소로 인식되었다. 특히 1990년대 후반 IMF가 터지면서 많은 노숙자들이 탑골공원에 모여들었다. 공원 주변에는 술병이 나뒹굴고, 여기저기서 작은 시비와 싸움이 연이어 일어나곤 했다. 그렇다보니 나도 모르게 탑골공원 앞을 지날때면 인상을 찌푸리게 되었고, 되도록 반대편 인도로 걸어가곤 했다. 


오늘날 탑골공원은 예전보다 깨끗해지고 쾌적한 환경을 갖추었다. 그러나 다른 공원들처럼 남녀노소 편안하게 방문하는 공원의 기능을 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래서 역사를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탑골공원을 볼 때마다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특히 2019년은 3·1운동 100주년이 되는 해로 탑골공원의 변화가 간절히 바라진다.


탑골공원의 정문의 현판은 삼일문이라고 적혀있다. 그 이유는 3·1운동이 거족적인 민족 운동으로 발전할 수 있는 시작점이 탑골 공원이기 때문이다. 1919년 3·1민족대표 33인 중 지방에서 올라오지 못한 29인의 민족대표들이 태화관이 모여 독립 선언서를 낭독했다. 그 순간 탑골공원에는 수많은 학생들이 모여 민족지도자들이 나타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 날 탑골공원에 모였던 학생들의 숫자가 대략 4,000~5,000여명으로 추산된다. 

손병희 선생 동상

민족지도자들은 탑골 공원에 모인 학생들의 숫자가 많다는 소식에 기쁘기도 했지만, 걱정이  되었다. 만세 시위 도중 학생들이 다칠 수도 있었고, 젊은 혈기로 인해 비폭력이라는 원칙이 지켜지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였다. 그래서 민족지도자들은 학생들 모르게 태화관에서 독립 선언서를 낭독한 후, 스스로 일제 경찰에 신고하여 잡혀갔다.  


반면, 그 시각 탑골공원에 모인 학생들은 독립에 대한 뜨거운 열정을 품고 민족대표들과 함께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민족 대표를 애타게 기다리던 학생들에게 민족 지도자들의 연행은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이었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우왕좌왕하던 학생들 사이로 한 학생이 팔각정에 올라가 독립 선언서를 큰 소리로 읽고 만세를 외쳤다. 이 학생의 우렁찬 만세 소리에 학생들은 금세 하나가 되어 태극기를 두 손 높이 들어 올리고 대한 독립 만세를 외쳤다. 이때 탑골공원 팔각정에서 독립 선언서를 낭독한 학생의 이름이 정재용(1886~1976)으로 알려져 있다.


정재용의 용기 있는 행동은 학생들을 하나로 움직이게 만들었다. 학생들은 질서정연하게 거리로 나가 행진하며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자, 고종의 인산(왕의 장례)을 보기위해 전국에 모인 군중들이 참여하였다. 바로 3·1운동의 시작을 알리는 순간이었다. 이후 3.1운동은 독립에 대한 필요성과 당위성을 온 민족에게 각인시켜주었다. 독립에 대한 희망을 심어주면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는 결정적인 계기를 만든 민족운동이었다. 대한민국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계승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탑골공원은 대한민국이 세계 속에 우뚝 설 수 있었던 시작점이라 할 수 있겠다.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던 팔각정

탑골공원에 들어서면 제일 먼저 보이는 것이 손병희 선생(1861~1922)의 동상이다. 손병희 선생은 천도교(동학)의 3대 교주이자, 독립 운동가이다. 구한말에서 일제강점기 때 가장 영향력이 컸던 종교는 바로 천도교다. 천도교는 외래종교가 아니라 우리의 역사와 정서와 민중의 마음을 품어주었던 민족 종교였기 때문에, 어떤 종교보다도 우리의 아프고 힘든 마음을 잘 이해해주고 위로해주었다. 그리고 민중의 문제를 해결하기위해 행동으로 옮겼다. 


천도교가 전국적인 규모로 성장하고 독립운동의 중심에 설 수 있었던 데에는 손병희 선생이 있었다. 손병희 선생은 동학농민운동 당시 2차 봉기를 주도하며 일제를 우리의 땅에서 내쫓으려 노력하였다. 3·1운동 당시에는 민족대표로서 운동을 주도하는 중심인물이었다. 민족대표 33인 중 15명이 천도교계 사람이 구성된 것도 손병희 선생의 영향력과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3.1운동을 표현한 부조

손병희 선생이 3·1운동에 참여한 것은 천도교의 운명까지 내걸었다고 봐야한다. 천도교 지도자들이 3·1운동으로 구속될 경우 교단이 무너질 수 있다는 것은 누구나 쉽게 예상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라의 독립을 위해 손병희 선생은 3·1운동을 주도하였다. 천도교에서 운영하는 보성사에서 독립선언서를 인쇄하고, 기독교에서 독립운동자금 5천원을 요구하자 주저 없이 거금을 내놓는 등 독립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하고자 했다. 다시 말하면 손병희 선생은 우리의 독립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내놓았던 것이다. 그 결과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는 과정에서 많은 민족자들이 손병희 선생을 대통령으로 추천하였다. 그러나 3.1운동 이후 감옥에 투옥되면서 건강이 너무 악화되었다. 병보석으로 나온 이후 병석에 누어 있다가 1922년 운명을 달리하시게 된다. 그래서 탑골공원에는 33인의 민족대표자중에서도 공로가 가장 많았고 수장역할을 했던 손병희 선생을 동상으로 만들어 기념하고 있다. 

저절로 애국심이 생기게 하는 부조

손병희 선생의 동상 오른쪽으로 가면 3·1운동 당시의 민족저항을 부조로 만들어놓은 조형물을 만나볼 수 있다. 조형물을 보고 있자니, 일제의 만행에 울분이 치솟아 오른다. 그와 함께 일제의 탄압 속에서도 굴하지않고 민족의 독립을 위해 만세를 부른 우리의 선조들이 너무도 자랑스러워진다. 그러나 이런 훌륭한 작품들이 무관심속에 방치되고 있다는 사실이 마음을 무겁게한다. 


탑골공원은 일제강점기 시절 3·1운동의 시발점이라는 역사적 가치만 있는 것은 아니다. 탑골공원에는 국보 제2호로 지정된 원각사지 10층 석탑이 있다. 원각사지 10층 석탑은 불교를 억압하던 조선시대에 만들어졌다는 점에서 특별함을 가지고 있다. 더욱이 서울 한 복판에 만들어져 600년이 넘는 동안 한 자리에 서있었다. 탑골공원은 원래 고려시대 흥복사라는 사찰이 있던 자리였다. 조선이 건국되면서 불교를 억압하는 정책을 꾸준히 폈음에도 불구하고 흥복사는 계속 서울에 자리하고 있었다.

원각사지 10층 석탑

이 흥복사가 사라지지 않았던 것은 조선 왕 중에서도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불교를 숭상하던 세조가 있다. 세조는 1464년 흥복사를 원각사(圓覺寺)로 이름을 바꾸고 중건하면서 석가여래의 분신사리를 안치한 원각사 10층 석탑을 만들었다. 원각사를 중건하는 과정에서 2,100명을 동원하고 근처 200여 호를 철거하였다는 역사적 사실을 살펴볼 때, 세조가 얼마나 많은 공을 들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래서일까? 후대 왕들도 세조가 심혈을 기울였던 원각사 10층 석탑을 없애지 못했다. 하지만 관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상륜부가 사라지는 등 석탑의 일부가 훼손되었다. 특히 원각사지 10층 석탑은 대리석으로 만들어졌기에 뜨거운 햇빛과 비에 약한 모습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1947년에 상륜부를 복원하고 현재는 투명한 유리로 원각사지 10층 석탑을 보호하고 있다. 이 외에도 탑골공원에는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던 팔각정과 대원각사비, 그리고 도시개발과정에서 출토된 석재유구 등이 보존되어 있어 볼거리가 많다. 

도시개발과정에서 나온 석재유구

탑골공원을 둘러보면서 이렇게 볼거리와 역사가 풍부함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에게 외면을 받는 현실을 바꾸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산공원을 모델로 탑골공원을 변화시키면 어떨까싶다. 도산공원은 남녀노소가 부담 없이 방문하여 휴식을 취하는 도시속 생활공원으로 자리잡았다. 여기에 안창호 선생의 묘소와 함께 작은 박물관이 운영되고 있어 역사교육이 함께 이루어지고 있다. 그리고 공원 곳곳에 안창호 선생의 어록을 보면서 자연스레 안창호 선생의 뜻을 받들 수 있다. 탑골공원도 3·1운동의 주역인 손병희 선생의 동상과 전개과정을 볼 수 있는 조형물 서판이 있다. 또한 600년을 이어온 원각사지 10층 석탑과 대원각사비 등 역사적 깊이가 있다. 또한 서울의 중심 한 복판에 있다. 탑골공원이 이미지를 변신하여 모두에게 기억되고 사랑받는 공간이 되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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