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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호 Jun 26. 2019

감사함을 표현한 에티오피아 기념관

강원도 춘천시

춘천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관광도시다. 최근에도 새로운 관광지를 개발하는 노력이 계속 이루어지면서 많은 이들의 발걸음을 잡는다. 그렇다보니 춘천은 예전부터 널리 알려진 관광지부터 최근 각광받는 관광지들이 어우러지면서 강원도를 넘어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도시가 되었다. 춘천의 많은 명소 중에 대한민국의 긍정적인 이미지를 국제사회에 보여주는 곳이 있다. 바로 공지천에 위치한 에티오피아 참전 기념관이다. 


2017년 유시민이 한 방송프로그램에서 에티오피아 참전 기념관을 소개하면서 찾는 사람이 많아졌다. 그렇지만 그 이전에는 이곳을 찾는 방문객이 많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춘천 시내에 에티오피아 참전 기념관이 있지만, 주변에 특별하게 가볼만한 장소가 별로 없다. 또한 우리의 인식에 에티오피아는 가난으로 인해 많은 아이들이 굶어 죽어가는 국가라는 비호감도 한 몫 했다. 그러나 에티오피아는 대한민국이 존재하는데 큰 기여를 한 국가로 우리가 은혜를 갚아야 할 국가다.




에티오피아는 아프리카 대륙에 오랜 역사를 가진 나라로, 우리에게는 티비 광고를 통해 커피원산지로 잘 알려져 있다. 에티오피아는 한반도의 5배가 넘는 넓은 영토에 1억 1천 만 명이 사는 큰 나라지만, 우리는 풀과 나무가 없는 황량하고 자원이 부족한 나라로 알고 있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에티오피아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는 달리 국토의 50% 이상이 서늘한 기후인 푸른 숲의 고원지대다. 국토의 일부분을 차지하는 저지대만이 사막에 불과하다.


또한 에티오피아가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도 모르는 사람이 많다. 아프리카의 대부분의 국가가 1900년대에 서구 유럽으로부터 독립했다고 알고 있다. 하지만 모든 아프리카의 국가가 식민지였던 것은 아니다. 라이베리아와 에티오피아는 제국주의 시대에 독립을 유지했다. 라이베리아의 경우 1847년 미국에서 해방된 흑인들이 넘어와 세운 나라지만, 에티오피아는 아주 오랫동안 아프리카의 강국으로 이탈리아의 침입에 맞서 싸우며 독립을 유지한 나라다. 물론 2차 세계대전에서 이탈리아에 잠시 나라를 빼앗기기는 했지만, 그들만의 힘으로 되찾은 자주적인 나라다.



에티오피아는 기독교를 믿는 사람이 61%로, 그들은 자신들이 솔로몬의 후손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에티오피아인들은 솔로몬과 시바여왕이 결혼하여 메네리크를 낳았고, 메네리크가 이스라엘에 있던 성궤를 에티오피아로 가져와 나라를 세웠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 왕조는 1974년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가 공산주의 군부세력에 의해 쫓겨나기 전까지 존재한 세계에서 가장 오랜 왕조라 여겼다.


이런 에티오피아는 6·25전쟁 이전까지 우리와 어떠한 관계도 맺고 있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티오피아는 우리를 위해 1951년 5월 6일 35명의 군인을 파견하기 시작해서 1965년까지 대한민국이 자리를 잡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더욱이 에티오피아가 우리나라에 군대를 파병한 이유가 다른 국가들하고는 달리 순수한 의도였다. 당시 우리에게 군대를 파병한 하일레 셀라시에 에티오피아 황제는 1935년 이탈리아의 침략에 국제 연맹에 군사지원을 요청했으나 실패한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에티오피아는 이 당시 자신들만의 힘만으로 이탈리아와 전쟁을 치르면서 27만 명이라는 엄청난 국민이 희생을 당했다. 이처럼 에티오피아는 강대국으로부터 버림받은 쓰라린 아픔을 가지고 있었으나, 에티오피아는 자신들의 이익만 추구하던 강대국들과 다른 국가임을 6·25전쟁 때  군대를 파병함으로써 보여주었다. 다른 나라들처럼 정치와 경제에서 이해득실을 따지지 않고 순수한 의도로 전쟁이라는 인류가 만들어낸 비극 속에서 무고한 사람이 희생되는 것을 막고자 도와준 것이었다.


그렇기에 에티오피아 황제 하일레 셀라시에는 대한민국에 파병하는 군대를 선발하는데 신중하였다. 황제는 최강의 군인만이 선발되는 황실근위대로 파병부대를 편성하여, 우리나라의 기후와 지형이 비슷한 곳에서 8개월 정도를 영국 교관을 통해 훈련시켰다. 그리고 ‘상대에게 결정적 타격을 주거나 궤멸시키는 부대’라는 뜻으로 강뉴(Kangnew)부대라 명명하였다.




강뉴부대는 1951년 5월 6일 부산항에 도착한 이후 다섯 차례에 걸쳐 6,037명을 파병하였다. 그리고 253회의 전투를 치르면서 121명이 전사하고 536명이 부상당하는 큰 피해를 입었다. 하지만 에티오피아의 강뉴부대는 전투에서 결코 물러남이 없었다.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가 군대를 파병하기 전 “목숨을 걸고 이길 때가지 싸워라. 그렇지 않으면 죽을 때까지 싸워라.”는 연설을 기억하며 악조건에서 싸워 이겼다. 이것은 비단 황제의 명령을 따르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그들 스스로가 약소국으로서 겪어야했던 아픔과 슬픔을 대한민국이 겪지 않도록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 마음은 첫 번째 전투에서 승리를 이끌어냈다. 강뉴부대의 첫 번째 승리는 1951년 8월 15일 중동부 전선 적근산-심현 일대에서 중공군을 상대로 4시간의 교전 끝에 얻어냈다. 이후 첫 승리는 강뉴부대의 프라이드가 되어, 이후의 전투에서 물러나지 않는 단단한 기반이 되었다. 에티오피아의 강뉴부대가 전투에서 물러서지 않고 싸우는 모습에 중공군과 북한군은 기가 죽어버렸다. 이후 에티오피아의 강뉴부대가 있는 곳은 되도록 공격하지 않고 피한 결과, 강원도 양구, 화천, 철원이 대한민국의 영토로 편입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이처럼 대한민국을 수호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던 에티오피아는 1974년 공산주의 군부가 일으킨 쿠데타로 어려움을 겪어야했다. 종전 이후 부산 유엔공원을 방문하기도 했던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는 군부에 의해 축출된 뒤, 1975년 궁전에서 암살당해 죽어버렸다. 이후 6·25전쟁의 영웅이자 에티오피아의 자랑이었던 강뉴부대원들은 암울한 시기를 보내야했다. 군부세력은 공산주의 국가인 북한과 싸웠다는 이유를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황제의 근위대 출신으로 막강한 전투력을 전 세계에 보여준 그들이 부담스러웠다. 에티오피아 황실이 다시 부활하는데 강뉴부대원들이 토대가 될 수 있다는 생각에 군부세력은 강뉴부대원들의 재산을 몰수하고 수많은 압박을 가하였다. 그렇게 수십 년을 살아오면서 많은 것을 빼앗기고 짓밟혔지만, 그들은 6·25전쟁에 참여한 것을 후회하지 않았다. 




참전 용사였던 쉬퍼로우 게브레 볼드는 “내 비록 온몸에 총탄이 박히고 팔, 다리를 잃었지만 한반도의 자유를 위해 사운 자부심으로 한 평생 살아왔습니다.”, “가난이 대물림돼 자식 교육도 못 시키고 있지만 한국이 발전되는 모습을 보니 참으로 흐뭇합니다.”라고 소감을 밝혔다. 자식들의 삶이 힘들면 부모로서 자책감을 가질 수밖에 없다. 자식을 교육시키지 못하게 된 발단이 6·25참전이란 생각이 들면 한국이 미울 수도 있는데, 오히려 한국이 잘 살게 되어 흐뭇하다는 말에서 우리보다 한국을 더 많이 아끼고 사랑하고 있음이 느껴진다. 더불어 그들 스스로가 세계의 평화와 자유에 크게 기여했다는 사실에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그래서일까? 에티오피아 참전기념관에 가면 한국의 여러 사회단체들이 에티오피아 참전용사를 모셔오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도움을 주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고마운 마음을 표현하는 모습이야말로 대한민국의 수호를 위해 인생을 바친 에티오피아 참전용사에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최고의 답례가 아닐까싶다. 에티오피아에게 경제적인 지원을 해주는 것도 필요하겠지만, 그들을 잊지 않고 감사함을 표현할 줄 아는 것이 우리에게 더 필요한 일이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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