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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호 Jul 14. 2019

샛강 생태공원으로 바라본 여의도

샛강다리

여의도는 원효대교마포대교서강대교 외에도 많은 다리를 통해 서울의 강북과 강남으로 드나들 수 있다그중에서도 가장 독특하고 아름다운 다리를 꼽으라면 여의도 샛강다리라고 말하고 싶다영등포구 신길동과 여의도를 이어주는 샛강다리는 기존의 한강 다리와는 다르게 곡선으로 만들어진 독특한 형태를 가지고 있다직선으로 이루어져 효율성만을 강조하는 일반적인 다리와는 달리 샛강다리는 보행자들이 주위를 둘러보며 천천히 걸을 수 있도록 오로지 도보만을 허용한다.


샛강다리 아래로는 서울의 동서를 가로지르는 올림픽 도로와 그 옆으로 샛강 생태공원이 자리하고 있다회색빛으로 가득한 서울 도심지 한 복판에 위치한 샛강 생태공원은 인근 시민들의 산책로이자 여유를 즐길 수 있는 고마운 장소다생태공원은 여의교에서 서울교까지 1.2km 구간에 조성되어 있는데그 안에는 버드나무 군락지와 여러 개의 습지가 있어 누구나 쉽게 수생식물과 조류를 관찰할 수 있다

샛강 생태공원

그리고 생태공원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아스팔트로 포장된 도로가 아닌 흙길을 밟을 수 있다.  어렸을 적 흙을 밟으며 자라온 나는 흙이 주는 감수성에서 벗어나기 어렵다마른 날에 풀풀 날리는 흙먼지의 냄새비가 오면 빗물과 함께 올라오는 흙냄새를 교외가 아닌 서울 한 복판에서 만날 수 있다는 것은 큰 행운이다또한 샛강 생태공원에는 억새 숲도 조성되어 있어 길을 따라 걷다 보면 억새 사이로 숨어있는 아기 새들이 시끄럽게 지저귀는 소리를 듣게 된다


그러나 샛강 생태공원이 이렇게 가꾸어진 것은 얼마 되지 않는다. 1982년부터 시작된 한강공원 조성사업과정에서 한강을 일직선으로 만들면서 여러 샛강들이 사라졌다여의도 샛강도 이 때 사라지면서 여름에는 나비와 잠자리를 잡고 겨울에는 스케이트를 타던 추억들도 함께 사라져버렸다이렇게 잊힌 여의도 샛강은 2000년대 시민들의 공원으로 되돌아오게 되었다.


샛태공원에 피어있는 꽃

샛강의 역사는 여의도의 역사와 흐름을 같이한다지금은 여의도하면 높은 빌딩과 넓은 공원 그리고 벚꽃으로 유명하지만과거에는 그러지 않았다여의도는 태백산에서 시작된 물줄기가 한반도의 동서를 횡단하면서 가져온 많은 퇴적물이 쌓이면서 만들어진 섬이다그래서 여의도는 햇살에 눈을 뜨기 어려울 정도로 반짝이는 모래가 많았던 섬이었다그러나 모래섬이기에 여의도는 농사를 지을 수 없었다장마와 태풍이 오는 여름의 여의도는 불어난 물에 잠기면서 사람이 살기 어려운 지역이었다또한 간척사업이 이루어지기전의 여의도의 면적은 지금처럼 넓지 않아서 많은 사람이 거주할 수 없었다농사도 짓지 못하고 여름이면 침수되어 사람이 살기 어려웠던 여의도는 신분이 낮거나 가난한 사람만이 어쩔 수 없이 들어가 사는 섬이었다이들은 이곳에서 양이나 염소를 섬에 방목하여 생계를 유지했다.


여의도가 얼마나 쓸모없는 땅이었는지 여의도에 부임하러 들어온 관리들은 스스로 좌천되었거나 유배 왔다고 생각했다왕이 살고 있는 도성과 가깝지만 천민들만 가득한 섬으로 관리의 가족들이 따라오는 경우는 매우 드물었다가족들을 집에 남겨두고 관료는 쓸쓸이 홀로 여의도에 들어왔다이곳에서 목장이나 관리하는 무료한 일상생활에 지친 관료들은 여의도에 살고 있던 천민 여성과 정을 붙이며 시간을 보냈다여의도에서의 임기가 끝나면 대부분의 관료들은 여자를 버리고 나왔지만간혹 첩으로 삼고자 도성으로 데려오는 경우도 있었다그러나 관리를 따라 여의도를 나오면서 새로운 삶을 꿈꿨던 여인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버림을 받는 경우가 많았다여의도와는 너무나 다른 도성의 환경에 적응하지 못한 여인들은 촌스러운 모습을 보였고이에 관료들은 부끄러워하거나 싫증을 내며 집밖으로 내쫓았다어찌 보면 사랑이 아닌 다른 목적이 더 먼저였던 이들의 미래는 예정된 결과였을지 모른다

KBS 방송국

이처럼 아무 쓸모가 없었던 여의도는 조선 시대 나의주양화도라 불렸다이외에도 여의도는 누가 가져도 관심이 없다는 뜻으로 너의 섬나의 섬이란 뜻의 너벌섬으로도 불려졌다너벌섬을 한자로 변환한 여의도로 1946년 지명이 확정되면서 우리는 나의주양화도너벌섬 대신 여의도란 지명만을 알고 있다


사람들에게 버려졌던 여의도에 일제 강점기 시절 비행장이 만들어지면서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기 시작했다비행기가 흔치않았던 1916~58년까지 여의도는 국민들이 비행기를 마음껏 볼 수 있었던 장소였다또한 일제강점기 시절 민족적 자부심을 보여주었던 장소이기도 하다우리나라 최초의 비행사이자 독립 운동가였던 안창남이 1922년 비행기를 몰고 여의도에 도착했을 때, 5만여 명의 군중들이 모여 한국인으로서의 자부심을 가졌다그리고 이 자부심은 훗날 독립운동으로 이어졌다.

여의도공원

여의도 비행장은 김포공항이 만들어지면서 사라졌지만 여의도는 새롭게 변모하며 그 가치를 높여갔다한강의 또 다른 섬이었던 밤섬을 폭파하면서 나온 돌덩이와 모래를 여의도에 쌓아 면적을 넓이고그 토대 위에 대한민국의 중요 기관을 설치했다. 1975년 국회의사당을 여의도에 건립되면서 대한민국의 정치 중심지가 되었고이후에는 KBS, MBC 등 방송사들이 둥지를 틀면서 여의도는 서울을 넘어 대한민국을 상징하는 섬이 되었다.


1983년에는 이산가족의 만남을 통해 전 세계에 전쟁의 참상과 비극이 계속 되어서는 안 된다는 메시지를 주었다공영방송 KBS가 이산가족 찾기 특별 생방송을 하면서 6·25전쟁 이후 전국에 흩어졌던 이산가족들이 잃어버린 가족을 찾기 위해 여의도로 몰려왔다많은 이들이 여의도로 몰려드는 이산가족을 보면서 전쟁이 남긴 상처에 안타까워하고 슬퍼했다그와 함께 다시 만난 이산가족을 보며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서로의 아픔을 치유했다당시 이산가족을 찾는 프로그램은 기네스북에 생방송 최장시간이라는 신기록을 남기며 여의도를 전쟁의 아픔을 극복하고 평화로운 시대를 여는 장소로 만들었다.


억새 숲

1985년에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높은 63빌딩이 여의도에 들어서며 개발도상국에서 선진국으로 진입할 수 있다는 희망을 국민에게 심어주었다. 63빌딩은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한 번은 꼭 방문해야 하는 랜드 마크가 되었다당시 농어촌에 있던 살던 학생들은 서울로 수학여행을 오면 63빌딩과 국회의사당은 필수 코스로 방문하여 기념 사진을 찍고 갔다지금도 가을이 되면 여의도 63빌딩 앞에서 거행되는 불꽃 축제를 즐기며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로 가득하다우리나라에서 제일 높은 건물이라는 타이틀은 아주 오래 전 내려놓았지만 우리들 마음속에는 아직도 63빌딩은 여의도를 넘어 대한민국을 상징하는 랜드 마크로 남아있다최근 여의도에 있던 방송사와 금융권이 다른 지역으로 이전하면서 늙어간다는 이야기가 자주 들린다그러나 여의도는 여의도 공원한강 공원세계불꽃축제 등 문화의 공간으로 새롭게 다시 태어나고 있다그래서 여의도가 어떤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줄지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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