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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호 Aug 04. 2019

호남 의병의 정신이 기린 금성산성

전남 담양에는 메타세콰이어길, 죽녹원와 같이 자연과 하나가 되어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장소가 많아 사람들이 즐겨 찾는다. 여기에 국가와 민족을 위한 호남사람들의 얼이 깃든 장소도 많다. 그중에서도 임진왜란 당시 왜군을 맞아 목숨 걸고 싸우던 의병의 거점이었고, 사람이 주인이 되는 세상을 만들려했던 동학농민군이 피를 흘리며 싸웠던 장소, 일제에 맞서 나라를 지키려했던 호남창의회맹소 거점이었던 금성산성은 가볼만한 가치가 있다.


금성산성은 금성산(603m)을 주봉으로 하여 연대봉, 시루봉, 노적봉, 철마봉으로 이어지는 능선을 따라 7,345m에 달하는 거대한 산성이다. 금성산성은 높은 봉우리 안으로 분지와 같이 움푹 파인 넓은 땅을 가지고 있어 적군을 맞아 방어하기에 매우 유리할 뿐 아니라 오랜 시간 산성에 머무를 수 있는 이점이 있다. 특히 내성 안에는 9개의 샘이 있어 식량만 확보된다면 수천 명이 들어와 생활하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래서 고려시대 몽골의 군대가 쳐들어왔을 때에도 담양 인근의 주민들은 금성산성에 들어와 항전을 벌일 수 있었다. 이처럼 성안에 들어와 항전하는 성을 입보산성이라 한다.




금성산성이 축성된 시기가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지 않다. 삼국시대부터 후삼국시대에 이르는 동안 축성되어 호남지역의 중요한 군사시설로 자리매김했다고 추정한다. 이후 금성산성은 국난이 일어날 때마다 백성들이 하나가 되어 맞서 싸울 수 있는 구심점이 되었다. 수많은 전쟁에서도 굳건히 버티던 금성산성이 폐허가 된 것은 동학농민운동 때였다.


동학농민운동을 이끌던 녹두장군 전봉준은 189411월에 벌어진 우금치 전투에서 일본군에 패배한 이후, 금성산성에서 다시 전열을 정비하고자 했다. 그만큼 금성산성은 일본군을 맞아 버틸 수 있을 만큼 공고했다. 그러나 문제는 식량이었다. 많은 동학군이 굶주린 배로 추운 겨울을 버티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이에 전봉준은 식량을 구하러 금성산성을 내려가 순창으로 향했으나, 옛 친구이자 부하였던 김경천의 밀고로 122일 관군에 체포되고 만다. 담양을 비롯한 여러 지역에 흩어졌던 동학농민군은 전봉준을 구출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모두 실패하고 말았다. 이후 전봉준이 처형된 뒤 동학농민군이 주둔했던 많은 곳이 폐허가 되었는데, 금성산성도 이 때 불태워져 동서남북문 터만 남아버렸다.


그러나 동학농민군이 품었던 이상과 민족을 위하는 마음은 사라지지 않았다. 1908년 정미의병 당시 금성산성은 일본군을 맞아 나라를 지키려 한 의병들의 구심점이 되었다. 금성산성에서 300여명의 의병을 이끌고 일본군과 맞서 싸웠던 인물이 기삼연(1851~1908)이다. 기삼연은 외세를 몰아내고 자주적인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던 위정척사파의 대표적인 인물이었던 기정진에게 학문을 익힌 만큼 외세에 맞서 우리의 것을 수호해야 한다는 의식이 강했다.


기삼연이 45세가 되던 해 일본에 의해 민비가 시해되는 을미사변이 일어났다. 조선의 국모였던 민비가 일본 무뢰배들에게 비참하고 잔혹하게 시해된 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너무나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기삼연은 적지 않은 나이였지만, 풍전등화와 같은 나라를 구하기 위해 1896년 의병을 일으켰다. 기삼연의 인품과 능력을 아는 사람들이 하나 둘 모이면서 의병의 숫자는 300명을 헤아리게 되었다. 기삼연은 300명으로는 큰일을 도모하기에 부족하다고 생각하고 광주에서 거병한 기우만과 합세하였다.


그러나 왕과 관료들은 일본에 맞서기보다는 자신들의 안위를 도모하기 위해 도망가거나 일본에 붙어버렸다. 그리고 일본의 의도대로 의병들의 자진 해산을 권유하였다. 이에 유생이 의병장으로 있던 의병부대는 왕과 맞서는 것은 불충이며 역모를 꾀하는 것과 같다며 스스로 부대를 해산시키고 관군에게 투항하였다. 기우만도 성리학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 유생 의병장 중의 하나였다. 기삼연은 진정한 충()은 해산이 아니라 일본군과 맞서 싸우는 것이라고 강력하게 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결국 기삼연은 일본군과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투옥된 뒤 실의에 빠져 힘든 시기를 보내야했다.


하지만 1907년 고종이 강제 퇴위당하고 군대가 해산되자, 기삼연은 다시 한 번 의병을 일으켰다. 을미의병의 실패를 거울삼아 호남창의회맹소(호남 의병 연합부대)를 만들어 호남의병을 체계적인 관리하고 운영하였다. 또한 선전효과를 잘 알고 있던 기삼연은 대한매일신보에 글을 보내 의병을 도와달라고 호소하였다. 그 결과 호남창의회맹소의 의병부대는 전남 영광을 비롯하여 호남 전역에서 일본군에 맞서 큰 전적을 올리며 민족의 자긍심을 드높였다.


기삼연이 중심이 된 호남창의회맹소가 맹위를 떨치자, 일본군은 의병을 폭도라 규정하고 폭도토벌대를 편성하여 호남 지역을 유린하였다. 군사적으로 우월했던 일본군에 정면으로 맞설 수 없던 기삼연은 의병부대를 여러 개로 쪼개어 소규모로 전쟁을 수행해나갔다. 이 때 기삼연은 300여명의 의병을 데리고 담양으로 왔다.


기삼연은 방어하기 좋은 금성산성에 들어가 의병부대를 전열하고 겨울을 보내기로 하였다. 그러나 이를 눈치 챈 일본군의 급습으로 의병 30여명이 죽고 많이 이들이 부상당하였다. 기삼연도 현장에서 벗어나 기구연의 집에 피신했으나, 추격해온 일본군에게 잡혀 재판도 거치지 않고 광주 서천교 백사장에서 총살당했다. 그러나 그의 정신은 계속 이어져 일제에게 나라를 빼앗기기 전까지 호남 지역은 일제에 맞서 가장 강렬하게 저항한 지역이 된다.


이처럼 금성산성은 나라를 지키고 모두가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만들고자 했던 분들이 목숨을 걸고 싸웠던 격전지다. 금성산성을 향해 출발했을 때만해도 산새와 바람소리에 복잡했던 마음을 내려놓고 즐겁게 걸어갈 수 있었다. 금성산성의 첫 번째 문인 보국문을 통과할 때에는 쉽게 공략할 수 없는 전략적 요충지였겠구나.’ 가볍게 생각하고, 담양의 전체적인 모습을 조망하며 망중한을 즐겼다.


그러나 성곽을 따라 노적봉으로 가는 성곽 길에서 떨어져 다칠까봐 가슴을 졸여야 했다. 조심스레 발걸음을 옮기던 나는 결국 금성산성을 한 바퀴 돌겠다는 다짐을 포기해야 했다. 노적봉으로 향하는 길은 가면 갈수록 길이 좁아져 한명이 지나갈 정도로 비좁은데다 흙으로 인해 신발이 자주 미끄러졌다. 더욱이 성곽 아래는 가파른 낭떠러지인데, 난간과 같은 보호장치가 없어 더는 한 걸음도 내딛을 수가 없었다.


다시 올라왔던 성곽 길을 내려오면서 120여년 전 동학농민군과 의병들이 짚신을 신고 이 곳을 뛰어다녔을 생각을 하니 아찔했다. 성곽길을 걷는 것도 이토록 어려운데, 그 분들은 국가와 민족 그리고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이 길을 뛰어다니셨겠지. 옆에서 쓰러지는 전우를 살리기 위해 자신은 어떻게 되어도 괜찮다는 생각으로 달렸을 선조를 생각하니 숙연해졌다. 산책하듯 즐거운 마음으로 올라오며 바라봤던 금성산성은 근현대사에서 가장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생생한 현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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