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정호 Sep 25. 2019

과천이 숨겨놓은 조선의 역사


과천을 대표하는 정부청사, 서울대공원 등은 광복 이후에 만들어졌다. 그래서일까? 다른 지역과 달리 과천에서 조선 시대 이전의 역사를 떠올리기란 쉽지 않다. 국보나 보물로 지정된 유적지나 유물이 과천에 없기에 인근 사람이 아니라면 모르는 것은 당연할 수도 있다. 하지만 조금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우리가 많이 들어 친숙한 역사의 이야기가 과천에 가득하다.





서울에서 과천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경사가 심하지는 않지만 오르막길을 한동안 올라가야 한다. 그리고 그 정점에는 ‘남태령’을 알리는 표지석이 있다. 원래 이곳은 정조가 다녀가기 이전에는 ‘여우고개’라 불렸다. 너무나 많은 여우들이 사람들을 괴롭혔기에 여우에 대한 좋지 않은 인식으로 만들어진 이야기가 전해져온다.

전설에 따르면 남태령 주변에 사는 천년 먹은 여우가 사람의 모습으로 자주 변하여 사람들을 자주 괴롭혔다고 한다. 이 여우는 소의 탈을 가지고 다니다가 건장한 남성을 만나면 얼굴에 탈을 씌었다. 탈을 쓴 사람은 여지없이 소로 변하여 누구에게도 하소연하지 못하고 논과 밭을 갈아야만 했다. 그러던 중 소로 변한 남자 중의 한 명이 우연치 않게 무를 먹고 사람으로 되돌아올 수 있었다고 한다.





이 전설은 부지런한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목적으로 동화책에 실렸고, 많은 아이들이 읽으며 자랐다. 게으른 아들이 일을 하기 싫어 도망쳤다가 노인이 주는 소의 탈을 얼굴에 썼다가 소가 된다. 소가 되어 쉬지도 못하고 일만 하게 되자, 죽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다. 결국 힘든 생활 대신 죽음을 선택하고 무를 먹었다. 무를 먹고 죽음을 각오했던 아들은 오히려 인간의 모습으로 되돌아왔다. 이후 아들은 자신의 삶을 크게 반성하고, 부모님을 극진히 모시며 잘 살았다고 한다.

‘여우 고개’라 불리던 이곳이 ‘남태령’으로 불리게 된 데에는 정조와 깊은 연관이 있다. 정조는 아버지 묘가 있는 융릉을 가기 위해 남태령을 늘 넘어 다녔다. 많은 사람들의 행렬이 남태령을 넘기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정조는 남태령 정상에 오면 행렬을 멈추고 신하들을 쉬게 하였다. 정작 큰 힘을 들이지 않고 올라온 정조는 무료한 시간을 보내기 위해 이곳의 이름이 무엇이냐고 신하들에게 자주 물었다.





그럴 때마다 이방이던 변씨가 ‘남태령’이라고 거짓 대답을 계속하였다. 거짓을 계속 듣던 한 신하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왕을 능멸하고 있다고 정조에게 고했다. 이에 이방 변씨가 왕에게 여우고개라는 저속한 말을 하기가 어려워, 삼남대로로 통하는 첫 번째 큰 고개란 뜻으로 남태령(南泰嶺)이라 속였다고 사실을 털어놓았다. 이에 정조는 이방 변씨를 크게 칭찬하였고, 그 뒤로 여우고개 대신 남태령으로 오늘날까지 불리고 있다.

융릉을 자주 오가던 정조는 과천의 객사에서 자주 머무르며 휴식을 취하였다. 관악산 아래에 위치하여 푸르른 산과 시원한 하천을 볼 수 있는 과천 객사는 정조의 답답하던 마음을 잠시나마 풀어주는 공간이었다. 그래서 정조는 매서운 바람이 불던 1790년 2월 서울로 돌아가던 중 과천 객사에 머물면서 ‘경치가 좋고 쉬어가기에 편하다’라는 뜻의 온온사(穩穩舍)를 고쳐 불렀다. 그리고 과천 동헌은 옛 과천의 별호였던 부림헌(富林軒)이라 부르며 친히 편액을 썼다. 이후로 과천객사는 온온사로 불리게 되었다.





객사(客舍)라고 하는 것은 객관(客館)이라고도 부르는데, 조선 시대 여러 역할을 담당하였다. 객사에는 임금을 상징하는 나무패인 전패(殿牌)를 모셔놓고, 수령이 초하루와 보름에 달을 보며 궁궐을 향해 절을 올렸다. 이를 향궐망배라고 한다. 즉, 왕을 대신하여 백성을 돌보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도록 의식이 행해지던 곳이다. 객사는 향궐망배하는 날이 아니라면 보통 외국 사신이나 공무로 이동하는 관리들의 숙소로 사용되었다. 또한 왕의 교지(敎旨)를 전달하는 장소이기도 했다. 그래서일까? 객사는 관찰사가 일을 보는 동헌보다 격이 높았다.

과천 객사는 인조 27년인 1649년 여이홍이 동헌을 세우고, 현종 7년인 1666년 남창조가 서헌을 건립하여 객사로서 기능을 이어왔다. 그러나 1895년 갑오개혁이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과천군 청사로 용도가 변경되어 사용되었다. 일제강점기에는 과천면사무소로 사용되며 객사의 건물이 유지되었으나, 1932년 기존 건물이 완전 해체되고 새로 지어졌다.





1980년 온온사가 경기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고, 1986년 해체 복원하는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하였다. 일제에 의해 해체되면서 온온사의 옛 모습 기록마저 사라져버린 것이다. 결국 전남 승주군 낙안객사의 모습을 본 떠 정면 9칸, 측면2칸 규모의 온온사를 재현해놓을 수밖에 없었다. 온온사가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는지 확인할 수 없는 상황이 아쉽지만, 그래도 다른 지역에 남아있는 객사를 모델로 해서 지어졌다는 말에 위안을 삼아본다.

온온사에 들어가면 커다란 은행나무를 마주하게 된다. 수령 600년에 나무의 높이만 25m에 달하는 고목이지만, 아직까지 푸름을 잃지 않고 건강하게 서있다. 그 보호수 아래로 역대 현감 비석군이 보인다. 원래부터 이곳에 있던 비석이 아니라 도로변에 세워져 있던 비석을 옮겨놓은 것이다. 정조 때 현감으로 왔던 정동준의 비석부터 1928년 변성환에 이르기까지 15명의 비석이 보존되어 있다. 남원 광한루에 비석들이 모여 있는 이유처럼 과천의 규모가 커지면서 비석들도 제 자리를 잃고 이곳으로 흘러들어온 것이다. 과거의 모습이 보존되기를 바라는 사람으로서는 이렇게라도 유적들이 보존되는 것에 감사함을 느낀다.





현재 온온사에서 과천시민을 위한 문화공연이 종종 열린다. 생각보다 넓진 않지만 여러 사람들이 모여 공연을 접하는 것은 애향심을 키우는데 있어 매우 바람직한 일이다. 또는 문화행사가 아니더라도 한가로이 온온사의 경내를 걸으며 사색에 잠기거나 담소를 나누어도 좋다. 나무로 둘러싸인 조선의 객사 온온사는 번잡했던 삶으로부터 잠시 벗어나 여유로움을 나누어줄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호남 의병의 정신이 기린 금성산성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