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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호 Oct 06. 2019

공주를 대표하는 공산성


충남 공주는 최근 여행지로 크게 각광받고 있다. 무령왕릉, 마곡사 등 역사적인 장소와 함께 예쁜 사진을 찍을 수 있는 한옥마을 그리고 맛있는 음식으로 가득한 산성시장까지 볼거리와 먹을거리가 풍부하다. 이중에서도 백제가 수도 공주를 지키던 공산성은 꼭 가봐야 할 명소다. 공주의 역사를 모두 품은 공간이자 아름다운 전경을 감상할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공산성은 해발 110m의 공산을 기점으로 동서 800m 남북 400m의 긴 성곽을 가지고 있다. 금강과 차령산맥을 1차 방어선으로 삼고, 공산성을 2차 방어선으로 삼아 적을 맞이했기에, 예로부터 공주를 백제 문주왕에서부터 조선의 인조까지 여러 왕들이 피난처로 삼았다. 공주로 도망쳐 재기한 왕도 있지만, 비운의 왕으로 전락한 왕들의 역사가 바로 공산성에 기록되어있다.

공주가 역사의 중심지로 등장한 것은 문주왕(재위 475~477)이 백제의 수도를 천도하면서다. 문주왕은 장수왕이 이끄는 고구려군을 막아내기 위해 신라 원군 1만 명을 데려오지만, 아버지 개로왕이 죽었다는 말에 급히 공주로 발길을 돌렸다. 적은 군대로 장수왕이 이끄는 고구려군을 막아내기에 이곳만큼 적당한 곳이 없었다. 또한 금강을 통해 서해로 빠져나가 중국·일본과 교류 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공주는 최적의 장소였다.

문주왕은 대두산성을 쌓고 한강에 있던 백제인을 데려왔으나, 왕권은 매우 미약해져 병관좌평 해구에게 살해되고 만다. 문주왕을 뒤를 이어 13살이던 삼근왕이 즉위하며 불안했지만, 점차 안정을 취하면서 백제는 중흥의 발판을 마련하게 된다. 5대 64년간 백제의 수도로서 어려운 시기를 극복할 수 있었던 중심에 바로 난공불락의 공산성(백제 시대에는 웅진성이라 불림.)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공산성 내부를 걷다보면 왕궁터와 왕궁터 연못을 만날 수 있다.





성왕이 백제의 중흥을 위해 사비(충남 부여)로 수도를 옮긴 다음에도, 공주는 제2의 수도로서 고구려와 신라의 공격을 막아내는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그러나 어떤 누구도 공주가 백제의 마지막 수도가 될지는 몰랐다. 백제의 의자왕은 나·당 연합군의 공세를 이겨내지 못하고, 공주로 급히 도망쳐왔다. 이곳은 부여와 가깝기도 했지만, 아직 정복되지 않은 지역의 백제군대가 집결하는데 충분히 시간을 벌 수 있는 장소였기 때문이다. 의자왕은 공산성에서 숨을 돌리며 백제의 귀족들에게 도움의 전령을 보내려 했으나, 공산성의 성주였던 예식진의 배반으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예식진에 의해 사로잡힌 의자왕은 공산성에 들어온 지 닷새 만에 포로의 신세가 되어 중국 당나라로 끌려가야 했다.

예식진의 배반이 백제인의 모든 뜻이 아니었다. 예식진이 당나라에게 좌위위대장군을 받으며 호위 호식했을지 몰라도, 많은 백제인은 끌려가는 의자왕의 뒤를 눈물을 흘리며 쫓아갔다. 그리고 공산성을 발판삼아 부흥운동을 벌였다. 4년간의 백제부흥운동은 한 때 200여 성을 회복할 정도로 거셌지만, 부흥운동군 내부의 분열로 막을 내린다. 이후 공산성은 신라가 백제 지역을 관리하는 거점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하지만 공주 지역은 신라에 대한 반감이 오래도록 지속된 것 같다. 아버지 김경신이 왕의 자리에서 밀려나면서 외직으로만 돌던 김헌창이 822년 신라를 거부하고 새로운 나라를 세우겠다고 공산성에서 천명하자 많은 이들이 동참했다. 김헌창은 한 때 9주 5소경 중 4주 3소경을 장악했으나, 한 달 만에 신라군에 의해 진압되고 만다. 김헌창은 공산성에서 열흘넘게 저항했으나, 대세가 기울었음을 확인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후 공주는 도읍지로서 거론되지 않는다. 이것은 고려부터 진정한 삼한통일이 이루어지면서 하나의 민족이라는 개념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고려와 조선시대의 공주는 외세의 침략에 맞서 우리를 지키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임진왜란 당시 승병들은 공산성에서 왜군을 맞아 싸울 준비를 하였다. 이들은 영규 스님을 따라 전라도의 곡창지대를 빼앗으려는 왜군을 맞아 금산전투에 임했다. 당시 조헌이 이끄는 700여명의 의병과 영규가 이끄는 600여명의 승병은 1만이 넘는 왜군을 맞아 한 치의 물러섬도 없이 용감하게 싸우다 모두 전사했다. 이들의 숭고한 희생으로 왜는 전라도를 확보하지 못하고 고전하게 된다.





하지만 조선 선조는 임진왜란을 명의 도움으로 극복했다 여겼기에 공산성 임류각 앞에 공주를 지키는데 큰 공을 세운 명나라 장수 이공, 임제, 남방위를 기리는 명국삼장비를 세워두었다. 승병을 기리는 비는 세우지는 않으면서도 승병의 중요성을 인식했는지, 이후에도 공산성에서 승병을 양성하도록 힘을 기울였다.

조선의 인조도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공주 공산성으로 급히 피난을 내려왔다. 공산성에 몸을 보신한 인조는 무척이나 억울하고 답답했나보다. 공산성에 있던 두 그루의 나무를 붙잡고 매우 서럽게 울며 미래를 걱정했다고 한다. 그렇게 자신의 이야기를 묵묵히 들어주던 나무가 얼마나 고마웠던지, 이괄의 난이 진압된 후 정3품의 대부작을 내려주었다. 현재 두 그루의 나무가 있던 자리에는, 영조 10년 관찰사 이수항이 죽은 두 나무를 기리며 지은 쌍수정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와 함께 조선 시대 공주 사람들은 자신들의 고장에 인조가 한 동안 머물렀다는 사실이 매우 자랑스러웠는지 인조 이후 공산성을 쌍수산성이라 불렀다.

공산성에는 인조와 관련된 재미난 설화도 내려온다. 인조가 공산성에 머물 때 한 농부가 떡을 해다 갖다 바쳤는데, 그 떡이 너무도 맛이 났다. 이에 인조가 떡의 이름을 신하들에게 물었으나 임씨 성을 가진 사람이 갖다 바친 것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였다. 이에 인조는 임씨가 갖다 바친 떡이라는 사실에 착안하여 임절미라 불렀고, 이것이 오늘날 한국인 모두가 좋아하는 인절미가 되었다.





공산성은 이처럼 백제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많은 역사를 품고 있다. 그러나 역사에 관심이 없더라도 공산성은 아름다운 전경을 가지고 있어, 여행의 재미를 크게 준다. 복원된 금서루는 공주를 방문하면 필히 인증 샷을 찍어야 하는 장소이며, 금서루로 올라가는 길목의 수많은 비석들 또한 공주에 흩어져있던 선정비들을 모와 둔 것으로 풍취를 느낄 수 있다.

공복루로 향하는 성곽 길에서 유유히 흐르는 금강과 함께 백제큰다리를 보고 있자면 마음이 평온해진다. 이 외에도 연회장소로 쓰이던 임류각, 임진왜란 당시 조선군을 도와 승리를 이끈 산신령이 머문다는 영은사 등 공산성에는 볼거리가 매우 풍부하다. 2.2km가 넘는 성벽길을 가진 공산성을 제대로 보기위해서는 한나절의 시간을 비워놔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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