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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호 Oct 25. 2019

현재와 공존하는 낙안읍성


전라남도 순천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명소로 이름을 알리고 있다. 사람들이 순천을 찾는 이유는 다양하지만, 역사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현재와 공존하는 낙안읍성이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우리나라의 경우 산이 많다보니 방어시설로 산성이 많이 존재한다. 반면 평지에 성을 쌓고 적의 침입을 막아내는 읍성은 쉽게 찾아보기 어렵다.





낙안읍성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산성에서 보기 힘든 해자(물을 가두어 적군의 침입을 막는 방어시설)와 함께 옹성, 치와 같은 방어에 필요한 구조물을 쉽게 관찰할 수 있다. 더욱이 오늘날까지 옛 모습을 지키며 살아가는 현지인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고마운 일이다.

그래서일까? 연간 120만 명이 낙안읍성을 보러 찾아온다. 이곳에서 타임머신을 타고 조선시대로 돌아가는 체험을 통해 선조들의 삶을 간접적이나마 체험하고 만족을 느끼며 돌아갈 수 있다. 또한 낙안읍성에 거주하는 현지인들의 따뜻한 인사와 미소는 우리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준다.

낙안읍성이 위치한 지역은 마한 시대 소국이 자리할 정도로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마한 54개의 소국에 대한 이름과 기록이 많지 않다보니, 2,000년 전 이곳에 살던 삶이 어떠했는지 짐작하기는 어렵다. 다만 지리적으로 농업과 어업이 잘되어 풍요로운 삶을 살아가며, 바다를 통해 주변 여러 나라와 교류를 통해 성장했을 것이다.





백제에 편입된 낙안은 파지성(把知城)으로 불리며 가야와 신라로부터 호남평야의 곡창지대를 막아내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백제가 멸망한 후, 당은 이곳에 분차주(分嵯州)를 설치하여 그들의 영토로 삼으려하였다. 하지만 그들의 뜻대로 되지는 않았다. 통일 신라는 당의 세력을 쫓아냈고 분령(分嶺)이라 부르며 신라의 영토로 만들었다.

낙안이란 이름이 붙여진 것은 이로부터 시간이 한참 흐른 고려 태조 때인 940년이다. 고려는 북방 민족의 침입을 많이 받았으나, 말기에는 남쪽으로 왜구가 빈번하게 침입하였다. 낙안도 예외일 수 없어서 1397년 김빈길 장군이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 낙안에 토성을 쌓으며 읍성이 만들어졌다.





그러나 낙안읍성은 김빈길 장군에 대한 기록보다는 임경업 장군(1594~1646)과 관련된 이야기가 유명하다. 내려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임경업 장군은 성을 쌓고, 누이는 베를 짜서 옷 만드는 내기를 벌였다고 한다. 임경업 장군은 누이를 이기기 위해 낙안읍성 뒤에 위치한 금전산에 올라 커다란 바위를 한 칼에 잘라 옮길 정도로 성을 열심히 쌓았다. 누이는 이미 옷을 다 만들었지만 굵은 땀을 흘리며 성을 쌓는 동생의 기를 살리기 위해 일부러 옷고름을 달지 않고 져주었다고 한다. 또 다른 이야기에서는 누이가 군복을 짓기로 하였는데, 누이는 임경업 장군이 내기에서 지면 군대 사기가 저하될까봐 일부러 여러 번 군복의 옷고름을 풀며 졌다고 한다.

사실 임경업 장군이 낙안읍성에 오래 있었던 것은 아니다. 1626년에서 1628년까지 낙안 군수로 재직했을 뿐이다. 3년이 안 되는 짧은 기간이었지만, 낙안 백성에게 누구보다 훌륭한 군수로 기억되었다. 1628년 임경업 장군이 떠나자 마을 사람들은 임경업장군비각을 세웠고, 임경업 장군이 죽은 후에는 정월 보름이면 마을의 수호신으로 여기고 제사를 지내고 있다.





낙안읍성은 토성으로 시작했지만, 중축을 통해 돌로 지어진 석성이 되었다. 낙안읍성은 남북보다 동서가 더 긴 직사각형의 모습으로 길이가 1,384m에 달하는 큰 성곽을 가지고 있다. 또한 성곽의 폭이 넓어 여러 명이 함께 걸어도 부딪치지 않을 정도로 넉넉함을 가지고 있다. 무엇보다 성곽길이 갖는 매력은 초가집으로 가득한 낙안읍성을 내려다볼 수 있다는 점이다. 또한 낙안읍성을 둘러싼 주변 환경도 한눈에 담을 수 있다는 점도 좋다.

그래서 낙안읍성에 방문하면 꼭 성곽 길을 걸어야한다. 성곽이 자연 지형을 그대로 이용하여 건축되다보니 높낮이가 제각각이어서 멈추는 곳마다 낙안읍성의 다른 모습을 볼 수 있다. 초가집 사이로 오순도순 이야기를 나누며 걷는 관광객과 그들을 상대로 음식과 물건을 파는 현지인이 보인다. 분잡한 읍성하고는 무관한 듯 성 밖에서는 볏짚을 쌓고 있는 농부의 모습이 인상적으로 다가온다. 그리고 멀리 보이는 논과 산을 보며 한적한 시골의 정취를 느끼기도 한다. 만약 고소공포증이 있다면 남문에서 서문으로 가는 방향으로 성곽길을 걸으면 좋다.





성곽 길을 다 걸었으면 읍성의 초가집 사이를 걸어야한다. 되도록 입구에서 깊이 들어와 동헌과 객사를 둘러보고 대장금 세트장을 지나 옥사가 있는 방향으로 관람하면 좋다. 1636년에 지어진 객사와 관아는 이곳에 조선시대 인근 지역의 중심지였음을 보여주는 역사를 보여준다. 그러나 정작 낙안읍성의 핵심은 객사에서 남문으로 가는 길목에서 만나는 초가집들이다. 민속촌처럼 보여주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사람이 실제로 거주하는 초가집이기 때문이다.

현재 낙안읍성에는 98세대 228명이 초가집에서 거주하고 있다. 주소가 적혀있는 초가집은 이곳이 가족들의 소중한 보금장소이며, 생계를 유지하는 삶의 터전임을 보여준다. 가전제품이 있고, 빨래가 널려있는 초가집은 아이들의 눈에도 매우 신기하게 비쳐지며 매우 좋아한다. 그리고 작은 동물원에는 토끼와 같은 작은 동물이 있어, 마음껏 보고 먹이를 줄 수 있는 체험을 할 수 있다.





무엇보다 나에게 제일 인상 깊었던 것은 초가집 지붕을 얹는 모습이었다. 마을 주민이 지붕에 올라 두런두런 삶의 이야기를 나누며 이엉을 잇는 모습은 굉장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영상을 통해서만 접하던 모습을 실제로 보니, 나에게 큰 복이 내려진 느낌이었다. 하지만 이엉을 잇는 분들의 연세가 적지 않음에, 소중한 전통 문화가 얼마나 지속될까하는 걱정도 밀려왔다. 이런 나를 향해 낙안읍성이 어떠냐고 물으시며, 어린 두 딸이 좋아할 만한 작은 동물원의 위치를 웃으며 알려주는 그분들의 모습에 나의 생각이 기우였음을 아는 것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낙안읍성은 이외에도 동학농민운동의 주역이었던 김개남이 이끄는 농민군 이야기, 일제의 만행, 여수·순천사건 때 민간인이 무고하게 희생된 아픈 역사가 어려 있다. 그러나 지금의 낙안읍성은 과거의 아픔을 이겨내고 희망의 역사를 써내려가고 있다. 더불어 힐링을 위해 찾아오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행복을 나누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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