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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호 Nov 19. 2019

봉선사 = 한글 = 하나




2010년 유네스코 총회에서 생물권 보전 지역으로 지정한 광릉에 가면 아름다운 한글과 깊은 연관이 있는 봉선사를 만날 수 있다. 봉선사는 고려 광종의 왕사였던 법인국사 탄문이 969년 ‘운악사’로 창건하면서 시작되었다. 탄문이 화엄종의 큰스님으로 호국불교를 대표하는 인물이었던 만큼 봉선사는 왕실과 깊은 연을 맺고 있다. 개창 이후 천년이 넘는 오랜 시간동안 자리를 지켜오면서 봉선사는 많은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다. 특히 한글과 관련된 이야기가 눈길을 끈다.


한글과 봉선사의 첫 번째 만남은 세조다. 세조는 왕자시절 세종을 도와 한글 창제에 많은 힘을 기울였다. 왕이 된 이후에는 ‘간경도감’을 설치하여 <묘법연화경> <금강경> 등의 불교 경전을 한글로 번역하고 출간하였다. 세종이 한글 창제라는 거대한 업적을 보였다면, 세조는 한글 보급이라는 대단히 어려운 일을 해냈다.




글이란 사람들이 사용해야 살아 숨을 쉬게 된다. 아무리 좋은 물건을 만들어도 사용되지 않으면 사장되는 것처럼, 불교를 이용해 한글을 보급시킨 것은 매우 훌륭한 전략이었다. 조선이 유교국가로 변모했어도 불교는 여전히 민중들의 마음을 다독여주는 종교였다. 불교에는 당시 사람들의 염원이 담겨있었다. 세조는 어려운 한자로 쓰인 불경을 한글로 번역하여 백성들을 다독여주었다. 백성들은 한글로 된 불경을 접하면서 마음의 안정을 취하고 새로운 내일을 준비할 수 있었다. 세종이 한글을 통해 백성들을 다독여주던 따뜻한 마음은 세조에게 전해졌다. 비록 정상적이지 못한 방법으로 왕이 되었지만, 누구보다 백성을 생각하고 위해주던 세조였다.

세조가 세상을 떠나자 정의왕후는 남편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고민을 했다. 정의왕후에게 있어 세조는 누구보다 강인했던 남자였지만, 늘그막에는 죄책감으로 힘들어하던 불쌍한 남편이었다. 그래서 세조가 저승에서는 마음 편히 지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운악사를 봉선사로 이름을 바꾸며 사찰 중창에 힘썼다. 이때 정의왕후가 심었던 느티나무가 아직도 살아남아 푸른 잎을 틔우고 있다. 세조의 둘째아들이었던 예종도 아버지의 명복을 기원하며 동종을 제작하고, 봉선사 현판을 직접 썼다. 지금은 동종만이 남아 보물로 지정되어있다.


왕을 위해 중창된 봉선사는 숭유억불 정책에서도 살아남았다. 특히 불교를 숭상했던 문정왕후는 봉선사를 교종의 수사찰(대표사찰)로 삼으며 승과시를 치르는 장소로 활용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조선 왕조가 힘을 잃으면 봉선사도 함께 무너져내렸다. 월초화상(1858~1934)이 1893년 총섭의 자리에 올라 전국의 승군을 총괄하며 기울어져 가는 조선을 잡으려 하였으나, 1894년 갑오개혁에서 승군제도가 폐지되면서 봉선사도 함께 기울어졌다. 하지만 사라지지는 않았다. 마치 조선 시대와 일제강점기 내내 멸시와 박해를 받으면서도 민중들의 마음과 얼을 담았던 한글처럼 말이다.

광복 이후 운허스님이 봉선사에 들어와 대장경을 한글로 번역하는 중대한 일을 진행하였다. 일제의 지배를 받으며 상처 입은 우리 민족의 마음을 어루만져주기 위해서 말이다. 한글이 가진 엄청난 힘을 알고 있던 운허스님은 봉선사 대웅전을 일반 사찰과는 달리 한글로 된 ‘큰법당’ 현판을 달았다. 그리고 광복을 맞이한 대한민국과 불교가 크게 발전하기를 바라며 스리랑카에서 부처님 사리 1과를 가져와 5층 석탑에 봉안하였다. 이와 함께 뛰어난 천재 작가였지만 대표적 친일작가였던 이광수를 봉선사에 머물게하며 대장경 한글 번역 작업에 참여시켰다.

운허스님은 친척인 이광수가 불경을 번역하면서 잘못된 과거 행적을 뉘우치고 죗값을 조금이라도 치루기 바랐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광수는 운허스님의 뜻과는 달리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지 않았다. 자신의 글재주를 이용해 독립운동가들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고자 했다. <원효대사>, <꿈>과 같은 불교소설을 집필하고, 한문으로 쓰인 <백범일지>를 한글로 옮기는 과정에 참여하였다. 1947년도에는 <도산 안창호>를 출간했다. 그러나 1949년 자신의 친일 행각을 합리화하는 핑계를 담은 <나의 고백>을 출간하며 반성의 기미를 보이지 않다가, 1950년 7월 납북되어 죽는다.

봉선사는 이광수의 친일행각과 구분지어 대장경 한글 번역에 도움을 준 것에 대한 감사의 표현으로 이광수 기념비를 세워두었다. 또한 그를 용서하고 받아들이는 모습이 진정한 자비임을 보여주고자 했다. 그러나 이광수 기념비를 바라보는 나의 마음 한 켠에는 이광수의 잘못을 적어놓은 비석도 같이 세워두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이런 무거움과는 달리 봉선사는 가볍게 연못을 산책하고 찻집에서 여유로운 시간을 가져도 좋을 만큼 멋진 풍경을 품고 있다. 다른 사찰에서는 보기힘든 대의왕전과 관음상이라는 독특한 보물도 만날 수 있다. 일반 사찰에서 인간의 건강과 수명을 관장하는 약사불을 모신 약사전이 있는데 반하여, 봉선사는 정자에 약사불을 모셔놓았다. 약사불은 신도들이 기부한 성금으로 금을 입혔는데, 얼굴부분에 금이 없어 더욱 눈길이 갔다. 아직 완성이 되지 않은 것인지, 일부러 금을 입히지 않은 것인지 궁금증을 자아낸다.

봉선사의 다른 보물 하나는 관음상이다. 천주교 신자인 최종태 조각가가 만든 관음상은 법정스님이 계셨던 길상사 관음상과 형태가 같다. 자야 김영한이 법정스님에게 시주한 길상사는 종교의 차이를 극복하고 사람을 위한 종교가 되기를 희망하는 마음을 담아 제작된 관음상이 있다. 봉선사에도 똑같은 관음상이 있는 것은 한글을 통해 우리가 하나임을 되새기며,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만들고자 하는 의미가 아닐까?



불경을 한글로 제작하고 보급했던 봉선사는 과거에도 그러했듯, 앞으로도 우리가 하나가 되는 큰 세상이 이루어지기를 바라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광릉에 묻힌 세조를 위한 사찰이 아니라, 백성을 사랑하고 아꼈던 마음으로 한글을 만들고 보급했던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봉선사는 존재한다. 시간이 된다면 광릉과 봉선사를 한글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둘러보고, 책 한권 읽고 오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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