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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호 Nov 03. 2018

세상의 중심이 우리나라임을 보여준 화엄사 각황전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지리산에는 수많은 사찰이 자리 잡고 저마다의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전라남도 구례에 위치한 화엄사는 으뜸을 차지할 정도로 많은 이야기와 유물을 보유하고 있다. 어느 가을날 지리산을 종주하고 화엄사에서 탬플스테이를 하며 하룻밤 묵었던 화엄사는 나에게는 특별함으로 다가오는 사찰이다. 


화엄사는 인도 승려 연기가 백제 성왕 22년(544)에 창건하여 법왕(재위 599~600)때에는 3,000여명의 승려가 거주했다. 선덕여왕 14년(645)에는 신라의 승려 자장율사가 부처님의 진신 사리를 화엄사에 모시고, 4사자 3층석탑을 세우며 중수했다. 그런데 선덕여왕 시절은 백제와 치열한 전쟁을 치르며 양국의 관계가 최악으로 치닫던 상황이었다. 그런데 신라 승려가 백제 지역의 사찰을 중수했다는 것이 쉽게 이해되지는 않아 학계에서는 이를 두고 많은 논란이 있었다. 또한 의상대사가 장륙전(현재 각황전)을 세우면서 화엄경을 벽에 새겼다고 하는데, 화엄경 역시 원성왕 13년(797)이 되어야 번역되었기에 화엄사에 대해 여러 말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이 문제를 해결한 것은 황룡사지 발굴에서 출토된 <신라백지묵서대방광불화엄경(新羅白紙墨書大方廣佛華嚴經)> 발문이었다. 발문에서 경덕왕(재위 742~765) 시절 황룡사 승려였던 연기가 화엄경사경을 완성시켰다고 밝히면서 화엄사의 창건이 500년대가 아닌 700년대로 뒤로 밀려나게 되었다. 또한 원효, 의상, 자장대사와 관련된 이야기들도 후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창작물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그러나 역사적 사실과 다른 이야기일지라도 그 속에는 많은 사실과 가치가 담겨져 있다. 전설과 설화에는 후대 사람들의 생각과 염원이 반영되어 있기 때문이다. 화엄사는 이름에서부터 화엄종과 깊은 연관을 가진 사찰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화엄종은 불교 종파에서도 왕과 지배층이 권력을 갖는 것에 대한 정당성을 가장 뒷받침해주는 종파다. 화엄종의 가장 큰 핵심이 “일즉다 다즉일(一卽多 多卽一)” 사상으로 “하나인 것이 모두요, 모두가 하나다”로 해석된다. 이 사상을 왕과 지배계층의 입장에서 풀이해보면 “왕이 곧 국가요, 국가는 왕이 있어야 존재한다.는 논리가 된다. 





신라왕이 스스로 전륜성왕으로 자처하며 불국토를 만들어 부처님의 뜻을 펼치겠다 공언하는 가운데 화엄종은 백성들에게 왕이 꼭 필요한 존재라는 인식을 심어주는데 충분했다. 그리고 이러한 움직임은 신라가 화엄종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육성하는 결과를 낳았다. 


그런 시대적 배경을 바탕으로 600년대 중반에는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큰 스님들이 나오게 된다. 바로 자장대사, 원효대사, 의상대사 세 분이다. 이 분들은 모두 화엄종의 대가였는데 자장대사는 문헌상으로 보면 636년 당나라 오대산에서 문수보살을 만나 화엄의 진리를 깨닫고 신라에 들어와 “화엄경”을 처음으로 강설했다고 한다. 원효대사도 화엄 사상을 크게 이해하고 “화엄경종요”와 “화엄경소”를 저술하여 가르침을 남겼다. 


그러나 화엄종하면 우리는 해동화엄종의 개창한 의상을 떠올리게 된다. 661년 중국 당나라에 유학을 간 의상은 중국 화엄종의 제2조였던 지엄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아 깨달음을 얻은 뒤 671년 신라로 귀국했다. 의상 대사는 낙산사에서 관세음보살을 만나고 부석사를 세워 화엄사상을 널리 펼치고자 했다. 의상대사가 저술한 책은 많이 남아있지는 않지만 “화엄일승법계도”는 화엄종의 정수로 화엄사상을 모두 담고 있다. 


세 분이 가지고 있는 큰 공통점을 중국의 불교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지 않고, 우리의 정서와 문화를 반영시킨 한국 불교를 만들어냈다는 점이다. 이를 뒷받침하는 이야기가 국보로 지정된 화엄사 각황전에 내려온다.

의상대사가 중국 화엄종을 계승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지만, 당나라 고종이 신라를 침략한다는 사실을 접하게 되자 귀국을 결심하고 신라로 돌아왔다고 삼국유사는 밝히고 있다. 이는 의상대사가 개창한 화엄종이 호국불교의 성격을 갖고 있음을 알게 해준다. 이후 의상 대사는 신라 왕실의 지원을 받으며 많은 사찰을 세우고 화엄종의 진리를 강연하러 다녔다. 의상대사는 당나라로 유학길을 떠났던 원효 대사에게도 자신이 깨달은 바를 알려주려했으나, 원효대사는 이미 화엄사상을 꿰뚫고 통달해 있었다. 





중국에서 화엄 사상을 배워 신라에서 최고라 생각했던 의상 대사는 너무 놀라며 원효대사에게 어찌 화엄 사상에 대해 이리 잘 아냐고 물었다. 이에 원효대사는 이미 130여 년 전에 인도의 연기조사가 지리산 밑에 화엄사를 세워 삼한에 부처님의 뜻을 가르치고 있었노라 말했다. 이어 자신은 중국의 화엄사상이 아닌 인도의 화엄 사상을 직접 배워 깨달음을 얻었다고 말하며, 삼한을 위해서는 의상대사도 천축국의 화엄사상을 배울 필요가 있다고 말을 했다. 


이에 의상 대사는 한동안 말이 없이 깊은 생각에 잠겨 있다가, 직접 화엄사로 가서 자신이 익히고 깨달을 것과 비교해보겠다고 달려간다. 의상대사가 화엄사에서 중국에 뒤처지지 않으면서도 자주적인 성격을 가진 우리의 화엄 사상을 보고 신라만의 화엄종을 만들겠다는 다짐을 하게된다. 그 다짐의 표현으로 3층의 장육전을 세워 황금장육불상을 모셨다. 장육이란 부처님의 몸을 의미하는 것으로 부처님의 진리를 담은 화엄경을 돌에 새기면서 화엄사를 해동 화엄종의 시작으로 삼겠다는 의지를 담았다. 그리고 전국에 신라가 해동화엄종의 시작이며 불국토임을 보여주기 위해 화엄 사상을 근본으로 하는 사찰을 많이 세우게 된다.


화엄사가 의상대사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지만, 장육전 사방 벽에 화엄경을 새겨놓은 돌이 있었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임진왜란 당시 불타버린 화엄사를 중건하는 과정에서 나온 석경(화엄경이 적인 돌) 1,500여점이 각황전과 동국대학교에 보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각황전과 관련된 내용은 우리나라에 불교가 전래되면서 호국불교로의 성격을 지니게 되었음을 잘 보여준다. 자장, 원효, 의상 대사는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이후 당나라의 침략을 받던 시기에 살던 분들이다. 영토, 경제, 군사적 외에도 문화적인 측면에서 당나라에 열세일 수밖에 없었던 신라로서는 자주국으로 살아가기 위해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한 마음 한 뜻으로 참여해야 했다. 이는 깨달음을 얻어 해탈을 얻고자 하는 승려도 예외일 수 없었음을 보여준다.




이런 모습은 이후 불교계가 국난이 있을 때마다 적극적인 참여를 하는 선례를 만들게 된다. 임진왜란 당시 화엄사에서 불도를 닦던 승려들이 왜군을 맞아 의병활동을 벌이며 큰 승리를 거두자, 이에 화가 난 왜군들이 화엄사를 불 질러 버렸다. 이 때 화엄사가 폐허가 되면서 소중한 많은 문화 유산이 불타버렸다. 


그러나 훗날 벽암대사가 인조 때에 다시 중건하면서 화엄사는 다시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되었다. 이후 왕실의 후원으로 화엄사의 가장 핵심이 되는 장육전이 세워지자 숙종은 직접 각황보전이라는 편액을 내리면서 오늘날 각황전이 되었다.


화엄사의 각황전을 보면서 불교의 모습보다는 우리나라가 거대한 중국 옆에서 어떻게 독자적인 문화를 지켜왔는지 보게 된다. 중국은 수준높은 문화로 주변 민족을 중국으로 흡수하며 오늘날 거대한 문명권을 형성했다. 하지만, 중국이 흡수하지 못한 나라가 있으니 바로 우리다. 우리 선조들은 우리에게 부족하거나 없는 선진 제도나 문화를 중국에서 받아들였지만, 우리의 전통과 문화에 맞춰 받아들였다. 그리고 우리의 것으로 만드는데 그치지 않고 중국보다 더욱 발전시켰다. 화엄사의 각황전은 우리가 중국의 속국이 아니라 자주적인 나라임을 보여주는 것에 그치지 않고, 세상의 중심이 우리임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소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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