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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호 Oct 19. 2018

슬픈 전설이 내려오는 춘천 청평사

   

상사뱀과 공주

춘천은 강원도를 대표하는 관광문화도시로 예전부터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아왔다. 최근 고속도로가 개통되고 ITX청춘열차로 서울에서 춘천까지 이동하는 시간이 짧아지면서 춘천은 볼거리와 먹거리가 더욱 풍성해졌다.


그러나 구관이 명관이라는 말처럼 춘천을 대표하는 유명 장소를 방문하지 않는다면 춘천에 대하여 이야기할 수 없다. 그중의 대표적인 하나가 소양강댐에서 유람선을 타고 들어가야 볼 수 있는 청평사다. 


청평사는 광종 24년(973) 승현선사가 창건했으나 얼마가지 못하고 폐사되었다. 이후 문종2년(1068) 이의가 중건하고 보현원이라 이름을 붙였다. 참고로 고려시대 무신의 난이 일어나는 계기가 되었던 보현원이 아님을 인식해야 한다. 이후 이의의 아들이었던 이자현이 이곳에 은둔하면서 산에 기거하던 도적과 무서운 맹수들이 사라졌다고 하여 산 이름을 청평산(淸平山)으로 바꾸고 보현원을 문수원으로 불렀다. 오랫동안 문수원으로 스님들이 도량을 닦던 이곳을 명종 5년(1550) 불교를 중흥시킨 보우대사가 청평사로 이름을 다시 바꾸었다.



거북바위

이 청평사가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된 이유는 공주와 상사뱀의 전설이 널리 퍼졌기 때문이다. 이 전설은 다양하게 각색되어 시대적 배경이나 인물설정이 조금씩 다르지만, 기본적인 이야기의 골격은 같다. 청평사로 올라가는 길목에서 읽을 수 있는 전설을 소개해본다. 


전설에 따르면 당나라 태종의 딸이 평민출신의 남자와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당나라 태종은 공주가 황실의 망신을 시킨다고 생각하여 남자를 사형에 처해버렸다. 공주를 너무 깊이 사랑했던 남자는 한날한시도 공주와 떨어질 수 없다는 생각에 뱀이 되어 공주의 몸을 감쌌다.


많은 사람들이 뱀을 공주로부터 떨어트리려 했으나 계속해서 실패하자 공주는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신라의 영험스런 사찰이 많으니 필시 해결책이 있을 거라는 말에 태종은 공주를 먼 타국인 신라로 보냈다. 여러 사찰을 돌며 부처님께 기도를 올리던 공주가 청평산 구성폭포 아래 동굴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청평사에 들어가자 뱀이 순순히 공주의 몸에서 떨어져 나갔다. 




부도

공주는 처음으로 뱀이 몸에서 떨어지자 홀가분한 마음으로 계곡에서 목욕을 하고 부처님에게 기도를 드리러 법당에 들어섰다. 밤새 은은하게 들려오는 범종 소리에 취해 공주의 몸에서 잠시 떨어졌던 뱀은 공주가 오래도록 돌아오지 않자 청평사로 공주를 찾으러 들어갔다. 그 순간 하늘에서 벼락이 내리쳐 상사뱀은 그 자리에서 죽고 만다. 공주가 죽은 뱀을 보니 예전에 깊은 사랑을 나누었던 남자에 대한 연민에 상사뱀을 정성스레 묻어주었다. 그리고 부처님의 은덕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석탑을 세우고 뱀을 위한 기도를 올렸다고 한다. 이 덕분에 뱀도 공주와의 인연에서 초탈하여 윤회에서 벗어났다고 한다.


공주에게 붙었던 뱀이 죽었다는 소식에 크게 기뻐한 당나라 태종은 금 세 덩어리를 보내 법당과 공주가 거처할 건물을 세우고, 공주의 귀국 여비를 쓰라고 했다. 그리고 남은 한 덩어리의 금은 훗날 건물을 고칠 때 쓰라고 하며 청평산 어딘가에 묻어두었는데 현재는 금덩이가 묻힌 장소가 어디인지 모른다고 한다. 이 전설이 사실이라면 청평산 어딘가에 커다란 금을 발견하여 큰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이 전설을 증명이라도 하듯 청평사에 올라가다보면 공주가 머물렀다는 동굴을 “공주굴”이라 표시를 해놓았다. 이 외에도 공주가 목욕을 한 웅덩이를 “공주탕”, 청평사내의 삼층 석탑을 “공주탑”이라 부른다. 그리고 상사뱀이 윤회를 벗어난 곳을 “회전문”이라 부르며 사람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청평사로 들어가는 입구

청평사로 올라가는 여러 지명이 상사뱀 전설에 근거해 이름이 붙여진 것이 많다. 그러나 유적으로는 고려시대 이자현(1061~1125)이라는 사람과 관련된 것이 많다. 이자현은 고려 예종 때 사람으로 막강한 권력과 부를 가진 인물이었다. 이자현의 사촌이 이자겸으로 그는 세 딸을 왕후로 만들어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던 인물이었으니 능히 어떤 집안의 인물이었는지를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이자현은 1081년 과거에 급제하여 대악서승에 오를 정도로 탄탄대로의 길을 걷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모든 것을 버리고 아버지 이의가 중건한 보현원을 문수원으로 바꾸고 부처님의 길을 따라 생활하기 시작했다. 예종은 이자현에게 금과 보물을 주면서 올라올 것을 종용했으나 이자현은 한사코 거부했다고 한다. 훗날 예종이 남경에 내려가 만나기를 청하자 이자현은 예종을 만나 욕심을 줄이라는 가르침을 주었다고 한다.


그 이후 인종도 이자현을 초청하여 가르침을 받고자 했으나 한사코 개경으로 올라오지 않았다고 한다. 이에 감복한 인종은 이자현이 병을 얻어 누어있다는 소식에 의원을 직접 내려 보내 간병을 도왔다. 그러나 삶은 하늘에 달린 것이어서 인종 3년인 1125년에 이자현은 세상을 떠났다. 이 때 청평사에서 이자현의 덕을 기리며 부도를 만들었는데, 이것을 “이자현 부도”라 하여 아직도 청평사를 가면 만나볼 수 있다. 그러나 부도의 형태가 조선시대의 양식을 따르고 있어 다른 스님의 부도라는 설도 있다. 





사람들의 기도가 모아진 공간

하지만 과연 이자현이 기록에 남아있는 것처럼 높은 벼슬과 돈을 마다하고 청평사에서 자신의 몸과 마음을 닦으며 지냈는지는 의심스럽다. 이자현이 이자겸의 사촌이라는 점에서 왕조차도 섬겨야 할 존재는 아니었을까 싶다. 이자현이 죽은 1125년은 이자겸의 난이 일어나기 1년 전이다. 인종이 이자겸을 제거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던 역사적 사실을 생각해보면 이자현은 살아있는 동안 큰 권세를 누리며 살았을 가능성이 높으며, 그 덕에 사후에도 좋은 칭송을 받았을 가능성이 높다.


이자현 부도를 뒤로하고 조금만 올라가면 연못(영지)을 만날 수 있다. 영지가 길옆에 위치하고 있다 보니 청평사로 부지런히 올라가는 분들이 그냥 지나치는 경우가 많다. 이 영지는 지금까지 알려진 것 중 가장 오래된 고려정원으로 옆으로 흐르는 계곡물을 끌어들여 조성했다. 이 영지는 연못에 물결이 일지 않으면 청평산의 부용봉이 물속에 그림자처럼 비춰지며 장마와 가뭄이 들어도 물이 늘거나 줄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첩첩산중이었을 이곳에 개인의 재력으로 영지를 조성하고 사찰을 중건했다면 이자현의 권력과 부가 대단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기록에서 보이는 것처럼 왕에게 욕심을 버리고 살 것을 이야기하는 사람이 행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자현이 어떤 인물인지에 대한 기록이 많지 않아 어떠하다고 판단할 수는 없지만, 이자현의 노력으로 청평사는 오늘날까지 존재하며 춘천을 대표하는 명소가 되었다. 청평사로 올라가다보면 원나라가 청평사에 대장경과 함께 시주를 했다는 기록과 거북바위 등 다양한 자연환경에 얽힌 볼거리와 전설이 많다. 주말 청평사를 올라가며 그동안 보지 못하고 지나쳤던 것을 찾아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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