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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호 Oct 06. 2018

성산일출봉과 광치기 해변의 숨겨진 아픔

광치기 해변에서 본 성산일출봉

21세기가 시작되는 2000년 군대를 제대한 나는 작은 텐트와 여행에 필요한 용품 몇 가지를 가방에 넣고 전국 무전여행을 떠났다. 강원도에서 경상도를 거쳐 부산에 도착한 나는 제주도를 가기 위해 저녁 무렵 여객선에 몸을 실었다. 깜깜한 망망대해를 지나가는 여객선 갑판 위로 올라갈 용기가 없던 나는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일찍 잤기에 새벽 일찍 눈이 떠진 나는 칠흑같이 깜깜한 밤에는 나가지 못했던 갑판 위로 올라갔다. 13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갑갑했던 선실에서 벗어나고자 갑판에 올라갔던 나는 해무 사이로 갑자기 웅장한 모습을 가지고 등장한 성산일출봉의 모습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이후 성산일출봉은 나에게 매우 특별한 곳이 되었다.


성산일출봉은 육지에서 폭발한 기생화산과는 달리 오천 년 전 바닷속에서 폭발한 화산으로 형성과정이 특별하다. 분출되는 용암이 차가운 바닷물과 부딪히면서 만들어진 성산일출봉은 제주도의 다른 오름과는 모습이 다르다. 성산일출봉과 같이 바다에서 분출된 수성화산은 용암이 바닷물과 만나면서 바로 부서진 화산재가 분화구 둘레에 원뿔형으로 쌓여 있다. 제주도에는  도두봉, 송악산같이 100여 개의 수성화산이 있으나 그중에도 최고는 영주 10경(제주도에서 경치가 좋기로 꼽는 10곳)에 이름을 올린 성산일출봉이다. 


성산일출봉의 태생이 바닷속이다 보니 시작은 제주도와 연결되지 않은 작은 섬의 형태로 시작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바닷물의 흐름 변화로 성산일출봉과 제주도(신양리) 사이에 모래와 자갈이 쌓이기 시작했다. 작은 모래와 자갈이 오랜 세월 시나브로 쌓이면서 오늘날 너비 500m에 1.5km에 길이 만들어져 제주도에서 성산일출봉을 걸어서 올라갈 수 있게 되었다. 


성산일출봉은 오랫동안 제주도를 상징하며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아온 장소다. 특히 제주도 동쪽에 위치한 성산일출봉은 아름다운 해돋이로 유명하다.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분화구 위 99개의 바위 봉우리가 성처럼 보이게 한다고 해서 성산(城山)이라 불렀다. 일출봉은 해돋이를 볼 수 있는 봉우리를 뜻한다. 두 개를 합치면 성처럼 생긴 봉오리에서 아름다운 해돋이를 볼 수 있는 장소란 의미가 되겠다. 




물이 빠지면 보여주는 또 다른 모습

아름다운 일출을 보여주는 데에는 바다에서 떠오르는 태양이 성산일출봉의 원초적인 태생 그 자체를 보여주기 때문은 아닐까 싶다. 만약 성산일출봉에 나무들이 우거져있다면 일출의 감동이 반감되지 않을까 싶다. 그러나 성산일출봉에 숲이 없기에 비교할 수 없다는 것이 아쉽다. 과거에는 성산일출봉도 나무들이 많이 자라고 울창해서 청산(靑山)이라고도 불렸다는데 그 모습이 어땠을지 너무 궁금하다.


성산일출봉이 과거 숲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면 과거의 역사적 사실을 이해하기 쉬어진다. 고려시대 몽골과 끝까지 맞서 싸운 삼별초를 우리는 학교 역사 수업시간에 배웠다. 고려가 몽골에 항복하고 개경으로 환도할 것을 결정하자, 배중손이 이끄는 삼별초는 이에 분명한 반대를 외치며 진도로 내려가 끝까지 항전했다. 하지만 과거 수전에 약한 몽골군이 아니었다. 수전에 능한 고려군과 연합한 여몽연합군에 삼별초는 곧 진도를 빼앗기고 제주도로 근거지를 옮기게 된다. 이 당시 김통정 장군이 삼별초를 이끌게 된다.


김통정 장군은 여몽연합군을 막기 위해 성산일출봉에 토성을 쌓았다고 한다. 성산일출봉의 생김새를 보았을 때 배를 선착하기 어려을 정도로 급격한 해안절벽이기에 방어에 매우 적합했음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성산일출봉 내에 마실 물과 밥을 짓는데 필요한 땔감이 없다면 오히려 삼별초는 고립되어 궤멸될 수 있다. 이런 기초적인 지식도 없이 성을 쌓았을 리 없다면 고려시대 당시까지도 성산일출봉은 울창한 숲이었음을 짐작해볼 수 있다. 


조선시대에도 임진왜란 당시 제주목사 이경록이 수산 진성(水山鎭城 - 세종 때 성산읍에 세운 방어를 위한 성)을 성산일출봉으로 잠시 옮겼다고 한다. 이 당시 물이 부족한 문제로 다시 이전했다는 기록을 토대로 생각해본다면, 성산일출봉이 이때까지만 해도 숲의 형태를 가지고 있지 않았을까 추측된다. 이후 제주도 인구가 증가하면서 땔감이 부족하게 되자 성산리 인근에 살던 사람들이 나무를 벌채하면서 나무는 사라지고 지금은 억새와 같은 식물군락이 만들어졌다.


이처럼 자연이 만들어놓은 성산일출봉은 인간들에게 있어 최적의 요새로 자리매김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일제강점기 말인 1943년 성산일출봉 해안 절벽에 24개의 인공 굴을 만들어 태평양 전쟁에 대비했던 사실도 여실히 증명해주고 있다. 미국과의 전쟁으로 위기에 몰린 일본은 제주도를 미군에 맞서 일본 본토를 지킬 최후의 군사기지로 사용할 준비를 했다. 


올레길을 걷는 여행인

태평양전쟁에서 물자가 많이 부족했던 일제는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미국의 함대를 맞설 수 없어 가미카제라는 특공대를 운영했었다. 가미카제란 폭탄이 장착된 비행기를 몰고 자살 공격을 하던 특공대를 일컫는데, 당시 비행기로만 자살특공대를 운용했던 것은 아니다. 폭탄과 어뢰를 실은 쾌속정으로도 자살 특공대를 만들었다. 


성산일출봉은 큰 함선을 정박시키고 군사시설로 활용하기에는 무리가 있지만, 굴을 만들어 작은 자살공격을 목표로 한 쾌속정을 숨기기에는 아주 최적의 장소였다. 광치기 해변에서 보이는 성산일출봉의 해안절벽은 망망대해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 지리적 이점이 있었다. 지금도 광치기 해변에서 성산일출봉을 바라보면 곳곳에 일제가 만들어놓은 인공동굴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쾌속정을 숨겨놓기 위한 동굴을 만드는 것은 일제의 몫이 아니었다. 성산리 주민들이 생계활동을 포기한 채 강제 동원되어 만들어야 했다. 열악한 장비와 보호구가 하나 없는 상황 속에서 해안절벽에 나가 단단한 돌을 부시는 것은 엄청난 고생과 희생을 동반할 수밖에 없었다. 이 당시 얼마나 고되고 힘들었는지 성산리에 살던 많은 사람들이 다른 마을로 이주했다고 한다. 제주도를 여행하면서 느끼게 되는 것 중에 아픔과 고통이 없는 곳이 없다는 것이다. 


전쟁과 수탈이 아니어도 제주도가 살기 어려웠음을 보여주는 장소 중의 하나가 광치기 해변이다. 지금은 올레길 1코스의 마지막 구간이면서 2코스가 시작되는 광치기 해변은 아름다운 절경을 볼 수 있는 명소지만, 과거에는 가족을 잃은 슬픔이 대변하는 장소였다.


광치기란 이름이 빛이 흠뻑 비친다 또는 썰물 때 드넓은 평야가 펼쳐지는 모습이 광야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하지만, 또 다른 광치기 해변의 유래는 제주도민의 아픔에서 나왔음을 보여주고 있다.




성산일출봉의 뒤태

제주도가 타 지역에 비해 차별받고 가혹한 수탈이 이루어지자, 많은 제주도민들이 제주도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이에 당시 조정은 제주도 사람들이 뭍으로 도망치는 것을 막기 위해 선박을 건조하는 것을 막았다. 어업을 통해 생계를 유지해야 했던 제주도는 결국 토막 낸 삼나무를 가지고 뗏목(제주도 말로 떼배라고 불렀다.)을 만들어 바다로 나가 물고기를 잡아야 했다. 그러나 뗏목은 조금만 풍랑이 일어도 금방 뒤집혀 물고기를 잡으러 나간 어부들은 바다에 빠져 귀한 목숨을 잃어야 했다. 


바다에서 뒤집힌 뗏목의 자재와 함께 죽은 어부들의 시신들은 뭍으로 흘러왔는데, 그 장소가 바로 광치기 해변이었다. 그래서 고기를 잡으러 간 남편과 아들이 돌아오지 않으면 남은 식구들은 이 곳 광치기 해안에 몰려들어 눈물을 삼키며 하염없이 기다려야 했다. 그리고 시신이 오면 미리 만들어놓은 관에 넣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래서 관을 가지고 죽은 가족을 기다리는 의미에서 광치기 해변이라고 불렸다고 한다.


지금은 뭍에 사는 사람들이 제주도의 아름다운 풍경 속에서 여유 있는 삶을 살고 싶어 하지만, 과거 제주도 사람들에게는 제주도는 사랑하면서도 벗어나고 싶은 섬이었다. 그래서일까? 제주도의 아름다운 풍경에 마음을 빼앗기다가도, 조금만 고개를 돌려보면 곳곳에 서려있는 아픔에 가슴이 먹먹해지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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