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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호 Jul 28. 2018

사라지는 만큼 채워 넣는 무섬마을

경상북도 영주시

외나무다리를 건너는 둘째 딸 

경상북도 영주에는 유명한 관광명소가 많다. 소수서원·부석사와 같이 인간이 만든 역사적 명소도 있지만, 자연이 수만 년에 걸쳐 만들어놓은 무섬마을도 있다. 영주 시내에서 멀리 떨어진 무섬마을의 이름은 물섬마을에서 유래됐다. 물 위에 떠 있는 섬이라 물섬마을이라 불리던 명칭이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발음하기 편하게 'ㄹ'이 빠지면서 오늘날 무섬마을로 불리고 있다.  

  

무섬마을은 우리들의 짧은 인생으로는 느끼지 못할 정도로 유구한 시간의 흐름 속에서 자연의 작은 변화가 만들어낸 결과다. 경북 봉화군에서 시작하는 낙동강의 한 지류인 내성천이 빠른 속도로 흘러내려오다가 영주 무섬마을을 만나면서 속도가 느려지게 된다. 무섬마을을 휘감아 돌며 속도가 느려진 냇물은 상류에서 가져온 모래알을 하나둘 떨구어놓았다. 내성천이 떨구어놓은 모래알은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너른 모래밭이 되었다. 너른 모래밭을 경계로 마을의 뒷산은 태백산과 이어지고, 강 건너는 소백산으로 이어진다.  


너른 모래밭과 내성천으로 인해 무섬마을은 사람들이 왕래하기 어려워, 조선 시대까지 특별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강원도 영월의 청령포같이 사람이 살지 않는 내륙의 섬이었다. 무섬마을에 사람이 들어와 마을을 이루어 살기 시작한 것은 1666년 반남 박씨가 이곳에 자리를 잡고 선성 김씨와 혼인하면서 집성촌을 이룬 데에서 역사를 찾는다. 

  

무섬마을에 다른 가문이 들어오지 못하는 데는 자연조건이 한몫을 차지한다. 무섬마을에 들어서기 위해서는 150m 길이에 폭 30cm의 외나무다리를 건너야 했다. 폭이 좁은 외나무다리를 통해 바깥세상과 교류해야 하는 무섬마을은 어느 누구도 쉽게 들어갈 수 없었다. 그래서, 무섬마을에 시집오면 죽어서야 상여를 타고 마을 밖으로 나갈 수 있다는 말이 전해진다. 그마저도 여름에는 쉽지 않았다. 장마가 시작되거나 태풍이 불면 외나무다리는 물에 휩쓸려가기 일쑤여서 왕래 자체가 불가능했다. 물길이 잠잠해져 외나무다리를 다시 놓았을 때 비로소 세상과 소통할 수 있었다.  


무섬마을이 집성촌이 될 수 있는 데에는 역사적 이유도 존재한다. 집성촌이 형성되는 데에는 조선 시대 양난 이후 사회지도층이었던 양반 지주들의 삶의 기반이 무너진 것이 한몫한다. 중소지주로 향촌민들의 지지를 받으며 학문에 몰두할 수 있었던 양반은 양난을 거치면서 토지는 황폐해지고 노비는 도망가면서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또한 사회 지도층이었던 양반이 전쟁에서 책임 있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면서 권위는 땅에 떨어졌다. 이를 해결하려는 방편으로 같은 성을 지닌 양반들이 모여 살면서 집성촌을 만들었다. 무섬마을도 이 과정에서 집성촌으로 성장했다.  

  

무섬마을에 터를 잡은 반남 박씨와 선성 김씨는 권력에 큰 욕심을 내지 않고 소소한 일상을 보내면서 살아갔다. 크게 문중이 번창하지는 않았지만 평화로운 삶 속에 아이들이 태어나면서 마을의 규모는 조금씩 커져갔다. 1800년대에 들어서면 120여 가구에 500여 명의 사람이 살았다고 하니, 규모가 작은 집성촌은 아니었다.  



     

100년이 넘는 가옥들로 이루어진 무섬마을 

300년 가까이 세상일에 깊이 관여하지 않고 행복한 삶을 영위하며 살던 무섬마을의 사람들도 일제에 나라를 빼앗기자 분노를 감추지 못했다. 입신양명을 추구하지 않고 유유자적 살아가는 전통을 버리고 독립운동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하나둘 늘어났다. 특히 일제의 식민지 교육으로 독립운동을 참여할 인재를 양성하기 어려운 현실에서 김화진이라는 분이 무섬마을에 1928년 아도서숙을 세웠다.  

  

사람의 왕래가 어려운 무섬마을은 일제의 눈을 피해 애국심을 고취하는 교육을 하기에 최적의 장소였다. 아도서숙은 겉으로는 농업기술을 가르치는 교육기관이었지만, 아이들과 청년들에게 한글을 가르치고 애국심을 고취시켰다. 그 결과 아도서숙은 일제에 순응하지 않고 독립을 위해 일할 수 있는 인재를 많이 양성하였다. 광복 이후 무섬마을에서 독립운동가 5명이 서훈을 받을 수 있었던 것도 아도서숙에서 이루어졌던 교육의 힘이 얼마나 컸는지 짐작게 한다.  

  

이러한 아도서숙을 일제는 가만두지 않았다. 결국 아도서숙은 철저하게 감시받고 탄압을 받은 끝에 1933년 문을 닫았다. 그 당시 일제의 탄압이 얼마나 심했는지 현재 터만 남아있다. 그러나 나라를 위한 큰 뜻은 사라지지 않고 오늘날까지 이어지며 영주 사람들의 자부심을 고취시키고 있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의 거점으로 활동한 무섬마을은 더 이상 세상과 고립된 지역이 아니었다. 과거처럼 농사를 지으며 세상일에 연연하지 않고 살아갈 수 없었다. 광복 이후 모든 것이 급속도로 변하는 과정에 무섬마을에 살던 사람들은 저마다의 이유를 가지고 하나둘 떠났다. 사람들이 떠나면서 120여 가구가 모여 북적였던 곳은 현재 40여 가구만이 남았다.  

  

사람들이 떠나며 활기가 사라진 무섬마을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점차 잊혀갔다. 소수의 사람만이 무섬마을을 이따금 찾아오곤 했다. 그런 무섬마을에 변화가 시작된 것은 4대 강 사업이 시작되는 2008년이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내가 무섬마을을 알게 된 것도 이즈음이었다. 텔레비전에서 무섬마을의 생태환경과 자연에 스며들어 살아가는 주민들의 모습이 자주 나왔다. 특히 할아버지 여럿이 어릴 적 물고기 잡던 모습을 회상하며, 무릎까지 바지를 걷어 올리고 물고기를 잡는 모습은 인상적이었다. 


그러나 방송 후반부로 가면 4대강 사업으로 무섬마을이 곧 사라질 수 있다는 우려와 탄식이 섞인 멘트로 바뀌었다. 영주댐과 7km 거리에 불과한 무섬마을이 4대강 사업으로 예전의 모습을 잃어가는 여러 사례를 보여주었다. 유량이 줄어들면서 무섬마을 주민들이 여름철 모래밭에 나가 풀을 뽑는 모습과 무섬마을에 사는 할아버지들이 물고기가 사라지고 있는 현상에 아쉬움을 토로하는 장면으로 방송은 끝이 났다.  

  

4대강 사업은 한강, 낙동강, 금강, 영산강에서 2008년부터 2013년까지 진행되었다. 4대강 사업에 대한 평가는 아직도 상반된 의견이 부딪히며 결론을 내지 못하고 있다. 여기에는 감사원이 상반된 평가를 하면서 더욱 혼란을 부추겼다. 2011년에는 4대강 사업을 긍정적으로 평가했지만, 2013년에는 총체적 부실이라고 발표했다.  

  

  

  

무섬마을 밖에서 바라본 전경 

가디언지에서는 세계 10대 애물단지로 4대강 사업을 선정하기도 했다. 국내에서는 녹조 라떼라는 말이 생기고 4대강으로 얼마나 큰 비용이 추가로 필요한지 저마다 이야기했다. 이에 반해 4대강 사업을 찬성하는 사람들은 녹조 현상이 사업과는 무관한 현상이라고 주장한다.  

  

언론을 통해 접하는 내용만으로는 어떤 주장이 맞는지 나는 알 수 없다. 2015년에 방문하면서 4대 강 사업 이전의 무섬마을과 비교할 수 없어 뭐라 말하기가 더욱 어렵다. 과거의 모습을 알지 못하기에 비교하기는 어렵지만, 방문 당시 내성천 상류 지역에서 모래를 퍼 올리는 공사현장을 마냥 좋은 시선으로 보기는 어려웠다. 어찌 됐든 인간의 잘못으로 오랜 기간에 걸쳐 형성된 자연이 훼손되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  

   

무섬마을은 현재 진행 중이다. 무섬 마을에 사람이 살지 않는 것이 먼저일지, 아니면 생태계가 먼저 변화될지 우리는 알 수 없다. 이촌 향도와 급격한 사회 변화로 무섬마을 주민이 삶의 터전을 버리고 떠나가는 것은 안타까움을 준다. 


그러나 현지인이 빠져나간 빈자리의 고요함은 무섬마을을 보기 위해 찾아오는 외지인들이 채우고 있다. 무섬마을에 남은 주민들은 빈방을 사람들에게 빌려주며 밝은 웃음과 삶의 활력을 받는다. 무섬마을을 방문한 외지인 번잡했던 삶을 떠나 여유를 얻어간다. 이처럼 떠남을 아쉬워하기보다는 새로운 것을 채워 넣는 무섬마을은 밝은 내일을 기대하게 만든다.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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