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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호 Aug 04. 2018

노름빚으로 사람이 살게 된 마라도

제주특별자치도

번잡함 없이 오롯이 망중한을 즐길 수 있는 마라도

이창명의 '자장면 시키신 분' 광고가 나온 이후, 많은 사람이 마라도하면 자장면을 떠올린다. 그러나 마라도에서 자장면을 팔거나 해녀질을 통해 생계를 꾸려나가는 사람이 오래전부터 있던 것은 아니다. 마라도는 배를 선착하기에 어렵고, 다른 제주도 지역보다 바람도 매우 세다. 또한 마라도는 천천히 걸어도 한 시간이면 섬을 다 둘러볼 정도로 크지 않으며, 무엇보다 식수를 구하는 일이 매우 어렵다. 그래서 예로부터 마라도는 어부들이 잠시 쉬어가거나 해녀들이 물길질을 하는 곳일 뿐, 사람들이 거주하는 섬이 아니었다. 


사람이 거주하진 않았지만, 거친 바다에서 생존을 이어가야 했던 제주도 사람에게 마라도는 없어서는 안 되는 꼭 필요한 섬이었다. 내륙으로 도망가지 못하도록 선박 제조가 금지되었던 조선 시대에 뗏목으로 마라도에 건너가 어로행위를 하는 것은 목숨을 잃을 정도로 어렵고 힘든 일이었다. 그래서일까? 마라도에는 제주도에 살던 사람들의 애환이 어려있는 애기업개 전설이 내려온다. 

  

애기업개의 전설을 따르면 수백 년 전 제주도 모슬포에 살던 한 여인이 우물에서 여자아이의 울음소리를 듣는 것에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여인은 버려진 아이를 집으로 데려와 친딸처럼 정성스럽게 키웠다. 여자아이는 가족의 사랑을 받으며 무럭무럭 자랐지만, 여인이 아이를 낳게 되자 상황이 변해버렸다. 주어온 여자아이는 더 이상 사랑받는 존재가 아닌, 집안의 허드레 일을 도맡아야 하는 더부살이 신세가 되어야 했다. 마을 사람들은 이 여자아이를 애기업개(아기를 업는 천이나 띠)라 부르며 안쓰러운 마음에 바다로 데려가 물길질을 가르치며 돌봐주었다. 


애기잡이가 어느 정도 물길질을 할 수 있게 되자, 해녀들은 더 좋은 해산물을 채취할 수 있는 마라도에 데려갔다. 애기업개와 해녀들이 마라도에서 열심히 해산물을 채취하고 나오려는 순간, 바다의 신이 무엇에 화가 났는지 거센 바람을 불어 뗏목을 띄울 수 없게 만들었다. 해녀들은 바람이 잠잠해지기를 기다렸지만, 여러 날이 지나도 멈출 생각을 하지 않고 더욱 거세어졌다. 


거친 바다와 마주한 마라도

  

집으로 몇 날 며칠을 돌아가지 못하자 해녀들은 죽음에 대한 공포감으로 온몸을 떨어야 했다. 그 와중에 해녀 여럿이 애기업개를 마라도에 두고 가면 안전하게 집에 갈 수 있게 해준다는 꿈을 꾼다. 해녀들은 이를 신의 계시로 생각하고 애기업개를 무리에서 떼어놓기 위해 바위에 널어놓은 기저귀를 가져오라고 거짓말을 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애기업개가 선착장에서 멀리 떨어진 바위에 널어놓은 기저귀를 향해 뛰어가자 거짓말같이 바람이 잠잠해졌다. 해녀들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뗏목을 타고 집으로 향했다. 뒤늦게 자신이 버려진 것을 안 애기업개는 해녀들을 쫓아가며 울부짖었으나, 해녀들은 귀를 막은 채 뒤도 안 돌아보고 묵묵히 자신들의 집으로 나아갔다. 

  

해녀들은 애기잡이에 대한 미안함과 신에 대한 두려움으로 한동안 마라도에 가지 않았다. 그러나 먹고살기 어려운 현실에서 해산물이 풍부한 마라도에서의 어업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결국 마라도를 다시 찾은 해녀들은 애기잡이가 쓰러져 울부짖던 자리에 놓여있던 뼈를 보고 미안함과 후회로 고개를 들 수 없었다. 해녀들은 뒤늦게나마 사죄하는 마음으로 애기잡이의 장례를 치르며 자신들의 잘못을 빌었다. 애기업개가 해녀를 용서했는지 아니면 사람이 그리웠는지 모르겠지만, 제를 올리는 순간 마라도의 앞바다가 잠잠해졌다. 이후 해녀들은 안전한 물길질을 위해 애기잡이의 뼈가 있던 곳에 할망당(제주말로 할망은 여자를 의미함)을 만들어 제를 올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할망당에 제를 올리는 전통이 지켜지는 과정이 순탄치만은 않았다. 일제강점기 시절에는 우리의 전통과 문화를 말살시키려는 정책에 의해 금지되었고, 1976년에는 읍사무소와 관음사 직원들이 할망당을 부수고 불당을 세우기도 했다. 하지만 사람들이 할망당을 부수려고 할 때마다 해녀들의 꿈에 할망신이 나타나 춥다고 호소하면서 아직도 매달 7, 17, 27일 해녀들은 제를 올리고 있다. 

  

                                                    

오랜 세월 해녀들의 삶의 애환이 어린 마라도 

현재 마라도에 120여 명의 사람이 터를 잡고 살아가고 있지만, 사람이 살기 시작한 역사는 그리 오래되지 않다. 1883년 마라도에 사람이 살기 시작했으니 불과 130여 년의 짧은 역사를 가지고 있을 뿐이다. 마라도에 사람이 거주하게 된 과정이 독특하다. 1800년대 후반 제주도 대정에 김성오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김성오는 노름으로 가산을 모두 탕진하고 처자식들과 거리에 내쫓겨 어디에도 갈 곳이 없었다. 측은지심인지 조롱인지 모르지만, 마을 사람들은 김성오에게 마라도에 가서 살라고 말했다. 

  

예로부터 마라도는 인간의 거주를 허락지 않았지만, 생사의 기로에 선 김성오에게는 마라도 외에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김성오는 마을 사람들의 말을 듣자마자 대정 현감으로 있던 심원택을 찾아갔다. 현감 심원택은 아무런 가치가 없던 마라도에 누가 살든지 관심이 없었기에 특별한 반대 없이 김성오에게 거주와 개간을 허락해주었다. 이후 김성오가 마라도에서 화전을 일구며 살아가자, 제주도의 가난한 백성들이 자신만의 땅을 찾아 하나둘 마라도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후 마라도는 수백 명이 어업에 종사하며 살아가는 마을로 성장하게 된다.

그러나 마을이 생기는 과정에서 마라도의 자연환경이 크게 변해버렸다. 사람이 거주하기 전에는 마라도에도 우거진 숲이 있었다. 그런데 사람들이 화전을 일구기 위해 숲을 태우기 시작하면서 마라도는 현재 나무가 없는 섬이 되어버렸다. 

  

화전으로 훼손된 마라도의 자연환경에 대한 핑계일까? 마라도에 나무가 없어진 잘못을 뱀에게 전가하는 전설이 내려온다. 전설에 따르면 화전민이 밤에 퉁소를 불자, 마라도의 많은 뱀이 소리를 따라 마을로 몰려왔다고 한다. 너무 많은 뱀이 몰려오자 겁에 질린 화전민들은 뱀을 내쫓으려 불을 피우다 숲 전체를 태워버렸다는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200여 년 전의 이야기라 전설이라 하기 어렵다. 오히려 우리가 자연을 훼손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죄책감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면죄부를 스스로에게 내리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대한민국 최남단을 알리는 비

김성오가 들어오면서 태곳적부터 이어져 왔던 마라도의 자연이 파괴되는 아픔을 겪게 되었지만, 나는 김성오의 파산이 오히려 고맙기만 하다. 오늘날 중국이 이어도를 자국의 영토라고 주장하는 시점에서 마라도에 사람이 살지 않았다면, 중국은 마라도까지도 자신의 영토라고 주장했을지 모른다. 물론 중국이 마라도를 자국의 영토라고 주장할 수 있다는 것은 나의 허무맹랑한 억지 주장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만리장성의 동쪽 끝이 평양이라고 주장하는 중국의 동북공정을 봤을 때 터무니없는 이야기라고만 할 수 있을까? 나는 그러지 않다고 생각한다. 국은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엉뚱한 논리를 내세우며 억지 주장을 충분히 펼 수 있다. 그들은 우리가 제시하는 합당한 논리와 근거는 개의치 않을 것이다. 오로지 그들의 강한 힘만을 내세우며 우리에게 압력을 행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인이 거주하는 대한민국의 최남단 마라도의 지리적 위치는 매우 중요하다. 

  

마라도에 사람이 살고 있다는 것은 중국이 자신의 영토라는 주장을 봉쇄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이어도가 중국 영토보다 대한민국 마라도에 더 가까이에 위치하게 되어, 중국이 이어도를 자신의 영토라는 억지 주장을 막을 수 있는 중요한 근거가 된다. 그래서 마라도는 대한민국의 대표하는 관광지를 넘어 우리의 영토를 수호하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섬인 것이다. 

  

  

     

휴교 중인 마라 분교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관광지이자 영토의 수호자로 자리매김한 마라도에 사람들이 언제까지 거주할지 궁금하다. 이곳 마라도에 사람이 살지 않게 되는 날이 머지않았다고 조심스럽게 예상해본다. 마라도에 사람이 계속 거주하려면 젊은 사람들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현재 마라도에는 젊은 사람들이 부족하다. 젊은 계층이 사라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가 마라 분교다. 1958년 가파초등학교 마라 분교장이 세워지면서 아이들은 섬을 떠나지 않고도 공부하며 성장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다른 농어촌의 학교처럼 마라 분교의 학생수도 최근 급감하면서 2016년부터 마라 분교는 휴교 상태로 유지되고 있다. 


하지만 마라도를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마라 분교는 소소한 구경거리를 제공하면서도 의미를 부여하게 한다. 이렇게 조그마한 섬에도 학교가 있다는 사실에 놀라면서도, 이곳이 우리 대한민국의 영토라는 인식을 자연스럽게 심어주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마라 분교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 관광객이 많이 보인다. 

  

     

마라도 기원정사와 전복모양의 마라도 성당 

  

마라도에는 교회, 사찰, 성당도 있다. 마라도를 방문하는 사람들은 100여 명 밖에는 안 되는 작은 섬에 이처럼 많은 종교기관이 있다는 것에 의아해한다. 그리고, 각 종교기관이 실질적으로 운영되기보다는 상징적 의미로 세워진 것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이는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추측이다. 

  

불교 사찰인 기원정사의 경우 1977년 마라 분교 교사가 관세음보살상을 모셔놓고 예불을 올린 것에서 시작한다. 하지만 몇 년 뒤 관세음보살상의 목이 잘리는 사건이 발생하며 예불 공간이 사라지자, 마라도 불교 신자들은 제주도 관음사에서 사찰 건립을 요청했다. 이에 관음사는 정관 스님을 마라도에 보내 기원정사를 창건했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는 불교 신자만으로는 기원정사의 운영이 힘들었다. 결국, 재정적인 어려움을 겪던 기원정사는 정관 스님이 입적한 후에 폐사되어 버렸다. 이후 이를 안타깝게 여기던 지원 스님에 의해 2004년 기원정사는 다시 문을 열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기원정사가 불교 신자의 요청에 설립됐지만, 마라도 성당의 경우는 2000년에 민성기 신부가 성금을 모아 상징적인 의미로 세웠다. 마라도의 특산물인 전복 모양의 형태의 독특한 외관을 갖춘 성당을 설립하면서, 현재 마라도를 대표하는 상징물이 되었다. 그러나 성당 역시 정상적으로 운영되는 데 어려움을 겪다가 2006년부터 제주교구에서 관리하고 있다. 마라도 성당에는 상주하는 성직자가 없지만, 관람객들이 자유롭게 방문하거나 기도할 수 있도록 개방하고 있다. 

  

  

     

없어서는 안 될 마라도 등대 

마라도 성당을 뒤로 걷다 보면 마라도 등대가 보인다. 마라도 등대는 1915년 일제가 군사적인 목적으로 세워진 이후, 오늘날 동중국해와 제주도 남부해역을 오가는 선박에게 없어서는 안 될 매우 중요한 안내자 역할을 하고 있다. 해도에 제주도가 빠지는 경우는 있어도, 마라도 등대는 꼭 표시된다고 한다. 1987년 등대를 개축한 이후로는 48km 떨어진 해상에서도 마라도 등대의 불빛을 볼 수 있다고 하니, 망망대해의 어두운 밤을 헤쳐나가야 하는 배에겐 없어서는 안 되는 꼭 필요한 등대다. 


등대를 방문하는 관람객들에게도 마라도 등대는 특별한 장소가 된다. 등대 옆으로 세계적으로 유명한 등대 10개를 축소해놓은 모형과 화강석으로 만들어진 세계지도(25 ×10m)를 만날 수 있다. 마라도가 한국의 최남단 영토라는 의미를 넘어 세계적으로 중요한 위치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처럼 마라도는 작은 섬이지만 부여할 수 있는 의미가 너무 많다.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현실적 여건이 가능하다면 꼭 마라도를 가보라 말하고 싶다. 마라도에서 자장면을 먹는 것도 좋지만, 마라도에 얽힌 전설과 의미를 생각하며 의미 있는 시간을 가져보면 어떨까? 제주도에는 가봐야 할 장소가 너무 많지만, 그중에서도 한라산과 마라도는 꼭 들려야 하는 필수코스라 말하고 싶다. 


2016년 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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