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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호 Aug 11. 2018

아픈 역사지만 보존해야 할 순천왜성

전라남도 순천시

순천왜성의 성문(문지)의 일부

임진왜란 당시 왜군은 조선 정복이 어렵게 되자 전국 8도 중 4도만이라도 갖기 위해 명나라와 교섭을 벌였다. 조선을 배제한 채 명과 순조롭게 휴전 협상을 끌고 가던 왜는 우리 강토 곳곳에 왜성을 쌓으며 우리 강산을 그들의 영토로 삼을 준비를 했다. 하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무리한 요구로 휴전 협상이 결렬되자 1597년 왜는 협상을 유리하게 이끌기 위해 정유재란을 일으켰다.

 

왜는 정유재란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 거짓된 정보를 흘려 삼도수군통제사였던 이순신 장군을 파직시키며 전라도 순천에 재침략의 전진기지이자 방어기지로 왜성을 쌓았다. 우키타 히데이에와 도다카도라 두 장수의 지휘로 3개월에(1597.9~12월) 걸쳐 쌓아 올려진 성이 오늘날 전라도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순천왜성이다.

 

임진왜란 막바지에 쌓아 올려진 순천왜성을 통해 내가 무엇을 느낄지 너무나 궁금했다. 임진왜란을 마무리 짓는 노량대첩의 배경이 되는 순천왜성은 역사교사인 나에게 꼭 다녀와야만 하는 장소였다.

 

그러나 순천왜성의 황량한 모습에 실망감이 밀려왔다. 순천왜성으로 가는 교통편은 좋지 않았고, 여기저기 보이는 공사현장으로 이곳이 순천왜성이 맞는지에 대한 확신도 서지 않았다. 다만, 갈대와 웅덩이 너머로 보이는 왜성 성문(문지)이 제대로 찾아왔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순천왜성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서서 무언가를 느끼고 배워갈 수 있을지 한동안 고민해야 했다. 그러나 여행을 마친 후에는 중도 포기하지 않고 순천왜성을 끝까지 다 돌아보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순천왜성 중심부로 갈수록 성곽은 보존이 잘 되어있었고, 임진왜란 당시의 순천왜성을 보여주는 그림들이 곳곳에 세워져 있어 400년 전 과거로 감정이입을 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순천왜성 사령대를 향해 올라가는 길목

순천왜성이 세워지고 고니시 유키나가(소서행장)가 이곳에 14,000여 명의 왜군을 이끌고 머물렀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정유재란을 통해 풍요로운 조선 남부지역을 자신의 영지로 만들 수 있다는 꿈에 부풀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의 꿈은 복직된 이순신 장군을 상대로 벌인 명량해전에서 일본 수군이 크게 패배한 후 철저하게 깨져버린다. 침략의 발판으로 삼았던 순천왜성은 오히려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일본군을 독 안에 든 쥐로 만들어버렸다.

 

육지로는 권율과 명나라 장수 유정이 순천왜성을 압박하고, 바다에서는 이순신과 명나라 제독 진린이 한 명의 왜군도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에워쌓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죽음 이후 일본 본토에서 벌어지는 권력투쟁에서 자신의 위치를 확고히 하기 위해서 고니시는 하루라도 빨리 일본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하지만 이순신 장군이 왜군 한 명도 살려 보내지 않겠다는 굳은 의지로 바다를 철통같이 지키고 있어, 고니시는 하루를 초조하게 보낼 수밖에는 없었다.


결국, 고니시 유키나가는 자력으로는 빠져나갈 수 없다고 판단하고 남해 일대에 분산된 왜군을 하나로 모와 본토로 돌아갈 계획을 세운다. 명군에게 많은 뇌물을 바친 끝에 통신선 1척을 순천왜성 밖으로 내보내 고성, 사천, 남해에 주둔하던 일본군을 같은 날 같은 시간에 노량바다로 모았다. 이때 모인 왜의 전함이 500여 척에 6만여 명에 이르렀다고 하니 실로 어마한 숫자다.

 

1598년 11월 18일 이순신 장군은 왜군을 무찌른다면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굳은 의지를 내보이며 조선 수군 83척과 명나라 수군 63척, 총 146척에 2만여 명의 군대를 이끌고 노량바다로 출정한다. 이순신 장군은  위험에 빠진 명나라 제독 진린을 구하면서도 수백 척에 이르는 왜선을 격침해 버렸다.

 

결국 숫자만 믿고 덤벼들었던 왜군은 이순신 장군과 수군의 활약에 관음포로 50여 척의 전선만을 이끌고 급히 도망쳐야 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왜군이 쏜 총탄에 왼쪽 가슴을 맞은 이순신 장군이 숨진다. 이때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라는 이순신 장군의 말은 오늘날에도 많이 회자되고 있다. 이순신 장군이 돌아가시게 되는 이 전투를 마지막으로 7년간의 임진왜란은 막을 내렸다. 임진왜란의 마지막 대첩이자 이순신 장군의 마지막 전투를 우리는 노량대첩이라 하며 기리고 있다.

 


임진왜란 당시의 순천왜성

이처럼 순천왜성은 임진왜란의 치열한 마지막 격전지이며, 조선인들을 끝까지 괴롭혔던 장소이다. 이 장소가 오늘날까지 남아있다는 것이 이해되지 않는다. 전쟁 이후 왜성을 허물어 버릴 국력이 없었기에 방치한 것이 현재까지 이어진 것일까? 아니면 임진왜란의 참담함을 오래도록 기억하며, 다시는 그런 참담함을 겪지 않기 위해서일까? 이도 저도 아니라면 그냥 버려졌던 것일까?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전쟁 직후 조선은 왜성을 허물어버릴 국력이 남아 있지 않았고 이후에는 사람들에게 버려진 땅이 되지 않았을까 추측해본다. 전설에 따르면 순천왜성에서 죽은 왜귀(왜군 귀신)들이 울부짖는 소리로 사람들이 한날한시도 제대로 된 삶을 살 수 없었다고 한다. 밤마다 울부짖는 왜귀 때문에 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마음 편히 지내지 못하던 순천 백성들은 마지막 방편으로 왜성 맞은편에 이순신 장군을 모시는 사당을 세웠다. 이순신 장군이 모셔진 충무사가 들어서자 기세 등등하던 왜귀들이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는 내용에서 백성들에게 순천왜성은 다시는 떠올리기도 싫은 참혹한 장소였음을 짐작하게 한다. 이 전설을 통해 순천 지역민들에게 왜성은 고개도 돌려 바라보기도 싫을 정도로 기피하는 땅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하지만, 순천왜성은 1500~600년대의 일본 건축을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역사적 장소다. 그래서 조선과 일본의 축성 방식과 군대 운영방식의 차이점을 통해 임진왜란 당시를 재현해 볼 수 있도록 도와준다. 조선이 기초공사로 토대를 닦고, 그 위에 성벽을 쌓는 방식과는 달리 일본은 기초공사 없이 커다란 돌을 쌓아 올려 상대적으로 공사 기간이 짧다. 그래서 3개월 만에 순천왜성을 완공시키며 전쟁의 전진기지이자 방어기지로 활용할 수 있었다. 물론 여기에는 왜군에 포로로 잡힌 수많은 조선 백성들의 강제 노역도 한몫을 차지한다. 남아있는 성벽만으로도 왜군에게 끌려와 심한 매질을 당하며 성을 쌓았을 우리의 선조들의 모습이 떠올라 가슴이 아팠다.

 



사령대와 사령대에서 내려다본 광양만과 산업단지

임진왜란 내내 수많은 조선인을 해치고 노략질을 일삼던 일본군을 섬멸하여, 다시는 조선을 침략하지 못하게 하려던 이순신 장군은 순천왜성을 어떤 눈길로 바라봤을까?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어 왜군이 잠시 물러난다고 판단했던 이순신 장군은 한 명의 왜군도 절대 살려 보낼 수 없었을 것이다. 살아 돌아간 왜군은 더 많은 군대를 이끌고 다시 조선을 침략할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선의 왕과 관료들은 전쟁을 멈추고 왜군을 돌려보내고자 했다. 오히려 끝까지 싸우려는 이순신 장군을 다른 눈으로 바라보며 경계하고 의심했다. 이순신 장군은 정유재란 당시 왕의 명령을 따르지 않아 삼도수군통제사에서 내쫓겼다가 생사고락을 함께했던 수많은 부하를 칠전량에서 잃어야 했던 아픈 기억이 떠올랐을 것이다. 그래서 전쟁을 끝까지 치르려는 자신으로 인해 또다시 병졸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것은 아닌지 두려웠을 것이다.




순천왜성 성벽

그러나 이순신 장군은 다시는 왜가 조선을 침략하지 못하도록 왜군을 섬멸하는 것을 선택하고 자신의 목숨을 걸었다. 나는 이순신 장군의 선택이 임진왜란 이후 300년 동안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지 못하도록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허황된 꿈이 한국을 정벌하겠다는 정한론을 만들었다면, 이순신 장군의 노량대첩은 일본의 침략 의욕을 300년 동안 막아냈다. 이는 지금의 우리에게 진정한 자주가 무엇인지 가르침을 주는 듯싶다. 

 

순천왜성을 방문하면 꼭 사령대에 올라가 산업단지를 내려다보기를 권하고 싶다. 왜가 그렇게 갖고 싶어 하던 이곳에 대규모의 산업단지가 만들어져 대한민국의 경제를 책임지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산업단지를 내려다보고 있으면, 수많은 어려움을 이겨내고 세계 속의 대한민국으로 우뚝 설 수 있도록 만들었던 우리 선조들에게 감사함을 느끼게 한다.


순천왜성은 단순하게 왜성의 구조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이순신 장군이 되어 임진왜란을 만날 수 있게 해주었다. 자신들의 잘못은 반성하지 않은 채 살길만 찾던 왜를 이순신 장군이 왜 그냥 보내줄 수 없었는지도 알게 해 준다. 그러나 당시 집권층이 왜에 강제 노역당하며 죽음으로 내몰렸던 백성을 버리고, 자신들의 권력을 지키는 데에만 급급했음을 보여주는 전설에서 아쉬움이 크게 남는다. 그러나 광양만에 위치한 산업단지를 통해 우리 민족의 저력이 국난을 극복하고 과거보다 더욱 발전하는 데 있음을 보면서 내가 대한민국 국민인 것이 자랑스러워진다.

 

2018년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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