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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호 Aug 18. 2018

명분과 실리의 기로였던 남한산성

경기도 광주시

경기도 광주에 위치한 남한산성 북문

경기도 광주에는 둘레 8km에 16만 평에 달하는 면적을 가진 거대한 산성이 있다. 최근 영화로도 널리 알려진 남한산성이 그 주인공이다. 남한산성에는 너무나 많은 역사적 사건이 얽혀있어 무엇부터 이야기해야 할지 고민에 빠지게 한다.


조선의 전기와 후기를 구분 짓게 하는 병자호란과 관련된 이야기부터 남한산성 축성에 얽힌 이회의 슬픈 전설, 그리고 수어장대에 있는 토지 측량 삼각점을 통해 일제에 의한 자주권 상실 등 모두 열거하기 힘들 정도로 많다. 그중에서도 제일 먼저 이야기해야 할 것이 남한산성에서 벌어진 병자호란이다. 


임진왜란이 끝나면서 동아시아의 국제 정세는 크게 변화되어 명나라는 급격히 쇠약해진 반면, 조선과 명 사이에서 약소민족으로 분열되어 살던 여진족들은 각 부족 간의 통합이 이루어졌다. 그 중심에는 명나라의 이이제이(以夷制夷-오랑캐는 오랑캐로 막는다.) 전략에 이용되어, 같은 여진족을 공격하던 건주 여진족 누르하치의 부족이 있었다. 


누르하치는 명나라 장수 이성량(조선인 출신)이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죽이는 모습을 본 후, 마음에 복수의 칼을 품고 힘을 키웠다. 누르하치는 아버지와 조부의 희생을 대가로 받은 작위와 재물을 바탕으로 여진족을 통합하여 1616년 후금을 세운다. 그리고 여진이란 기존의 이름을 버리고 만주족으로의 새로운 출발을 세상에 공표한 뒤, 명나라에 적대감을 공개적으로 내보이며 중국 본토를 침략한다.



서울시내를 내려다볼 수 있는 연주봉 옹성

당시 조선은 광해군이 임진왜란 전후 처리를 위해 동분서주하며 뛰어다니고 있었다. 하지만, 서자 출신의 왕이라는 한계와 광해군의 실리를 중시하는 정책을 탐탁지 않게 여기던 서인 계열에 의해 정국은 늘 불안했다. 결국 실용주의 노선으로 국가를 운영하던 광해군은 명분과 의리를 중시하던 서인이 일으킨 인조반정으로 권좌에서 내쫓겨 제주도로 유배된다.


광해군과는 달리 노골적으로 명나라를 지지하고 후금을 적대시한 인조 정권은 결국 후금의 침략을 받게 된다. 당시 조가 요동을 수복하려고 평안북도에 주둔하던 명군을 지원하면서, 후금은 내심 불편함을 조선에 내비치고 있었다. 때마침 후금은 이괄의 난이 실패하고 도망쳐온 잔당들에게 조선에 대한 정보를 충분히 입수하고, 조선에 형제관계를 요구하며 자신감 있게 3만의 군대를 이끌고 쳐들어온다. 이를 정묘호란(1627년)이라 한다. 후금을 상대로 조선은 항전했지만 거듭되는 패배에 정묘조약을 체결하고 후금의 요구를 들어주며 형제국이 된다.


이후 후금은 청으로 국호를 변경하면서 조선에 군신의 관계를 요구했고, 조선은 후금을 정복해야 한다는 의견이 들끓었다. 이 과정에서 조선을 완전 복속시켜야 명을 정복할 수 있다고 판단한 청태종은 1636년 12월 1일, 12만의 군대로 조선을 침략한다. 조선에게 군신관계를 요구하며 재 침입한 역사적 사건을 우리는 병자호란이라 부른다. 북쪽에서는 청나라가 두려워하던 임경업 장군이 백마산성에서 끝까지 항전했다. 그러나 조선의 영토가 목적이 아니라 복종을 필요로 했던 청군은 백마산성을 놔두고 서울로 군대를 이동시켰다. 너무 빠른 속도로 내려오는 청나라 군대에 조선은 제대로 항전하지 못하면서, 순식간에 서울 도성을 청군에 빼앗기게 된다. 이에 인조는 강화도로 피난을 가던 발걸음을 되돌려 남한산성으로 급히 들어가게 된다.


당시 남한산성은 이괄의 난 이후 총융사 이서가 전국의 승군을 동원하여 1626년 다시 축성하면서, 한동안 버틸 수 있는 준비가 되어있었다. 남한산성에는 인조와 함께 들어온 13,000여 명의 군사가 50여 일을 버틸 수 있는 식량을 갖추고 있었다. 인조는 급한 마음에 남한산성으로 들어왔지만, 전국 각지에서 군대가 올라오면 안과 밖에서 내응 하여 충분히 격퇴할 수 있는 희망이 있었다.


그러나 정국의 형국은 그러지 못했다. 충청, 경상, 전라, 평안, 강원도 각지에서 남한산성으로 진군하던 조선 군대는 연신 패했다. 그뿐만이 아니라 전국에서 일어난 의병의 숫자가 적었으며 활약도 미미했다.


임진왜란 당시 왜군을 물리치는 데 있어 큰 역할을 했던 의병의 역할이 병자호란에서 작았던 이유는 무엇일까? 가장 큰 이유는 조선 정부에게 다. 과거 임진왜란이 끝난 이후 선조는 명군이 있어 승리했으며, 의병들은 명군을 따라다니다가 요행히 잔당의 머리만 취했다고 평가절하했기 때문이다. 더욱이 뛰어난 의병장은 왕권을 위협하는 세력으로 보고 역적으로 몰아 처형했으니, 일반 관료들이 의병에 행했던 횡포가 얼마나 심했을 쉽게 짐작해 볼 수 있다. 관리들은 의병들의 전공을 빼앗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들의 뜻에 맞지 않으면 의병들을 죽이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그 외에도 정치적으로 인조반정의 과정에서 의병활동의 주축이었던 북인들이 몰락하면서 의병의 효과는 기대할 수 없었다.


남한산성에서 조선은 청군을 맞아 수십여 명을 죽이는 작은 승리를 거두었을 뿐, 패배가 더 많았고 그로 인한 피해는 컸다. 대표적인 예로 영의정 김류가 북문을 통해 청군을 기습하려던 작전에서 300여 명의 조선군은 아무런 전과도 올리지 못하고 전멸한 사건이다. 이를 법화골 전투라고 부르며, 이후 정조 때 성문을 개축하면서 그때의 패전을 잊지 말자는 의미로 북문을 전승문(全勝門-모두 승리한다)이라 명명했다.


남한산성에서 연이은 패배와 고립된 상황 속에서 고립된 조선 정부는 김상헌을 중심으로 끝까지 항전하자는 척화파와 최명길을 중심으로 화약을 맺자는 주화파로 나누어지게 된다. 결국 식량이 떨어지고 사기도 저하된 상황 속에서 인조는 항전 45일 만에 모든 것을 다 포기한다. 남한산성에서 나온 인조는 삼전도에서 청태종에서 3배 9고두(3번 큰절하고 9번 땅바닥에 머리를 맞대며 절하는 것)하며 군신관계를 맺는다. 그러나 조선의 배신을 경계한 청은 인조의 두 아들과 신하들, 그리고 40여만 명의 백성들을 포로로 끌고 가 버린다.




연주봉 옹성에서 내려다본 서울 전경

남한산성이라는 영화를 보면 조선은 굶주리며 추위에 떠는 반면 청군은 따뜻한 불을 쬐며 고기를 뜯는 장면이 나온다. 고구려를 침략했던 수와 당나라가 추위와 식량부족으로 패퇴한 역사를 알고 있는 나로서는 영화 속 장면이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남한산성에 올라서 서울을 내려다보자 이해가 되었다. 청군은 조선 정부가 급히 남한산성으로 도망가는 과정에서 남겨놓은 수많은 가옥과 식량 등 자원이 풍부했다. 반면 조선군은 산속에 갇혀 추위에 떨면서 굶주려 죽어나가야 했을 것이다.


남한산성에서 서울을 장악하고 분탕질을 하는 20만의 청군(청군은 계속 충원되고 있었다.)을 보며 인조와 조선군은 심한 좌절감을 겪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결과는 예정된 것일지도 모른다. 일부 지배계층이 권력과 부를 독점하기 위해 백성들을 거리로 내쫓다가, 전란이 일어나자 백성을 버리고 먼저 도망가는 행태가 낳은 필연적인 결과다.


하지만, 조선 왕과 정부를 외면한 백성들도 수난에서 빗겨 날 순 없었다. 병자호란의 패배는 고스란히 백성을 고통으로 내모는 현실로 돌아왔다. 40여만 명의 백성들이 끌려가면서 가족들이 생이별을 하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특히 여성들이 겪어야 했던 고통은 더욱 컸다. 가족에게 돌아오기 위해 목숨을 걸고 도망쳐 나와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가족과 마을 사람들에게 몸을 파는 부도덕한 여자로 취급받아야 했다. 그 결과 고향으로 돌아온 여자를 뜻하는 환향녀(還鄕女)는 외간 남자를 홀리며 가정을 파탄에 이르게 하는 화냥년이 되어버렸다.


지배계층과 피지배계층이 서로를 탓하며 국난을 외면한 결과 모두 피해를 봐야 했다. 특히 지배계층보다 피지배계층이 더 큰 피해를 당하고 어려운 삶을 살아야 했다. 이와 비슷한 상황이라면 우리는 어떠한 선택을 해야 할까? 참으로 어려운 문제다. 이용당하는 것을 알면서도 나라를 위해 앞장서는 것이 올바른 것인지 쉽게 결론짓기 어렵다. 


그러나 우리는 정답을 이미 알고 있다. 과거와는 달리 오늘날은 우리가 대한민국의 주인이다. 국난이 초래하면 우리는 특정인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 분연히 일어서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이제는 특정인과 계층의 이익을 위해 어려움을 겪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이 나라의 주인으로 살아갈 테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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