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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호 Sep 01. 2018

왕이 머무는 법궁보다 더 중요했던 종묘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묘의 입구 창엽문

우리는 드라마에서 신하들이 임금을 향해 '종묘사직을 생각하시옵소서'라고 외치며 머리를 조아리는 장면을 친숙하게 본다. 도대체 종묘사직이 무엇이기에 임금마저도 옴짝달싹 못하게 만드는 것일까? 아마도 드라마에서 자주 등장하는 종묘사직을 안다면 드라마를 이해하는 것을 넘어 조선을 아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조선 시대는 성리학의 나라로 효를 가장 중요한 가치로 여기고 생활하던 시대다. 왕도 효를 행하지 않으면 사람의 도리를 모르는 자로 낙인찍혀 나라를 통치할 자격을 잃어버렸다. 광해군이 인목대비를 폐위하자 서인들이 불효를 저지른 자는 왕이 될 자격이 없다며 반정을 일으킨 역사를 통해서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그래서 조선의 왕들은 선왕의 영혼을 담은 신주를 종묘에 모셔놓고 정성 들여 제를 올렸다. 

선왕의 신주를 종묘에 모셔 효를 행하였다면 나라를 운영하는데 실질적으로 필요한 것은 백성을 먹여 살리는 일이었다. 농업에 있어 가장 크게 영향을 미치는 주체는 따사로운 햇빛과 비를 내려주는 하늘이다. 농업국가였던 조선은 한 해 농사가 잘 되기를 하늘을 향해 제사를 올려야 하지만중국에게 사대관계를 맺고 있는 입장에서 는 불가능했다. 중국 황제만이 하늘에 제사를 올릴 수 있는 자격이 있다고 여겼던 조선이었기에 차선책으로 농업과 관련된 토지와 곡신의 신을 모시고 제를 올렸다. 토지와 곡식의 신을 모셔놓고 제를 올렸던 장소가 바로 사직단이다.


즉, 왕으로서 조선을 통치할 수 있는 이유는 지금까지 조선을 잘 통치했던 선왕과 현재의 백성이 있기에 가능하다는 말이다. 그렇기에 종묘사직이란 바로 조선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니 "종묘사직을 생각하시옵소서"라고 신하들이 외치는 소리는 선왕의 유지를 받들어 나라와 백성을 통치하라는 말로 해석하면 된다.


그러나 우리는 종묘사직을 모두 만날 수 없다. 사직단은 일제에 훼손된 뒤 오늘날까지 제대로 복원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이 종묘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면서 제대로 보존 관리되고 있는 것이다. 조선시대 왕이 사는 궁궐보다도 더 중요했던 종묘는 외삼문이라 불리는 창엽문에서 시작한다. 조선 초기 궁궐 전각에 많은 이름을 붙인 정도전은 종묘의 첫 번째 문을 푸른 나무처럼 오래도록 가라는 의미로 창엽문이라 지었다. 




종묘에 위치한 지당

창엽문을 들어서면 물고기가 살지 않는 작은 연못인 지당이 나온다. 지당은 종묘가 왕들의 영혼을 모시는 만큼 살아있는 생명체를 두지 않는다. 그래서 지당은 작은 바람에 일렁이는 물결 외에는 어떤 움직임도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더욱 신비로운지 모르겠다. 


물이 흐르지 않으면 연못도 썩으면서 냄새가 진동할 텐데, 지당에서는 아무런 냄새도 나지 않았다. 흐르는 물에 생명체가 태어나고 살아가는 것은 자연의 이치인데 어찌 물만 존재할 수 있는지 당최 알 수가 없다. 식물과 물고기가 살지 않는 못을 만들고 의미를 부여한 선조들의 기술과 지혜에 감복할 뿐이다.




세계에서 가장 긴 건축물 정전

종묘의 핵심은 조선 왕조의 역대 왕과 왕비의 신주가 모셔진 정전이다. 신주란 영혼을 담아놓는 나무패를 말한다. 정전의 주기능은 바로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셔놓고 제를 올리는 것이다. 신주가 모셔져 있는 방을 신실 또는 감실이라고 하고, 정전은 신실들이 모여져 있는 전각을 일컫는다.


1395년 종묘가 지어질 당시만 해도 정전은 지금처럼 긴 전각은 아니었다. 이성계는 종묘를 건설할 때 자신의 4대조와 자신이 들어갈 신실만 만들었기에 정전은 작은 전각에 불과했다. 그러나 4대조와 이성계의 신주가 들어서자 후대 왕이 들어갈 자리가 없었다. 결국 정전 옆에 영녕전을 지어 이성계의 4대조를 옮겼다.


하지만 조선을 다스린 왕들의 신주가 늘어나는 만큼 정전과 영녕전은 계속 증축 공사를 해야만 했다. 그 결과 정전은 동서 길이만 109m로 세계에서 가장 긴 건축물이 되었다. 정전이 너무 길다 보니 정면에서 바라본 정전의 모습을 카메라에 온전히 담는 것은 전문가가 아니면 쉽지 않은 일이 되어버렸다.



계속 증축되며 길어진 정전

정전을 바라보면 양쪽으로 꺾어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부분을 동서월랑이라 부르는데, 여기에는 특별한 사연이 내려져온다. 태종이 정전을 증축할 때 동서월랑을 만들라고 하자 많은 신하들이 정전에 필요 없는 공간이라며 크게 반대했다고 한다. 그러나 태종은 종묘제례를 위해 애쓰는 신하들이 뜨거운 햇볕이나 비를 피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며 설치를 강력히 주장했다. 


결국 태종의 뜻대로 동월랑은 신하들이 비를 피하는 공간으로 사용하기 위해 벽을 없앴고, 서월랑은 일꾼들이 수고를 덜 수 있도록 제기를 보관하는 창고로 만들었다. 즉, 동서월랑은 왕과 왕후의 신주를 모시는 공간이 아니라 제사를 지내기 위해 노력하는 신하와 백성을 위한 별도의 공간인 것이다. 형제와 처남을 죽이며 왕이 되었던 태종이지만, 자신의 신하를 이처럼 세심하게 배려하고 아끼는 모습에선 폭군의 이미지가 아닌 성군의 이미지가 보인다.


애민정신은 태종 이후로도 후대 왕들에게 이어지면서 백성들은 고려시대보다 훨씬 나은 삶을 살았다. 국가 경영에 있어 원리원칙이 지켜지면서 쉽게 무너질 거라 예상됐던 조선은 더욱 강건해졌고, 백성들은 왕을 진심으로 따르기 시작했다. 조선의 역사가 늘어날수록 종묘에 들어갈 왕들의 신주도 늘어나면서 정전은 계속 증축되어야 했다. 


그러나 명종 때 정전을 11칸으로 증축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임진왜란이 발발하면서 종묘는 왜군에 의해 불태워지고 만다. 임진왜란 당시 선조는 백성을 버리고 의주로 도망가면서도, 종묘에 있던 신주만은 챙겼다. 훗날 선조는 모든 것은 다 버려도 신주만큼은 챙겼기에 국난을 극복하고 조선을 지킬 수 있었다고 생각했다. 


과연 신주를 잘 모셨기에 국난을 극복할 수 있었던 걸까? 개인적으로 신주의 효과도 일정 부분 있었다고 본다. 선조는 자신의 안위만을 챙긴 무능력하고 이기적인 왕이었지만, 임진왜란 당시 많은 의병들이 왜군과 맞서 싸운 것은 속된 말로 선조가 잘난 조상을 둔 덕분이었다. 선왕들이 쌓아놓은 업적들이 컸기에 백성들이 나라를 버리지 못한 것이지, 선조를 위해 왜군과 싸운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발발 당시 도망치기에만 급급했던 선조는 서울로 돌아오자마자 신주를 보관할 장소를 제일 먼저 찾았다. 전쟁으로 힘들어하던 백성보다도 신주가 더 우선이었던 선조는 명종 때 영의정을 지낸 심연원의 집을 임시 종묘로 삼아 신주를 모셨다가 1608년 원래의 위치인 종묘로 옮겼다.

우연의 일치를 필연으로 만들어본다면 선조는 1608년에 죽었다. 자신이 들어갈 신실을 만들고 나서 죽었으니 선조의 일생은 종묘에 들어가기 위한 삶이 아니었나 싶다. 서자 출신으로 종묘에 들어갈 자격이 되지 못했지만 조상 덕분에 왕이 되었고, 왕이 된 이후에는 종묘에 들어갈 자격을 잃지 않기 위해 기축옥사와 같은 정치를 통해 수많은 사람을 죽였다. 그리고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신주만 챙겨 도망갔다 돌아온 후, 자신이 들어갈 종묘를 세우는 것으로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했다. 


선조는 역사상 가장 무능력하고 무책임한 왕으로 많은 사람을 힘들게 했다. 선조의 치적을 말하고 싶어도 찾기가 어렵다. 그래도 굳이 찾는다면 종묘를 다시 중건하면서 오늘날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할 수 있게 한 점일까?


이후 종묘는 계속 증축되어 오늘날 신실 19칸과 협실 3칸 그리고 동월랑, 서월랑 각각 5칸의 모습을 갖췄다. 종묘에 들어갈 신주의 숫자를 하늘이 알려주었는지 정전은 마지막으로 증축한 19칸에 조선의 마지막 왕이었던 제 27대 순종의 신주가 들어서면서 조선은 역사의 문을 닫는다.


이제는 더 이상 국가 중대사를 결정하는 왕도 없고, 종묘사직을 외치는 신하도 없다. 조선을 상징하던 종묘는 과거처럼 사람들에게 특별한 의미를  주지 못한다. 단지 세계문화유산으로서 자긍심을 줄 뿐이다. 여기에 덧붙이자면 신하와 백성을 먼저 생각하며 동서월랑을 만든 태종과 남에게 의존하고 탓만 하던 선조를 비교해보며 위정자의 역할을 되짚어본다. 그리고 권위는 내가 만드는 것이지, 주변 환경이 만들어주는 것이 아님을 조심스레 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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