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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호 Sep 15. 2018

국내 유일의 일본식 사찰 동국사

일본 사찰의 형태를 간직한 동국사 대웅전

군산에는 국내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일본식 사찰이 있다. 1909년 일본인 승려 우치다(內田)에 의해 창건된 동국사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일제강점기 시절 한국을 지배하기 위한 목적으로 세워진 사찰이지만, 대한민국에 남아있는 유일한 일본 사찰이기에 가치가 높다. 특히 광복을 맞이하면서 김남곡 스님이 금강선사라는 일본식 사찰의 이름을 “우리나라 사찰”이란 뜻을 담아 동국사(東國寺)로 바꾸었기에 의미가 더 크다.


동국사에 들어서면서 경사가 급한 지붕을 가진 일본식 대웅전과 마주하는 순간 몸이 멈칫했다. 장식 없는 처마와 대웅전 외벽의 많은 창문은 동국사가 우리 사찰이 아니라 일본식으로 지어진 사찰임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분명 일본식 사찰을 보러 왔음에도 너무도 낯선 모습에 나의 놀라는 마음은 어찌할 수 없었다. 동국사를 관람하는 내내 군산이 아닌 일본을 방문한 듯한 느낌은 오래도록 지속되었다.


일본 불교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시점은 강화도조약을 체결하고, 일 년 뒤인 1877년이다. 조선에 거주하는 일본인을 위해 일본 불교가 들어올 수 있도록 일본 정부가 요청하면서 부산을 시작으로 국내에 유입되었다. 이후 일제의 침략이 가속화되자 전국 각지에 일본식 사찰이 많이 세워졌다. 마치 유럽이 식민지를 만드는 과정에서 십자가를 앞에 내세우고 침략했던 과정을 답습하듯이 말이다.


일제가 식민지 침략에 불교를 앞장세운 데에는 조선과 일본이 14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부처님을 믿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일제는 불교를 통해 한국인들에게 친숙하고 좋은 이미지로 다가오고자 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는 한국 불교의 교단을 장악하여 식민통치의 도구로 활용하려는 무서운 전략이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군산에도 일본 사찰이 세워지게 된다.



대웅전과 요사가 복도로 연결된 동국사

1904년 군산에 위치한 일본인 거주지에 포교소 형태로 문을 연 일본 불교는 한일 강제병합이 이루어진 후 교세를 크게 확장해나갔다. 특히 1911년에 조선총독부에 의해 발표된 사찰령은 일본 불교가 한국 불교를 흡수하여 성장하는데 날개를 달아주었다. 사찰령의 내용을 살펴보면 사찰의 병합, 이전, 폐사 및 명칭 변경을 하려면 조선총독부의 허가가 받아야 했다. 이 외에도 조선 총독이 주지 임명권을 가지고 불교 의식·인사·재정에 깊이 관여할 수 있었다.


사찰령 발표 후 일제는 일본인 승려와 친일파 승려를 통해 한국 불교의 교단을 흡수하면서 일본 불교를 크게 확장해나갔다. 이 과정에서 군산의 포교소도 인근 지주였던 구마모토, 이먀자키 등 29명의 시주로 받은 돈으로 현재 자리에 금강선사라는 사찰을 세우며 자리를 잡았다.


일제는 금강선사를 짓는데 필요한 목재를 일본에서 직접 가져올 정도로 심혈을 기울였다. 일본인들은 완공된 금강선사를 보면서, 조선이 일본의 영토가 되었다는 사실에 자랑스러워했다. 그리고 한국인과 한반도를 짓밟고 얻은 자신들의 부와 권력을 통한 행복이 영원하기를 기도했다.


그들이 기도를 드리며 행복했던 시간만큼 한국인들의 고통은 나날이 커져만 갔다. 일제강점기 당시 소작인들은 수확량의 70~80%를 소작료로 지불했다. 200만 원을 벌면 140~160만 원을 일본 지주에게 납부했다고 이해하면 된다. 한국인들로부터 수탈한 재물로 정성스럽게 세운 사찰이라 그럴까? 동국사는 100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지만 어디 하나 손상되지 않고 굳건하게 서있다.



대웅전과 요사를 연결하는 복도와 1930년대 사진

동국사 내부로 들어가면 부처님을 모시는 법당의 한 켠에는 과거의 모습을 보여주는 사진과 유물 등 여러 전시물이 놓여있다. 그중 동국사 법당 내부에 걸려있는 사진은 매우 불쾌함을 주었다. 그 사진 속에는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 스모선수가 동국사에서 기생을 옆에 두고 술을 마시며 즐기는 모습이 담겨 있다. 사진 속 인물들이 강점기 당시 한국인을 무시하고 우리의 문화를 조롱하고 즐거워했을 모습이 상상된다.


이처럼 과거 동국사는 일제강점기 부처님을 모시는 경건한 사찰이 아니라 사치와 향락을 즐기는 타락된 장소였다. 지금처럼 사람의 마음을 어루만지며 평온함을 주는 사찰이 아닌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었다는 일본인들의 우월감으로 가득한 곳이었다. 그리고 그 행복이 영원히 지속되기를 바라며 기도하던 공간이었다. 


일본인들이 동국사에서 그런 기도를 올린 것은 국가에 대한 바람이 투영되었다고 할 수 있다. 과거 일본 불교는 에도막부 시절부터 권력자들의 도구로 사용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에도막부는 일본인을 단가(불교신자)로 등록할 것을 강요한 뒤, 인구를 파악하고 조세를 걷는데 활용했다. 그 결과 일본인들은 현재도 불교 신자가 아니더라도 절에 참배하거나 불교식 장례를 치른다. 정부의 필요 아래 보호를 받으며 성장한 일본 불교는 현재 7만 5천 개의 사찰과 9천만 명의 신도를 보유한 국가 운영에 꼭 필요한 종교기관으로 성장해있다. 이는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에게도 일본 불교가 조선을 지배하고 수탈하는데 꼭 필요한 종교기관이었고, 그에 대한 대가로 많은 비호와 지원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한국 불교를 흡수 통합하려는 일제의 35년간의 노력이 실패했음을 보여주는 장소가 동국사다. 광복 이후 금강선사에서 동국사로 명칭을 변경하고 우리의 사찰로 만드는 과정에서 우리의 얼과 정신은 일제가 어떠한 수단에도 절대 꺾이지 않음을 보여주었다. 동국사는 일본식 건축물만 남아있을 뿐 대한불교 조계종 산하 고창 선운사의 말사로 운영되면서 일제와 일본 불교의 잔재가 한국에 남아있을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사실을 모르고 과거 일제의 영광을 확인하러 오는 일부 극우 일본인들은 동국사를 보면서 어떠한 생각을 할지 궁금해진다.


꼭 그런 의미가 아니더라도 국내에서 유일하게 일본식 사찰을 볼 수 있다는 점에서 동국사가 가진 매력은 크다. 한 예로 동국사 내에 있는 동종은 일본의 다까하시 장인에 의해 주조된 것으로 우리나라의 범종과 생긴 모습만이 아니라 소리가 울리는 방법이 다르다. 우리나라의 범종의 경우 종의 상단 부분에 한 마리의 용이 자리하고 있다. 용의 뒷부분에 공명(共鳴)과 관계되는 음통이 있다. 동종의 배 부분에는 우리에게 친숙한 당좌와 비천상 등이 장식되어 있다. 반면, 일본 범종은 종 상단에 두 마리의 용이 자리하고 있으나 음통이 없다. 종의 본체도 당좌와 비천상 대신 단순한 선으로 구성되어 우리와 확연히 다르다. 동국사의 범종도 상부에 음통이 없고, 종소리가 아래에 위치한 항아리에서 맴돌면서 소리를 만들어낸다.



한국 사찰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시래기

범종을 끼고 동국사 대웅전 뒤편으로 들어서자 재미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동국사가 위치하고 있는 곳은 군산 시내임에도 불구하고 대나무 숲으로 우거진 모습은 이색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다. 그러나 대나무보다 더 인상 깊었던 것은 건축 뒤편에 널어놓은 시래기였다.


일본식 건축물에 한국인들의 토속적이고 서민적인 음식인 시래기가 매달려 있는 모습을 보면서 많은 생각이 떠올랐다. 시래기는 평범하고 특출 나지 않지만 영양가 높아 누구나 좋아하는 우리의 음식이다. 이 시래기가 우리를 상징하는 듯 느껴졌다. 강한 바람과 매서운 추위를 맞을수록 더욱 맛있어지고 영양이 높아지는 시래기는 모진 풍파를 겪으면서도 절대 꺾이지 않고 더욱 강해지는 우리들과 무척이나 닮았다.


나는 우연의 일치인지는 모르지만, 동국사에서 바라본 시래기를 통해 일본의 억압을 이겨내고 그 위에 새로운 역사를 써 내려가는 우리를 보았다. 일제의 가혹한 만행을 잊지 않기 위해 일본식 사찰을 그대로 두면서도, 우리가 얼마나 저력 있는 민족인지를 보여주는 동국사는 특별한 의미를 담고 있었다. 동국사는 외형만 일본 사찰일 뿐, 박은식 선생이 강조하며 이야기하던 우리의 “얼(정신)”이 강하게 어려 있는 대한민국의 자랑스러운 사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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