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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호 Sep 22. 2018

애틋한 사랑을 나눈 신채호와 박자혜

단재 신채호 선생의 사당

대한민국에 살면서 단재 신채호 선생을 처음 들어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신채호 선생은 우리에게 일제의 식민 사학에 맞서 역사를 바로 세우고자 했던 분으로 많이 기억되고 있다. 하지만 신채호 선생의 역사관과 국가관이 심오하고 어려워 이해하기 어렵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자주적인 역사관을 통해 독립을 이루고, 과거의 영광을 재현하고자 했던 분이라는 것이다. 


신채호 선생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역사학자이지만 일제 식민사학에 동조하고 대한민국 역사교육을 좌지우지했던 사람들은 신채호 선생의 역사를 허황되고 허무맹랑한 이야기로 치부해 버렸다. 그래서일까? 신채호 선생의 위명에 비해 선생과 관련된 유적지는 많지 않다. 그나마 1978년이 되어서야 충청북도 청원군에 신채호 선생의 묘소와 기념관이 건립된다.


역사를 가르치는 사람으로서 대한민국을 누구보다 뜨겁게 사랑하고 지키려 했던 신채호 선생이 태어났고 묻혀있는 묘소를 방문하는 것은 당연히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신채호 선생의 유허지는 이정표를 보고 나서도 한참을 차를 타고 이동해야 나타날 정도로 접근성이 좋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내가 도착한 날 유허지에는 전날 내린 눈 위로 산짐승의 발자국만 있을 뿐 사람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선생의 유허지에 나 외에는 방문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는 사실은 내 가슴 한편을 무겁게 했다. 




신채호 선생과 부인 박자혜

그래도 신채호 묘소에 올라가 주위를 둘러보니 유허지가 잘 관리되고 있었다. 신채호 선생의 묘소에는 신채호 선생과 부인 박자혜 여사가 같이 누워계셨고, 그 아래로는 책을 읽는 신채호 선생 옆에 묵묵히 서있는 박자혜 여사의 동상이 있었다. 


박자혜 여사는 어린 시절 아기나인으로 궁궐에서 생활하다가 나라를 망하자 궁궐에서 쫓겨났다. 이후 궁궐에서 배운 약간의 의술로 생계를 유지하던 중 3.1 운동이 일어나자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대한독립만세를 외쳤고, 그 결과 일제에 쫓기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나라의 독립에 한 몸을 바치기로 한 박자혜 여사는 북경으로 망명하여 의예과에 입학하여 학문을 익혔다. 의학을 통해 독립군의 일원으로 활동하고자 했던 여사에게 어느 날 이회영 부인이 한 남자를 소개시켜준다. 그 남자는 바로 신채호 선생이었다. 부인과 사별하고 홀로 지내던 신채호 선생과 나이차는 많이 났지만, 여사는 선생의 인물됨과 큰 뜻에 감명받고 결혼을 결심하게 된다.


자신의 안위보다는 나라의 독립을 위해 애쓰던 신채호 선생과의 삶은 궁핍했지만 늘 행복했다. 그러나 선생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과 자신으로 인해 신채호 선생이 마음껏 독립운동을 하지 못한다고 생각한 여사는 과감히 아이들을 데리고 서울로 돌아온다. 여사는 한국에서 산파원을 차렸지만, 일거리가 일정치 않아 수입이 적다 보니 궁핍한 생활은 계속 이어졌다. 


하지만 박자혜 여사는 꿋꿋하게 아이들을 키우면서 신채호 선생을 뒷바라지하는 일에 소홀하지 않았다. 의열단원들이 국내에 들어오면 여사는 그들에게 숙식을 제공하며 독립운동을 계속 이어나갔다. 동양척식 주식회사에 폭탄을 던졌던 나석주 의사도 국내에 잠입했을 때 박자혜 여사의 집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의거 활동을 준비하기도 했다.



사당에서 바라본 입구의 모습

이처럼 드러나지 않고 묵묵하게 독립운동을 하던 박자혜 여사에게 어느 날 갑자기 비보가 들려온다. 1929년 신채호 선생이 일제에 검거되어 여순 감옥에 투옥되었다는 소식이었다. 박자혜 여사는 한 걸음에 여순 감옥으로 달려가고 싶었지만, 어려운 경제 형편에 차비를 마련할 길이 없어 속으로 눈물을 흘려야만 했다. 신채호 선생이 옥중에서 너무 추워 솜이 들어있는 옷을 보내달라는 부탁을 들어주지 못할 정도로 가난했던 여사는 늘 죄를 짓는 심정으로 생활해야 했다. 그런 박자혜 여사에게 1936년 신채호 선생의 죽음은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는 순간이었다. 


“이제는 모든 희망이 아주 끊어지고 말았습니다”라고 중얼거리는 박자혜 여사를 통해 선생을 잃어버린 비통함이 얼마나 컸는지를 짐작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도 박자혜 여사는 신채호 선생이 돌아가신 이후 삶의 끈을 놓았다. 첫째 아들은 해외로 떠나고 둘째 아들이 죽자, 홀로 남은 박자혜 여사는 1943년 가난한 셋방에서 삶을 마감한다. 


신채호 선생의 유허지를 둘러볼수록 선생과 박자혜 여사의 사랑이 숭고하고 위대해 보이기만 한다. 누가 이처럼 애달픈 사랑을 할 수 있을까? 그래도 이제는 두 분이 같은 곳에 나란히 누워 서로를 보담아 주시고 계실 거다. 그러면서 독립을 이룬 대한민국을 때로는 걱정하면서도 발전하는 모습을 흐뭇한 모습으로 바라보고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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