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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호 Sep 29. 2018

백정 교회라 불리던 승동교회

눈여겨보지 않으면 찾기 어려운 승동교회 입구

서울 인사동에는 예로부터 볼거리와 먹거리가 많은 한국을 대표하는 관광지다. 그러나 인사동을 찾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한국의 옛 모습의 자취만 찾을 뿐 근현대사의 모습을 떠올리지 않는다. 그러나 보니 인사동에 백정 교회라 불리던 승동교회가 120년 동안 인사도에 있는지조차 알지 못한다.


승동교회를 모르는 또 다른 이유가 100년 전에는 인근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었으나 지금은 높아진 주변 건물에 가려 잘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비록 많은 사람들에게 잊힌 승동교회지만, 한국 개신교의 역사만이 아니라 신분제 타파와 3.1 운동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역사적인 장소다.


천주교가 조선 후기 박해를 받으면서도 꾸준하게 교세를 넓혔던 것과는 달리 개신교는 1830년대에 들어서야 조선에 들어오게 된다. 천주교보다 늦게 들어온 개신교는 전파되는 속도가 빠르지 않았기에 사회에 미치는 영향도 작았다. 그러나 조선이 미국과 영국 등 서구권 국가들과 수교를 맺자, 개신교는 빠른 속도로 한국사회에 정착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1893년 미국 북장로회 소속의 선교사 사무엘 무어가 공단골(현재 을지로 1가)에 교회를 설립했다. 이 교회가 백정 교회라 불리던 승동교회의 시작이다

옛 지붕을 간직한 승동교회의 일부

승동교회는 신도수가 16명에 불과할 정도로 작은 교회였다. 이처럼 작았던 승동교회가 한국교회의 역사와 근현대사에 빠질 수 없게 된 것은 사무엘 무어가 사람으로도 인식하지 않을 정도로 천민이었던 백정도 하나님의 자녀라는 생각으로 신분제 철폐에 앞장섰기 때문이다. 


1890년대 사람 취급받지 못하는 백정으로 살아가던 박성춘(사무엘 무어에게 받은 이름)이 있었다. 19세기 말 종교를 통해 인간평등사상이 퍼져나갔고, 사회경제적으로는 양반이 몰락하고 공노비가 사라지는 등 신분제가 와해되던 시기에 살던 박성춘은 백정으로서의 삶을 숙명으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는 백정이 아니라 인간으로 살기를 꿈꿨지만, 사회적 편견과 배우지 못한 현실에서 삶의 희망은 없었다. 그러나 박성춘은 자신의 아들만큼은 교육을 통해 백정에서 벗어나 사람답게 살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박성춘의 아들을 학생으로 받아주고 가르쳐줄 국내 교육기관은 당시 어디에도 없었다. 박성춘은 아들이 교육을 받지 않으면 자신과 같은 비참한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생각이 늘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가슴이 답답해졌다. 박성춘은 어떡하든 아들을 가르쳐야 한다는 생각으로 동분서주하며 교육기관을 찾던 중 승동교회에서 무료로 아이들에게 공부를 가르친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기독교에 대해 좋지 않은 인식이 있던 시절이기에 박성춘은 교회에 자식을 보내기는 싫었지만, 아들의 장래를 위해 두 눈을 꼭 감고 아들을 교회에 보냈다. 단, 아들에게 학문을 익히게 할 뿐 하나님에 대한 예배는 드리지 못하게 했다.


박성춘의 아들이 승동교회에서 공부를 하던 1890년대는 한반도를 둘러싸고 주변 열강들이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기 위해 각축을 벌이던 시기였다. 그러던 중 1894년 청나라와 일본이 동학농민운동을 계기로 조선의 지배권을 두고 전쟁을 벌였다.(청·일전쟁) 동학농민운동과 청·일전쟁은 끝났지만 피폐해진 삶 속에서 조선에는 전염병이 창궐하게 된다. 전쟁의 가장 큰 피해자는 일반 국민들이라고 했던가? 전쟁 내내 마음을 졸이고 제대로 먹지 못했던 많은 사람들이 콜레라에 감염되어 목숨을 잃어갔다. 이때 백정으로 사회계층의 밑바닥을 살던 박성춘도 콜레라에 걸려 사경을 헤매며 죽음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승동교회의 전경

박성춘의 아들 박봉출은 자신을 위해 모든 것을 헌신한 아버지를 위해 가만히 손 놓고 있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치료비가 없던 박성춘을 치료해줄 의사도 한 명도 없었다. 박봉출은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자신을 백정이 아닌 인간으로 대해주던 무어 목사를 찾아가 아버지를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신분제에 구애받지 않던 무어 목사는 아버지를 살리고자 울며 매달리는 박봉출의 정성에 감동하여 당시 고종의 주치의로 있던 에비슨을 찾아가 박성춘을 치료해주기를 부탁했다. 무어 목사의 간절한 부탁과 박봉출의 효심에 감동한 에비슨은 의료가방을 가지고 냄새나고 누추한 박성춘의 집을 직접 찾아가 정성껏 치료해주었다. 에비슨의 치료를 받아 살아난 박성춘은 자신을 인간으로 봐주고 생명을 살려준 무어 목사와 에비슨에게 깊은 감동을 받고 가족들과 함께 기독교로 개종한다.


백정이던 박성춘과 그의 자녀들이 승동교회를 다니기 시작하자 승동교회를 다니던 양반 출신의 신자들이 크게 반발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백정을 교회에 받아들이지 말 것을 무어 목사에게 강력하게 요구하며, 자신들의 의견이 관철되지 않으면 교회를 떠날 수 있다고 협박했다. 그러나 무어 목사는 '백정도 하나님의 소중한 자녀'라는 신념을 꺾을 수는 없었다. 결국 양반 출신의 신도들은 교회를 떠나 홍문수골교회를 새로 세우자, 승동교회의 교세는 점차 약해져 갔다.


박성춘은 자신을 살리고 교회식구로 받아들인 일로 어려움을 겪는 교회를 위해 주변 백정들에게 열심히 전도를 했다. 그 결과 많은 백정들이 승동교회의 신자가 되었다. 이때부터 사람들은 승동교회를 백정 교회라 불렀고, 교회는 늘어난 신자로 다시 교세를 회복할 수 있었다.  이후 두 교회는 다시 합쳐 1905년 지금의 자리로 이전하여 교회건물을 세우게 된다. 그 후 박성춘은 1911년 백정으로는 처음으로 장로가 되어 500년간 이어져 온 신분제를 극복하는데 큰 역할을 하게 된다.

승동교회 종과 쉼터

생사의 기로에 있던 박성춘을 살린 아들 박봉출은 에비슨이 콜레라를 치료하는 과정에서 서양의학의 효과를 보고 의술을 배우고 싶어 했다. 이를 눈치챈 에비슨은 영민하고 의지가 매우 강한 아이였던 박봉출에게 서양 의학을 본격적으로 가르쳤다.


에비슨의 도움으로 제중원의학교(세브란스병원)에서 8년 동안 열심히 공부한 결과 박봉출(이후 박서양으로 개명한다.)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의사 일곱 명 중에 한 명이 된다. 이후 박봉출은 배움을 자신의 영달을 위해서만 쓰지 않았다. 간도에 숭신 학교를 세워 민족교육에 힘썼으며 독립운동단체인 대한국민회에 참여하여 군의관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이처럼 승동교회는 박성춘을 통해 백정을 차별하는 사회적 인식이 잘못임을 실천을 통해 알렸다. 박봉출을 통해서는 백정도 이 나라의 어엿한 국민으로서 기회만 주어진다면 얼마든지 자신의 능력을 펼칠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더 나아가 백정이 세상의 쓰레기 같은 존재가 아니라 사회에 필요하며, 지금보다 나은 세상을 만드는데 기여할 수 있는 존재임을 보여주었다. 그래서 승동교회는 다른 교회보다 특별함을 갖고 있다.


3.1 독립운동 기념터를 알려주는 표지석

승동교회는 계급 타파를 통해 사회적 평등을 이끌어냈다는 점 외에도 일제강점기 최대의 민족운동이었던 3.1 운동 중심지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1919년 2월 20일 연희전문학교에 재학 중인 김원벽을 중심으로 20명의 학생 대표들이 승동교회에 모여 제1회 학생지도자 회의를 열어 3.1 독립운동을 준비했다. 그리고 3.1 독립만세를 외치기 직전 독립선언서 1500매를 학생대표들에게 전달한 장소가 승동교회다.


3.1 독립운동의 주역이던 학생대표들이 모인 장소라는 의미 외에도 승동교회의 차상진 목사가 일제의 3.1 운동을 탄압하는 행위에 항의하는 '12인의 장서(청원서)'를 조선총독에게 제출했다가 투옥되기도 했다. 독립운동을 위한 학생들의 사전모임 장소였고, 일제에 저항하는 목사의 활동으로 승동교회는  일제 경찰의 탄압을 줄기차게 받아야 했다. 하지만 승동교회는 일제의 협박과 탄압에 굴복하지 않았다. 일제강점기 내내 승동교회는 청년들이 꿈을 키우고 독립을 향한 힘찬 걸음을 내딛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든든한 울타리가 되었다. 1922년에는 승동교회에서 조선여자 기독교청년회(조선 YWCA)가 설립되었고, 1939년에는 한국인에 의한 최초의 '조선신학교'가 출발하였다.


이처럼 승동교회는 한국의 교회 역사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기도 하지만, 신분제를 허무는 시작점이었으며 독립운동의 중심지였다. 인사동을 방문할 일이 있다면 잠시 시간을 내어 승동교회를 방문해본다면 어떨까? 수없이 스쳐 지나가던 장소도 역사적 사실을 알게 되면 특별한 장소가 된다. 인사동의 색다른 여행지로 승동교회를 소개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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