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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호 Aug 25. 2018

교조화의 위험성을 보여주는 화양서원

충청북도 괴산군

    

계곡 옆에 위치한 화양서원

충북 괴산은 오늘날 많은 사람들로 번잡하고 복잡한 이미지보다는 속리산의 아름다운 풍경을 먼저 떠오르게 한다. 그래서일까? 괴산은 자연과 어우러지는 여행지가 많다. 그중에서도 화양구곡은 괴산을 대표하는 관광명소다.


화양구곡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옆으로 조그마한 화양서원이 위치하고 있다. 화양구곡을 지는 사람들이 가끔 눈길을 주지만, 정작 서원을 보기 위해 찾아오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러나 화양구곡 옆에 위치하고 있는 화양서원은 조선 후 국가에서도 쉽게 건들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힘과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화양서원은 조선시대에 '子'를 유일하게 붙인 우암 송시열을 모신 서원이다. 송시열은 조선 후기 정국을 이끌어가던 노론의 영수로 그를 따르는 사람들에 의해 교조화된 인물이다. 숙종 15년 83세의 송시열은 제주도에 유배되었다가 서울로 압송되던 중 정읍에서 사약을 먹고 죽음을 맞이했지만, 송시열의 영향력은 살아있을 때보다 죽은 이후 더욱 강해졌다.


송시열은 긴 세월 동안 현직에서 나랏일을 많이 하지 않았지만, 그의 말 한마디는 국가 운영의 방향성과 틀을 바꿀 수 있는 힘 있었다. 송시열은 자신의 정치적 이념과 학문적 성향이 다르면, 사문난적으로 몰아 정계에서 축출했다. 이때 축출된 대표적인 인물로 윤휴를 거론할 수 있다. 


우암 송시열  사후 이후 조선은 학문사상과 국가 경영에 있어 다양한 의견이 공존하지 못하는 경직화된 모습을 보인다. 결국 송시열의 학문과 정치사상을 따르지 않는 남인과 소인들이 정치권력에서 배제되면서, 송시열은 노론에 의해 교조화 다.

                       

송시열은 사약을 먹고 죽었지만 숙종 20년(1694년)에 복권되면서, 그를 제향 하는 서원이 전국 각지에 많이 세워졌다. 당시 송시열을 제향 하는 서원중에 국가로부터 사액을 받은 서원만 37개에 달했다고 한다. 이는 송시열의 영향력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알 수 있다. 그중에서도 최고의 정점에 있는 서원이 화양서원이다.


화양서원은 송시열의 제자였던 권상하가 설립한 이후 국가로부터 사액을 받아 송시열과 함께 임진왜란 당시 군대를 파병한 명나라 황제 신종과 마지막 황제 의종의 신위를 모시는 사당을 지어 제향을 올렸다. 이후 명나라 황제를 모시는 사당에 선조가 어필로 적은 '만절필동(東-강물이 꺾여 굽이치더라도 반드시 동쪽으로 흘러간다는 사자성어로 충신의 절개를 의미함)'에서 이름을 빌려와 만동묘라 불렀다.



화양서원 외삼문

소중화(小中華-작은 중국)로 조선을 인식하고 자랑스러워하던 송시열과 그의 학파에게 있어 만동묘는 그들이 존재하고 권력을 가질 수 있는 사상적 기반이었다. 청나라를 섬기면서도 조선이 청보다 우위에 있다는 소중화로서의 인식은 전쟁의 패배를 인정하지 않고 극복할 수 있는 구실이 되었다.


조선 후기 내내 많은 왕들은 만동묘를 중히 여기며 각종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영조는 만동묘 제사를 올리는데 필요한 토지와 노비를 하사하며 예조 90명이 묘우를 돌아가며 지키도록 하였다. 정조는 어필로 사액을 하사했으며 헌종 때에는 음력 3,9월에 관찰사가 제사를 지니게 했다. 이처럼 국가가 적극적으로 화양서원에 지원을 하자 서원의 힘은 점차 막강해져 갔다. 


화양서원은 강원도와 삼남에 많은 토지를 소유하는 것에 그치지 아니하고 제사를 지내는 시기가 되면 화양묵패를 전국 각지에 돌렸다. 화양묵패는 서원에서 지내는 제사를 위해 필요한 물품과 경비를 정해진 날짜에 봉납(헌납)하라는 문서였다. 당시 문서에 묵인을 찍어 군현에 발송했기에 묵패라고 불렀다. 묵패를 받고도 이에 응하지 않을 경우 화양서원이 사형까지 내릴 수 있었다고 하니 국가 권력을 능가하는 힘이었다.


또한 제향이 이루어지는 봄과 가을에는 수천 명의 유생들을 접대하기 위해 음식과 술을 파는 복주촌이 열렸다. 복주촌을 여는 과정에서 인근 양민들에게 강제로 돈을 징수하거나, 부역을 면하게 한다는 명목으로 돈을 받는 경우가 발생하면서 많은 문제를 일으켰다. 


당시 권력을 움켜쥐고 운영하던 사람들에게도 화양서원의 횡포는 감당하기 어려웠는지 19세기 세도정치 때 영의정에 있던 김좌근의 주청으로 1858년 복주촌을 철폐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도 큰 효력이 없었는지 1862년 원우를 수리한다는 명목으로 전라도에까지 재물을 거두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이 외에도 화양서원의 횡포를 보여주는 재미난 일화도 있다. 안동 김씨의 눈치를 보며 하릴없이 세월을 보내던 흥선대원군이 말을 타고 화양서원 앞을 지나가자, 유생들이 왕실 종친이라도 화양서원 앞을 지나칠 때는 말에서 내려 예를 구하라며 매질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훗날 흥선대원군이 집권한 후 왕권을 강화시키기 위해 서원을 철폐하는 과정에 화양서원이 포함된다. 조선 후기 큰 힘을 가졌던 화양서원이 47개의 서원에 포함되지 못한 것은 젊은 시절 모욕을 당했던 흥선대원군의 개인적인 원한이 담겨 있지는 않았을지 조심스레 추측해본다.


그 이후 서양문물이 물밀듯이 밀려오는 격동기 속에서 성리학은 더 이상 사회를 운영하는 틀이 되지 못하면서 화양서원도 점차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히게 된다. 특히 일제가 조선을 지배하려는 과정 속에서 중국을 섬기는 풍토를 없애기 위해 많은 전각들을 없애는 과정 속에 화양서원에 있던 만동묘도 철폐되어버린다.



화양서원 만동묘

1942년 일제가 화양서원의 건물을 모두 철거해버리는 과정에서 만동묘 묘정비를 훼손시켜버렸다. 일제는 묘정비에 새겨진 글자획을 쪼아버린 후 땅에 묻어버렸다. 그렇게 사람들의 기억 속에 잊혔던 만동묘 묘정비는 1983년 큰 홍수 때 다시 세상에 나오게 된다. 이후 사람들이 만동묘와 화양서원을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화양서원은 예전의 큰 영화는 잃어버린 채 지나가는 사람들의 작은 관심거리로 전락해버렸지만, 개인적으로 그리 아쉽지는 않다. 우선은 큰 나라에 무조건적으로 맞추어야 한다는 사대주의의 표상인 만동묘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부정적이고 안 좋은 모습을 간직했기 때문에 아쉬운 것은 아니다. 아무리 좋지 않은 역사라도 소중히 간직하고, 다시는 되풀이하지 않는 타산지석으로 삼아야하기 때문이다.


화양서원이 마냥 편하지 않은 진짜 이유는 송시열 개인을 통해 권력 정당성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이는 국가와 국민에게서 권력의 정당성이 나온 것이 아기 때문이다. 조선 후기 노론들은 국가가 수백 년에 걸쳐 민의를 반영하고 만들어놓은 제도 법을 무시하고 어겼다. 권력의 정당성을 송시열을 교조화시킴으로서 이끌어내고, 국가 위에 군림했다. 어떠한 정당성도 갖지 못한 채 힘을 행사하고 그것을 당연시했던 행태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모든 법과 제도가 완벽하지는 않다. 그러나 현재의 법과 제도는 우리가 필요하다고 국민들이 합의하고 만든 것이다. 정당하고 합법적인 절차를 거치지 않고 사회 질서를 어지럽혀 국민들을 힘들게 만드는 모습이 조선 후기에만 있는 것 같지는 않다. 현재 우리도 국민들이 부여하지 않은 개인이 국가 권력을 움켜쥐고 남용하는 모습을 여러 번 지켜보고 있다. 앞으로는 국민들이 부여한 권력을 바탕으로 대표자와 기관들이 정당하게 권력을 행사하기를 바라본다. 풍경 좋은 화양구곡에서 무거운 주제를 가지고 다가가는지는 모르겠지만, 때로는 과거를 통해 현재를 반성하고 미래를 설계해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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