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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호 Oct 13. 2018

구석기 시대 살던 흥수아이, 그때도 흥수란 이름이?

1982년 12월5일 저녁 무렵, 이융조 충북대 교수에게 전화 한 통이 울렸다. 오래전부터 인연을 맺고 있던 김흥수 씨가 두루봉 동굴에서 사람의 이빨 같은 뼈가 나왔다는 내용의 전화였다.


김흥수 씨는 1976년부터 충북 청원에서 석회암 광산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광산현장에서 오래된 동물의 뼈들이 계속 출토되었다. 이를 중요하게 생각한 김흥수 씨는 충북대 이융조 교수에게 알렸다. 이융조 교소가 동굴에서 사람뼈가 출토되면 매우 중요한 일이니 꼭 연락을 달라는 당부를 해왔기 때문이다. 


사람 뼈가 출토되자 김흥수 씨는 많은 고민을 했다고 한다. 사람뼈가 출토되면 발굴이 이루어지면서 광산 운영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생활을 더 이상 하지 못할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랜 고민 끝에 역사의 발전을 위해 용기를 내어 이융조 교수에게 전화를 건 결과 출토된 사람의 뼛조각은 다섯 살 정도로 추정되는 4만년 전 구석기 시대에 살던 어린 아이의 뼈로 판명이 됐다.


당시 발굴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최초의 발견자였던 김흥수 씨의 이름을 따서 동굴이름을 흥수골이라 명명하고, 발견된 아이의 이름도 흥수 아이라 불렀다. 이는 당시 아무런 보상금 없이 문화재보호구역으로 지정되면서 광산업이 중단되는 상황에도 불구하고, 발견 소식을 알려준 보답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사람이름을 유적이름에 붙인 첫 번째 사례가 되었다.


김흥수 씨의 용기 있는 결단으로 세상에 알려진 흥수 아이는 4만 년 전 후기 홍적세 시대에 살던 두명의 어린아이다. 흥수 아이 제1호는 60% 이상의 뼈가 남아있었고, 제2호는 몸체만 발견이 되었다. 


흥수 아이는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로 4~6살의 나이에 머리 크기는 1200∼1300㏄, 키는 110∼120㎝로 현대의 우리와 비슷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더욱 놀라운 것은 뼈 주변에 고운 흙과 국화꽃이 뿌려져 있어 구석기 시대의 생활상을 추정할 수 있게 도움을 준 것이다.                     


일반적으로 구석기 시대는 무리를 지어 이동하며 사냥과 채집 그리고 어로생활을 통해 생활했다고 알려져 있다. 이 과정에서 사냥감의 번성과 사냥의 성공을 기원하며 원시 종교를 가지고 예술활동을 전개했다는 사실이 흥수 아이를 통해 국내에서 입증된 것이다. 그리고 우리 민족의 기원이 어디인지를 밝힐 수 있다는 점에서 흥수아이는 매우 큰 의미를 갖는다.


충북대로부터 감사장을 받은 것이 전부였던 김흥수 씨는 경제적으로 손해를 봤지만, 후회하지 않았다. 우리 역사를 바로 정립하는데 큰 기여를 하고, 자신의 이름을 딴 유적이 나왔다는 점에 보람과 자긍심을 느낀다고 말했다. 개인의 이익보다는 공익을 우선할 줄 아는 이런 분들이 있었기에 오늘날 우리가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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