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
이승만 대통령이 집권했던 제1공화국은 6‧25 전쟁을 극복하고 한‧미 상호 방위조약과 무상원조를 미국으로부터 이끌어냄으로써 대한민국을 수호했다는 평가를 듣는다. 하지만 이승만은 자신이 아니면 대한민국이 무너진다는 생각했는지, 유난히 권력에 대한 강한 집착을 보였다. 결국 이승만 정부는 군사적 안보와 경제 위기를 극복하는데 많은 기여를 했으나, 권력을 독점하기 위해 온갖 부정비리를 통해 국민의 기본권을 짓밟았다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6‧25 전쟁 직전 실시된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이승만을 지지하지 않는 국회의원이 대거 당선되었다. 이는 이승만 정부가 친일파 관료들을 통해 국정을 운영하면서 온갖 비리가 끊이지 않았고, 국민들이 수십 년 동안 염원하던 친일파를 처벌하기 위해 출범한 반민특위의 활동을 방해하고 위축시켰기 때문이다. 여기에 6·25 전쟁이 발발하자 이승만 대통령은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전국 각지로 도망 다니는 무책임한 행동을 보였다. 그 외에도 지휘관의 군수품 횡령으로 1,000명이 굶어 죽은 국민 방위군 사건과 거창 양민 학살 사건 등 수많은 잘못이 연이어 터져 나왔다.
출근하는 국회의원 통근버스 납치
당시 국회의원이 대통령을 선출하는 간선제로는 대통령이 될 수 없다고 파악한 이승만은 자신의 지지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자유당을 창당하고, 1952년 일부 국회의원을 간첩으로 몰아 구속했다. 이와 같이 국회의원도 언제 어디든 체포 구금할 수 있다는 공포 분위기를 조성한 뒤, 기립 투표라는 불법적인 방법으로 대통령 직선제를 통과시켜버렸다. 그리고 실상을 잘 모르고 전쟁으로 정치에 관심을 둘 수 없는 국민들에게 자신만이 미국을 움직여 전쟁을 이길 수 있다고 홍보한 결과 제2대 대통령에 취임할 수 있었다.
1954년에는 국회 표결 정족수 1명이 모자라 부결된 대통령 3선 금지 조항을 반올림 셈법으로 헌법을 개정하는 사상초유의 일을 벌이기도 했다. 이를 사사오입이라 부른다. 이로써 제3대 대통령 후보로 출마할 수 있었던 이승만은 강력한 경쟁자였던 민주당 후보 신익희가 갑작스럽게 죽으면서 어렵지않게 1956년 제3대 대통령으로 취임할 수 있었다.
5명이 한 조가 되어 투표하러 가는 모습
제4대 대통령을 뽑는 1960년에도 민주당 대통령 후보였던 조병옥도 갑작스럽게 죽자, 단독 후보가 된 이승만은 당선이 확실시되었다. 그러나 문제는 이승만이 고령이라는 점이었다. 이승만이 대통령직을 수행하다 죽으면 부통령이 대통령직을 승계해야 하는데, 문제는 자유당 부통령 후보던 이기붕의 지지율이 매우 낮았다는 것이었다.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이기붕을 부통령에 당선시킬 수 없다는 사실을 인지한 정부와 자유당은 공무원, 마을 이장, 경찰, 정치 깡패를 동원하여 온갖 부정행위를 저질렀다. 심지어 선거 당일에는 투표함을 통째로 바꾸기도 했다.
이처럼 노골적인 부정선거는 국민들의 강한 저항을 불러일으켰다. 전국 각지에서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시위가 일어나자, 이승만 정부는 부정선거의 책임을 물어 내무부 장관을 사임시켰다. 이 때 시위에 나섰다가 실종되었던 고등학생 김주열이 한쪽 눈에 최루탄이 박힌 차가운 시신으로 마산 앞바다에서 발견되었다. 김주열 학생의 시신이 전국에 알려지자, 부정선거에 이어 경찰의 강경진압에 국민들은 크게 분노했다. 이에 시민들은 대통령 집무실인 경무대 앞까지 행진하여 강하게 항의를 하자, 경찰은 시위대를 향해 총을 난사하고 군대를 동원하는 비상계엄을 선포하였다.
시민에게 발포하지 않는 계엄군
다행히 탱크를 앞세워 서울로 들어온 계엄군은 어린아이도 참여하는 시위대를 보면서 계엄령에 명분이 없다고 판단하고 발포 중단 명령을 내렸다. 이승만 정부는 시국이 생각했던 방향으로 잘 흘러가지 않자, 이기붕 부통령 당선자 사퇴와 이승만의 자유당 총재직 사임으로 마무리지으려 했다. 그러나 국민들은 이승만 정부의 술책에 넘어가지 않고 민주화 시위를 멈추지 않았다. 결국 군대를 지휘 통솔할 수 없었던 이승만은 ‘국민이 원한다면 물러나겠다.’는 성명을 발표하고 미국으로 망명했다.
그런데 이승만의 ‘국민이 원한다면 물러나겠다.’라는 말은 국민과 대한민국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겠다는 말로 들리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의 책임을 남에게 떠넘기는 비겁한 말처럼 들린다. 끝이 좋아야 한다는 말이 있다. 인생 대부분을 대한민국을 위해 살아왔던 독립운동가의 말로가 이처럼 비극적인 것은 우리 역사의 아픈 한 대목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