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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호 Dec 14. 2018

3·1 운동은 학생들이 주도했기에 성공할 수 있었다.

민족대표 33인

1910년 나라를 빼앗기자 많은 한국인들은 나라의 소중함과 필요성을 인식했다. 구한말도 온갖 부조리와 무능력한 관료들로 인해 많은 이들을 힘들었지만, 그래도 일제의 만행보다는 나았다. 구한말과 일제강점기의 차이를 말하자면, 구한말은 우리 스스로 잘못을 바로 잡을 수 있는 기회가 있지만, 일제강점기는 그런 기회조자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 스스로 어떠한 것도 변화시킬 수 없는 상황에서 일제의 수탈과 탄압은 날로 심해져갔다. 심지어 일제는 한국인의 눈빛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정식 재판도 없이 때리고 가두었다. 이와 같은 시간을 10년 가까이 보내다보니 소수의 친일파를 제외한 모든 한국인들의 가슴속에는 나라를 되찾고자 하는 열망이 피어날 수밖에 없었다.


이 때 해외에서 희망의 소식들이 전해왔다. 미국 대통령 윌슨이 “민족 자결주의”를 통해 모든 민족은 스스로 자신의 국가를 세울 수 있다고 주장했다는 소식이었다. 이에 고무된 여러 사람과 단체들이 앞 다투어 일제에 독립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중국 상하이의 신한 청년당은 독립 청원서를 작성하고 파리 강화 회의에 민족 대표로 김규식을 파견했다. 미국 대한인 국민회의 이승만은 미국 대통령에게 독립 청원서를 제출했다. 한반도 가까이에서는 만주 지린 성에서 민족 지도자 39인이 대한 독립 선언서를 발표했고, 일본 도쿄에서는 유학생이 조선 청년 독립단을 조직하여 2·8 독립 선언을 발표했다. 여기에 일제가 고종을 독살했다는 사실이 널리 퍼지자 독립에 향한 민족감정이 높이 고조될 수밖에 없었다.




만세를 부르는 학생과 민중

이에 종교계를 중심으로 하는 국내 민족 지도자들은 온 겨레가 다 함께 독립을 요구하자는 만세 시위를 계획한다. 천도교의 손병희와 기독교의 이승훈 그리고 불교계의 한용운 등 33인으로 구성된 민족 대표는 1919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일제에 국권 반환 요구서를 보낸 다음, 탑골 공원에서 독립 선언서를 낭독하고 군중과 함께 거리 시위를 결의했다. 그러나 3월 1일 지방에서 서울로 올라오지 못한 민족대표 4명을 제외한 29명의 민족지도자들은 탑골 공원에 4,000~5,000여명의 학생들이 모였다는 사실에 기쁨과 함께 큰 걱정이 하게됐다. 미래에 독립을 이끌어야 할 많은 젊은이들이 일제에 의해 희생될 수 있다는 사실이 걱정된 민족지도자들은 학생들과 만세를 외치자고 했던 약속을 어기기로 한다. 민족지도자들은 학생들 모르게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 스스로 일제 경찰에 신고하고 잡혀갔다.


그 순간 탑골공원에 모인 학생들은 독립에 대한 뜨거운 열정을 품고 민족대표들과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 바람을 가진 학생들에게 민족 지도자들이 연행은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이었다. 이 때 어찌할 바를 모르던 헤매던 학생들 사이로 한 학생이 팔각정에 올라가 독립선언서를 읽고 만세를 외쳤다. 이 학생의 우렁찬 만세소리에 우왕좌왕하던 학생들은 금세 하나가 되어 탑골공원을 빠져나와 거리에서 태극기를 흔들며 꺼져가던 3·1운동의 불꽃을 살렸다. 이 때 탑골공원 팔각정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학생이 정재용(1886~1976)이라고 알려져 있다. 





어찌 보면 조용히 꺼질수 있었던 3·1운동을 거족적인 운동으로 발전시킨 것은 바로 10~20대의 젊은 학생들이었다. 학생들에 의해 독립운동이 확산되는 것을 우려한 일제는 학생들이 집단행동을 할 수 없도록 휴교령을 내렸다. 그러자 학생들은 누구 할 것도 없이 고향으로 내려가 태극기를 만들고 시장터로 나가 대한독립선언서를 외치며 만세시위를 주도했다. 이로서 서울에서 시작된 만세운동은 학생들에 의해 전국으로, 그리고 전국을 넘어 세계로 퍼져나갔다. 그리고 전 세계 한국인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라도 태극기가 휘날리며 독립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어찌보면 3·1운동은 세상과 쉽게 타협하는 기성세대와는 달리 세상의 잘못과 불의에 타협하지 않으려는 올곧은 마음을 가진 학생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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