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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호 Dec 07. 2018

100년 후에 성공한 국채 보상 운동

서상돈

을사늑약 이후 본격적으로 대한제국을 식민지로 만들기 위해 정치·사회·경제·문화 전 분야에서 일제는 침략의 마수를 뻗어왔다. 정치적으로는 을사늑약을 통해 전 세계에 한반도가 일본의 것이라고 공표하고 인정받았으니 더 이상 문제될 것은 없었다. 정치문제 다음으로 해결해야 할 일이 대한제국의 경제를 일본에 예속시키는 것이었다. 식민지를 만드는 가장 큰 목적이 경제적인 수탈에 있다는 점을 가지고 보았을 때, 대한제국의 자본을 약화시키는 일은 일본에게 매우 중요했다.


일제는 통감부를 설치한 이후 식민지 경영에 필요한 기구와 철도·항만과 같은 기간산업을 확충하는 일이 시급했다. 대한제국이 식민지가 된 후에는 일본의 돈으로 해결해야했기에, 가급적 대한제국의 돈으로 건설하는 것이 바람직했다. 이것만이 아니라 대한제국이 차관의 빚을 갚느라 경제력이 약화되면 식민지를 만드는데 필요한 시간과 노력이 단축되고, 일본은 이자만으로도 큰 수익을 낼 수 있었다. 그러니 대한제국에 차관을 제공하는 일은 일본에게 일석삼조(一石三鳥) 이상의 효과였다. 


1907년 대한제국이 일본에 진 빚이 당시 1년 예산과 맞먹는 1,300만원을 넘어섰다. 지금의 화폐단위로는 1,300만원이라는 돈이 커보이지 않을수도 있다. 경제 대국이 된 대한민국과 허약했던 대한제국의 1년 예산을 단순 비교하는 것이 옳지는 않지만, 1,300만원이라는 돈의 가치를 가장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하다. 2018년 대한민국 국가예산이 429조원이니, 대한제국이 일본에 진 빚이 얼마나 컸는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이런 심각성을 인식한 민족 지도자들이 전국 곳곳에서 큰 한숨을 쉬고 있을 때, 대구에서 서상돈(1850~1913)을 중심으로 국채 보상 기성회가 결성되었다. 이들은 일본으로부터 경제적 독립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자발적인 모금운동을 전개해나갔다. 남자들은 술과 담배를 끊고 성금을 냈으며, 여성들은 비녀와 가락지를 보상금으로 내놓았다. 고종도 백성들의 행동에 금연의 의지를 보이며 국채 보상 운동을 독려했다.  




베델

특히 양기탁과 베델(1872~1909)이 운영하는 대한매일신보는 국채 보상 운동을 전국에 알리고 보급시키는데 아주 큰 역할을 담당했다. 대한매일신보를 통해 국채 보상 운동 소식을 접한 사람들은 남녀노소, 직업에 상관없이 적극적으로 모금 운동에 참여했다. 하층민을 구성하던 인력거꾼과 백정들도 성금을 내놓았고, 기생들도 적극 참여했다. 어떤 기생은 서상돈이 출연했던 800원보다 더 많은 1,000원을 내놓기도 했다. 


일본의 입장에서 국채 보상 운동은 달갑지 않은 항일 운동이었다. 실제로 국채 보상 운동은 나라를 빼앗기지 않으려는 국권 회복 운동이자 항일 운동이었다. 일본은 국채 보상 운동을 제재하기위해 국채 보상 운동의 중심에 있던 양기탁과 베델을 횡령죄로 구속시켜버리는 악랄한 방법을 사용했다. 영국인이었지만 우리 민족을 사랑하던 베델을 국외로 추방시켜버리고자 일본은 주한 영국총영사에게 계속 압력을 가했다. 그 결과 1908년 5월 베델은 3주간의 금고와 벌금형을 선고당한다. 그리고 같은 해 7월 일본은 양기탁이 국채 보상 운동으로 모금된 돈 3만원을 횡령했다며 구속시켜버렸다. 누구보다 국채 보상 운동에 앞장섰던 양기탁과 베델이 횡령죄로 구속되어버리자 국채 보상 운동의 열기는 급속도로 식어버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우리 민족끼리 서로를 의심하고 믿지 못하는 풍토를 만들고, 나라를 위해 애썼던 분들이 스스로를 자책하게 했다. 얼마 뒤 양기탁이 무고죄로 풀려났으나, 국채 보상 운동은 살아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금 모으기 운동

이후 일본은 더 많은 차관을 대한제국에 빌려주어 식민통치의 토대를 마련하고 1910년 한일강제병합을 한다. 이로부터 100년이 지난 1998년 IMF를 맞은 대한민국은 또다시 나라 빚을 갚기위한 금 모으기 운동이 진행되었다. 역사 속에서 실패한 국채 보상 운동을 교훈삼아 정부가 주도하여 횡령 등 문제의 소지가 될 수 있는 것을 미리 방지하고 모금운동을 벌였다. 실제로 금모으기 운동이 경제위기를 극복하는데 물질적으로 큰 도움이 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어려움을 같이 이겨내자고 하는 우리의 마음을 하나로 모으면서 IMF를 극복할 수 있게 했다. 긴 안목에서 본다면 국채 보상 운동은 실패한 운동이 아니라 성공한 운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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