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MBC암행어사
1800년에 정조가 죽고 순조가 11살의 나이로 왕으로 즉위하자 조선의 정국은 다시 혼란스러워진다. 영조의 계비인 정순왕후(貞純王后)가 수렴청정을 하면서 노론 벽파에 의해 정조가 육성했던 신진관료들은 귀양을 가거나 죽음을 당해야했다. 이 과정에서 병자호란 당시 유명했던 김상헌의 후손이었던 김조순(金祖淳)은 정조의 명을 따라 순조를 옆에서 보필하며 정치적인 두각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러나 1804년 수렴청정이 끝나고 순조가 직접 정치의 일선에 나오자, 김조순은 노론 벽파를 몰아내고 안동 김씨가 정국을 주도하는 세도정치를 시작한다. 이후 흥선 대원군이 고종을 왕으로 즉위시키기까지 60여년동안 조선은 안동 김씨, 풍양 조씨 등 왕의 외척에 의해 비정상적인 국가운영이 이루어진다.
안동 김씨 세도가는 비변사를 통해 인사권을 독점하고 주요 관직을 독점했다. 소수의 가문사람들이 중요 관직을 독점하자, 조정 내에는 이를 비판하고 견제할 세력이 사라지게 된다. 더욱이 세도가는 관직을 매매하면서 경제적 기반 마련과 함께 관리들의 약점을 잡아 자신의 뜻대로 조정을 움직일 수 있었다.
세도가에게 돈을 주고 관직에 나간 벼슬아치들도 좋은 자리로 옮기거나, 관직을 유지하기 위해선 매년 뇌물을 바쳐야만 했다. 벼슬을 얻고 유지하는데 소요되는 막대한 비용은 농민들을 괴롭히고 수탈한 재물로 충당되었다. 이를 삼정의 문란이라고 하는데 전정·군정·환곡을 말한다.
수령들은 전정을 통해 토지대장에 없는 토지에 세금을 부과하거나, 정해진 금액보다 더 많이 걷어 들였다. 군정에서는 어린아이나 죽은 사람에게까지도 병역의 의무를 부과하여 군포를 걷었다. 환곡을 통해서는 백성에게 강제로 곡식을 대여하고 높은 이율로 빌려준 원곡(元穀)보다 더 많이 걷어 들였다. 삼정의 문란으로 과도한 세금을 이겨내지못하고 많은 백성들이 도망가자, 수령들은 이웃이나 친족에게 도망간 사람의 세금까지 떠넘겼다.
출처 : EBS 다큐프라임
백성들이 수령의 수탈을 이겨내지 못하고 고향을 떠나 불안한 삶을 영위하면서 사회 불만이 높아지자, 조정은 관리들의 비리를 밝히기 위해 암행어사를 보냈다. 암행어사는 지금으로 따지면 비밀 감찰활동을 하는 관리를 말한다. 부조리를 바로 잡는 암행어사로 수령들이 잘못된 행위를 멈추고 선정(善政)을 베풀 것이라 예상하지만, 실제로는 정반대의 현상이 일어났다. 백성들은 암행어사의 행차를 반기기는커녕 자신들의 고을로 오지말라고 항의하는 경우도 있었다.
암행어사는 비밀리에 업무를 진행해야 하지만, 실제로는 수령에게 몇 날 몇시에 방문하겠다고 미리 통보하고 방문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암행어사도 자신의 능력으로 관직에 오른 경우보다는 세도가에게 뇌물을 갖다 바친 사람이 더 많았다. 그렇게 암행어사가 된 자들이 국가와 백성을 위한 활동을 할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수령들이야 백성을 상대로 재물을 뜯어낼 수 있는 기회가 많았지만, 암행어사는 직접 백성을 상대로 수탈을 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관리가 되기 위해 바친 돈과 앞으로 축척할 비용을 충당하는 방법은 수령으로부터 받는 방법이 최고였다. 또한 암행어사 자신보다 세도가와 더 가까운 수령을 잘못 건드는 경우에는 자신의 목이 잘릴 수도 있었다.
결국 수령에게 방문시기를 알려주면, 수령은 암행어사 접대비와 뇌물을 마련하기 위해 백성들을 수탈했다. 이러다보니 암행어사가 온다는 것은 삼정의 문란을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백성들에게 이중부담을 안겨주는 것이었다. 그러다보니 암행어사가 같은 지역으로 여러 번 오는 경우 백성들은 살기위해 공식적으로 항의할 수 밖에 없었다.
이처럼 1800년대의 세도정치기간동안 계속 이어지는 흉년과 삼정의 문란은 조선을 허약하게 만들고 백성들에겐 지옥과 같은 삶을 선사했다. 반면, 세도가들에게 조선은 지상낙원이요, 극락이었다. 관리들의 자질과 더불어 공적인 권력을 사적인 이익을 위해 사용하는 정치의 퇴보가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를 잘 보여주는 세도정치는 오늘날에도 시사 하는 바가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