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주가 무엇인지 보여준 강감찬 장군

by 유정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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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민족은 수많은 외침을 당하며 힘든 시간을 오랫동안 견뎌야했다. 때로는 나라를 빼앗기며 힘든 시절을 보내기도 했으나, 강대한 나라의 외침에 큰 승리를 거둔 역사도 많다. 그중에서도 고구려의 살수대첩‧ 고려의 귀주대첩‧조선의 한산도대첩을 3대 대첩으로 꼽는다.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에는 3대 대첩 중 귀주대첩의 주인공인 강감찬(948~1031)의 사당과 동상을 만들어놓은 낙성대 공원이 있다. 그리고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강감찬이 태어난 장소의 유허지가 보존되어 있다. 낙성대공원에는 강감찬과 관련된 기록을 보여주는 작은 박물관도 있어서 아이들과 방문하면 좋은 교육이 될 수 있다.

강감찬은 금주(지금의 관악구 봉천동 일대)에서 오랫동안 터를 잡고 살아가던 강궁진의 아들로 태어났다. 강궁진은 금주 지역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호족으로 태조 왕건을 도와 고려가 삼국을 통일하는데 큰 기여를 한 벽상공신이다. 강궁진의 아들로 무엇 하나 부족함 없이 자라던 강감찬에게 부족한 것은 왜소한 키와 곰보자국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강감찬 스스로 얼굴에 곰보자국을 만들었다는 전설과 어린 나이로 관직에 나섰을 때 아랫사람이 무시했다는 전설은 강감찬의 외모가 보잘 것 없음을 뒷받침한다. 아무래도 왜소한 체격과 외모는 젊은 시절의 강감찬에게 많은 제약을 준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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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에 따르면 강감찬은 굉장히 잘 생긴 인물이었다고 한다. 강감찬은 어린 시절 인물과 재주가 너무 뛰어나면, 다른 이의 시기와 질투로 제 능력을 펴기 어렵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마마신(옛날에는 천연두를 마마신이 퍼뜨린다고 생각했다.)을 불러다 스스로 병에 걸린 뒤 얼굴에 곰보 자국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래서였을까? 20살의 어린 나이로 지역을 책임지는 관리로 파견 나갔을 때, 호장과 부호장이 말도 안 되는 트집으로 강감찬을 무시했다. 그들의 눈에 키도 작고 볼품없는 외모를 가진 강감찬이 집안의 힘으로 높은 자리를 차지했다고 봤다. 호장과 부호장이 명령을 따르지 않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나자, 강감찬은 어느 날 수숫대를 가져다가 그들의 소매 속에 넣으라고 하였다. 길이가 1m가 넘는 수숫대를 가지고 어찌하지 못하는 호장과 부호장의 모습에 강감찬은 1년도 안된 수숫대도 마음대로 하지 못하면서 20년 된 나를 마음대로 조종하려 드느냐며 호통 쳤다. 이후 강감찬의 인물됨을 알아차린 아랫사람들은 다시는 함부로 행동하지 않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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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감찬은 외모와 체격이 사람의 인물됨과 능력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인물이다. 관악구의 낙성대란 지명이름이 강감찬에게서 나왔음은 너무도 잘 알려져 있다. 송나라 사신이 고려에 방문하였을 때, 하늘에서 떨어지는 별을 발견하고 쫓아갔다. 별이 떨어진 곳에서 사내아이가 태어나는 것을 보고, 송나라 사신은 북두칠성의 네 번째 별인 문곡성이 여기에 있다며 절을 올렸다. 이 때 송나라 사신에게 절을 받은 아이가 바로 강감찬이다. 모든 전설에는 사실에 기반을 두고 있다. 문곡성은 문인으로 성공 여부를 결정하는 문운(文運)을 상징하는 북두칠성의 네 번째 별로, 강감찬이 과거 시험에서 장원급제한 인재라는 사실을 담고 있다. 또한 송나라 사신이 찾아와 절을 올린 것은 강감찬이 거란군을 물리친 결과, 송나라가 위기를 벗어났음을 고려인들이 자랑스럽게 여겼음을 의미한다. 이 외에도 인왕산의 호랑이를 압록강 너머로 내쫓았다는 전설 등 강감찬의 비범한 능력을 보여주는 이야기가 많이 전해진다.


유독 강감찬의 뛰어난 능력을 칭송하는 전설이 많은 이유는 뭘까? 강감찬이 인간의 능력을 뛰어넘어 신과 같은 능력을 가졌다고 보는 이유는 고려 초 거란의 침입을 막아낸 데 있다. 거란은 993년부터 1019년에 이르기까지 26년 동안 고려를 침입하였다. 이 과정에서 강감찬은 거란군의 침략을 막아내는데 큰 역할을 담당하였다. 45살이던 993년 거란과의 첫 전쟁을 겪으면서 얻은 경험과 정보력을 바탕으로 2차 침입에서는 하공진을 통해 외교적으로 성종을 물리칠 것을 건의했고, 71살에는 상원수가 되어 소배압의 이끄는 10만 대군을 귀주에서 크게 물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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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거란은 고려와 이토록 오랫동안 싸울 계획이 없었다. 거란은 초창기 중국을 지배하기 위해 고려에 낙타와 여러 보물을 보내며 우호관계를 맺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나 왕건은 보내온 낙타를 굶겨죽이고 유훈으로 거란을 짐승과 같은 나라로 비유하며 적대시하였다. 결국 거란은 힘으로 고려를 굴복시키기 위해 고려를 쳐들어왔다. 하지만 거란은 번번이 강력한 고려군을 힘으로 꺾지 못했고, 동시에 고려의 뛰어난 외교 전략에 늘 밀렸다.


1차 침입 때에는 서희가 소손녕과의 담판으로 강동 6주를 획득하였고, 2차 침입 때에는 하공진이 거란 성종을 설득시켜 군대를 되돌리게 하였다. 계속되는 고려의 침략이 실패하면서 거란은 독만 남았다. 거란 성종은 1018년 12월 소손녕의 형이었던 소배압에게 10만의 정예병을 주며 고려의 항복을 받아오게 하였다. 고려 내에서는 더 이상 외교적으로는 거란의 침입을 회피하기 어렵다며 항복하자는 측이 힘을 얻고 있었다. 그러나 강감찬은 오랜 기간 거란을 상대하며 얻은 경험을 바탕으로 현종에게 맞서 싸울 것을 건의하고 주장하였다. 이는 고려와 송 그리고 거란의 관계를 파악하고, 현장에서 얻은 정보를 바탕으로 승리를 자신했기 때문이었다. 현종은 선왕 때부터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국정을 이끌어왔던 강감찬을 믿고 상원수의 직책과 함께 20만의 군대를 주었다.

강감찬은 20만의 군대를 통솔하여 영주에 주둔한 뒤, 흥화진에 1만 2천의 기병을 숨겨놓았다. 그리고 소가족으로 흥화진으로 흐르는 냇가를 막아두었다. 이를 눈치 채지 못하던 거란군이 내를 건너자, 둑을 터트리고 혼란해하는 거란군을 공격하여 1만 여의 군대를 죽여 버렸다. 소배압이 굴하지 않고 개경에서 40여km 떨어진 신은현까지 왔으나, 계속되는 고려군의 저항과 보급품의 부족으로 후퇴를 결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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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란군의 후퇴는 개경으로 오는 만큼이나 어려웠다. 강감찬이 이끄는 고려군이 거란군을 계속 공격하자, 소배압은 귀주에서 최후의 결전을 준비하였다. 거란 10만과 고려 20만군의 격돌은 매우 치열하였다. 궁지에 몰린 거란군과 고려를 지키기 위한 고려군에게 한치의 양보도 있을 수 없었다. 누구의 승리도 가늠하기 어려울 때, 거란을 향해 부는 거센 바람을 이용하여 불화살을 날리며 고려군은 주도권을 잡았다. 대열이 무너진 거란군은 전의를 잃어버리면서 오합지졸이 되어 수천 명만이 요나라로 살아 돌아갈 수 있었다. 이를 귀주대첩이라고 한다. 거란은 이후 국력이 급격히 약해지면서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에게 멸망하게 된다.


26년 동안 고려를 괴롭히던 거란을 물리친 강감찬은 전쟁 이후, 개경에 나성과 국경지방에 천리장성을 축조하면서 고려에 안정과 평화를 가져왔다. 강감찬의 업적은 단순하게 거란의 침입을 막아낸 것만이 아니었다. 귀주대첩은 동아시아에서 어느 나라에게도 당당했던 모습을 보여주는 마지막 전쟁이다. 귀주대첩 이후 고려는 금에게 신하의 예를 갖추었고, 원의 침략에 항복하고 간섭받았다. 조선은 명이 주장하는 사대질서를 받아들였고, 후기에는 청을 모셨다. 우리의 자주적인 모습은 강감찬의 귀주대첩 이후로 볼 수 없었다. 그렇기에 당대와 함께 후대의 사람들은 강감찬의 능력과 업적을 인정하고 받들 수밖에 없다. 지금의 우리가 강대국 사이에서 자주적인 모습을 갖추고 국정을 이끌어가기 위해서는 강감찬에 대하여 더 많은 공부를 해야 한다. 그리고 강감찬의 정신과 능력을 배우고 익혔을 때, 우리는 진정한 자주국가로 한걸음 더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주소: 서울 관악구 낙성대로 77

찾아가기: 2호선 낙성대역 4번 출구로 나와 마을버스 관악2번을 승차 후, 낙성대공원에서 하차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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