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재필 박사에게 조국이란?

by 유정호




서대문독립공원에 가면 서재필 박사의 동상을 만날 수 있다. 공원을 방문한 많은 이들이 동상 주변에 머물면서 휴식을 취하기도 하고, 가까운 이들과 담소를 나누기도 한다. 근처의 아파트에 사는 아이들이 동상 주변을 뛰어다니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모습도 구경할 수 있다. 이처럼 익숙하고 친근한 동상이지만, 정작 이 동상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모르는 경우가 많다. 또는 동상의 주인공이 서재필 박사인 것을 알지만, 정작 서재필 박사(이하 박사는 생략)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는 이도 적은 것이 사실이다.


서재필은 전남 보성에서 태어나 7촌 아저씨 서광하에게 입양되어 일곱 살부터 서울에서 글공부를 시작하였다. 이 당시 서재필은 15살 연상이던 김옥균과 박영효를 만나 개화사상을 접하고 필요성을 인식하게 된다. 특히 재주가 뛰어났던 서재필은 19살에 문과에 급제하며 모두의 관심을 받았다.


김옥균은 서재필이 조선을 발전시키는데 큰 역할을 담당할 것이라 여기고 일본의 도야마육군학교에 입학을 권유하였다. 이곳에서 서재필은 14명의 동료와 1년 동안 군사훈련을 받으며, 군사개혁의 필요성을 절감하였다. 특히 자신이 과거에 합격하던 해에 일어났던 임오군란의 과정에서 청나라의 군대에 허무하게 무너지던 모습을 기억하는 서재필에게 강한 군대는 꼭 필요한 일이였다.






조선에 귀국하자마자 서재필은 고종에게 사관학교 건립을 건의하였고, 고종 또한 서재필과 다르지 않은 생각을 가지고 있어 동의했다. 우선 서재필은 조련국 사관장에 임명되어 생도를 양성하는 일을 맡았다. 그런 서재필에게 김옥균이 다가왔다. 청의 간섭으로 어느 것 하나 조선의 뜻대로 개혁할 수 없는 상황에서 쿠데타를 일으켜 자주적인 나라를 만들자는 이야기는 젊은 서재필의 가슴을 뜨겁게 만들었다.


서재필은 김옥균과 함께 갑신정변을 일으켰고, 병조참판 겸 후영영관에 임명되어 수구파를 처단하고 고종을 호위하는 역할을 맡았다. 그러나 일본에 의지하였고 엘리트 의식으로 민심을 제대로 읽지 못했던 이들은 청군의 개입으로 삼일 만에 실패하고 만다. 서재필은 눈물을 머금고 일본으로 망명하였으나, 무책임한 일본의 태도에 미국으로 망명을 결심하게 된다. 여기에 고국에서 들려오는 가슴 아픈 소식도 한몫했다. 부모와 형제 그리고 부인이 죽고, 귀한 아들이 굶어 죽었다는 소식은 서재필을 조선으로부터 더욱 멀리 도망가고 싶게 만들었다.


미국으로 건너간 서재필은 일과 공부를 병행하며 모든 것을 잊으려 하였다. 자신의 이름마저 필립 제이슨(Phillip Jaisohn)으로 개명하고 미국으로 국적을 바꾸었다. 서재필의 사정은 한 미국인의 가슴을 울렸고, 그의 도움으로 펜실베이니아의 고등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 유색인종에 대한 차별이 매우 심했던 미국에서조차 서재필의 노력과 재능은 인정받아 해리힐맨 고등학교 졸업생 대표로 고별 연설을 하였다.




이후 라파예트 대학에 입학했으나, 학비가 부족하여 2년 만에 중도 포기한 서재필은 워싱턴으로 이주하였다. 이곳에서 다시 조지 워싱턴 대학에 입학하여 의과대학을 2등으로 졸업하였다. 이후 가필드 병원에서 근무를 하였으나, 인종차별을 견디지 못하고 개인 병원을 개업하였다. 그리고 미국 철도우편사업 창설자 암스트롱의 딸이었던 무리얼 암스트롱과 결혼을 한다.


이제는 조선과 아무런 연관이 없는 미국인으로서 안정적인 삶을 살 수 있는 서재필이었다. 그러나 박영효가 미국으로 건너와 조선을 위해 다시 한 번 힘을 써달라는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다. 자신의 젊은 시절의 꿈과 가족을 앗아간 조국이었지만, 기울어져가는 모습을 못 본척 할 수 없었다. 서재필은 1896년 다시 조국으로 돌아와 자주적인 나라를 만들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다.


과거 민중의 마음을 보지 못했던 젊은 서재필과는 달랐다. 미국에서의 민주주의를 보고 배운 서재필은 무엇보다 민중의 자각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였다. 민중이 스스로의 힘을 깨우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었던 서재필은 한글과 영문으로 된 독립신문을 발행하였다. 그리고 자주적인 나라임을 보여주고자 독립협회를 창설하여 청나라 사신을 맞이하던 영은문을 허물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 독립문을 건설하였다. 이 외에도 러시아의 절영도 조차를 막기 위해 만민공동회를 개최하고 배제학당에서 신학문을 가르쳤다. 특히 학생들 스스로 생각하고 결정할 수 있도록 학생토론회 조직인 협성회를 결성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근대적인 개혁을 거부하던 수구파와 고종이 독립협회를 탄압하면서, 서재필을 미국으로 쫓아내버렸다. 조국을 위해 모든 것을 던지고 온 서재필이 다시 한 번 절망감을 느끼는 순간이었다. 서재필은 미국으로 돌아간 뒤, 미국과 스페인 전쟁에 참여하는 등 바쁜 시간을 보냈다. 마치 번뇌를 없애기 위해 몸을 바삐 움직이는 것처럼 말이다.


개인 병원을 운영하고 대학에서 해부학을 강의하는 바쁜 시간을 보내도 조국을 사랑하는 마음은 사그라지지 않았다. 특히 3·1운동에서 민족의 힘을 확인한 서재필은 ‘재미한인전체 대표회의’에서 외교 고문으로 필라델피아에 외교통신부를 설치하였다.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수립된 이후에는 고문으로서 한국의 독립을 지지하는 미국인들을 규합하여 ‘한국친우회’를 조직하였다. 이를 통해 미 상원과 하원에서 한국문제를 토의하도록 했으며, ‘한국독립찬조 결의안’을 제안하였다.


또한 미국인들에게 한국의 독립 당위성을 설명하기 위해 ‘한국평론’ 월간잡지를 발행하였다. 이외에도 구미위원부 위원장으로서 미국대통령 당선자였던 하딩에게 한국독립을 위한 지원을 요청하였다. 워싱턴 회의, 범태평양 회의 등 국제회의에 참석하여 우리의 독립을 요구하였다. 이 모든 것들을 수행하기 위해서 많은 돈이 필요했지만, 서재필은 한 푼도 외부에서 받지 않았다. 자신의 사비를 털어 충당하였다. 결국 서재필은 모든 재산을 독립운동에 쏟아 부은 결과 파산되어 경제적으로 어려운 생활해야만 했다.



이런 서재필의 노력이 헛되이 사라지지는 않았다. 일제가 패망하기 전 제2차 세계대전의 전후처리를 위한 카이로·포츠담 회의에서 강대국들은 한국의 독립을 결의하였다. 독립한 이후에는 미군정 사령관 하지 중장은 서재필을 초빙하여 한국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자문을 구하였다. 이 당시 서재필의 나이 83세였다. 노구의 몸으로 독립을 맞은 조국을 다시 찾은 서재필의 눈에는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하지만 강대국들의 이해관계로 남북이 분열되는 아픔을 봐야했다. 자신의 의사와는 다르게 남한 단독정부의 대통령으로 거론되는 것이 부담스럽고 가슴 아팠다. 자신으로 인해 한국이 더욱 분열되고 있다는 죄책감, 그리고 혼란스러운 한국에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다는 생각이었는지 서재필은 다시 미국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미국에서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세상을 떠났다.


서재필은 갑신정변 이후 조국에 두 번 돌아왔다. 첫 번째인 1896년 자주적인 나라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지만, 국가보다는 자신의 기득권을 잃지 않기 위해 수구파들에 의해 쫓겨났다. 두 번째인 1947년에도 자신들의 권력을 위해 민족 분열을 일으키는 모습에 실망하고 미국으로 돌아갔다. 그럼에도 서재필은 조국을 사랑했다. 조국이 자신으로 인해 더욱 분열할까 걱정되어 떠나갔다. 이런 서재필이 먼 타국에서 눈을 감는 순간, 조국은 어떤 의미로 다가왔을까?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자주가 무엇인지 보여준 강감찬 장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