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를 독립시키려고 모든 것을 희생했던 수많은 독립운동가 중에 우리는 얼마나 많은 이들을 기억하고 있을까? 아마도 정말 소수의 분만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구한말부터 일제강점기에 이르기까지 자주적인 나라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한평생을 바쳤던 수많은 위인 중에 우리가 잘 모르는 이종일이란 분이 있다.
우리에게는 생소할 수 있지만, 독립운동사에서 이종일 선생(이후 선생은 생략)은 꼭 거론되어야 하는 분이다. 대표적인 활동으로 3・1운동 당시 수많은 민중에게 배부되었던 기미독립선언서를 인쇄하고 낭독하신 이종일은 한글 맞춤법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충남 태안에서 태어나 15살에 상경한 이종일은 조선의 근대화에 필요성을 인식하고 적극적인 수용을 주장하던 김윤식과 이상재를 만나며 자신이 나아갈 방향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16살이 되던 1873년 과거에 급제한 이종일은 수신사의 일원으로 일본에 다녀온 후 정3품의 위계를 받으며 승승장구했다.
그러나 열강의 침입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지던 조선의 운명에 이종일은 깊은 탄식이 나왔지만, 한편으로 자주적인 나라를 만들겠다는 오기도 생겼다. 우선 민중이 나라의 주인임을 깨닫고 변화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교육과 언론인으로 활동하였다.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던 1894년 이종일은 보성보통학교의 교장으로 취임하여 인재를 양성하는데 힘을 기울였다. 그러던 중 서재필 박사가 미국에서 돌아와 설립한 독립협회가 민중의 계몽을 위해 독립신문을 발간하자, 이종일은 매우 반가웠다. 많은 사람이 독립신문을 읽고 세상을 바로 불 수 있도록 자신도 돕고 싶었다. 이종일은 자신이 일본을 방문해서 보고 들은 세상 소식과 관료이자 교육자로서 겪었던 경험을 바탕으로 독립신문에 논설을 기고했다.
이후 많은 사람이 이종일과 뜻을 함께하기 위해 모여들었다. 이종일도 글로만 세상을 변화시킬 생각이 없었다. 자신도 서구의 문물을 받아들이고 민중을 깨우치는 일을 하기 위해 팔을 걷어붙이고 개화 단체인 “대한제국민력회”의 회장을 역임하였다. 또한, 민영환과 흥화학교를 세워 한 명이라도 더 많은 이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고자 하였다.
특히 이때 이종일은 우리나라 최초의 순 한글 신문을 만들어 배포하였다. 한자를 배우지 못해 신문을 읽지 못하던 여성들과 서민들을 위해서였다. 또한 대한제국(조선)이 열강의 대열에 함께 할 수 있는 강국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도 신문 이름에 담았다.
나는 말하기를 사실 현세를 따지고 보면 대한제국의 시대인 까닭에 나의 의견으로는 제호를 제국신문이라고 붙이면 어떨까 한다. 듣는 사람들이 숙의한 끝에 모두 좋은 명칭이라고 말하여 이에 제국신문으로 결정하고 제호를 한글로 하면 어떻겠느냐고 하였더니 역시 모두 좋다고 하였다. 그래서 한글전용의 신문을 발간할 것을 결정지었다. - 묵암비망록 중에서
제국신문이 특별한 이유가 하나 더 있다. 바로 이승만이 제국신문에서 주필로 활동했기 때문이다. 이승만은 고종폐위 음모 사건에 연루되어 한성 감옥에 투옥되었을 때에도 제국신문에 논설을 남길 수 있었다. 여기에는 이종일의 역할이 매우 컸다. 이승만이 역모죄로 갇힌 상황에서도 계속 소통하고, 이승만의 개혁적인 글을 신문에 올린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그러나 나라를 위한 옳은 일이라 생각한 이종일은 뚝심 있게 이승만의 글을 제국신문에 실었다.
이종일은 제국신문의 사장으로 경영만 했던 것은 아니었다. 꾸준히 논설을 통해 대한제국이 나아가 발을 제시했다. 이는 수구파들의 신경을 거슬리게 하였다. 결국, 고종황제 생일을 축하하는 기사에서 성수만세(聖壽萬歲)를 성수망세(聖壽亡歲)로 잘못 인쇄하게 만들어 투옥되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모략이라는 것이 밝혀지면서 곧 풀려났다. 이종일은 주변의 방해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대한자강회 평의원으로, 대한협회의 회보 편집 겸 발행인으로 열강의 침략을 성토하며 대한제국의 이권을 지키고자 최선을 다했다.
이종일에게 천도교로의 개종은 이후 독립운동에 있어 큰 발자취를 남길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종교를 넘어서 나라를 위한 활동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던 천도교 교주 손병희는 이종일에게 ‘천도교회월보’ 월보 과장에 이어 보성사를 맡겼다. 보성사는 당시 가장 큰 규모의 인쇄소이면서 구국운동에 힘을 기울이던 천도교의 소식을 전하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 이런 보성사에 이종일이 사장으로 임명된 것은 그의 가치가 얼마나 높았는지를 보여주는 일이다.
그리고 1919년 이종일은 행동으로 자신의 가치를 증명해 보였다. 최남선이 작성한 독립선언서가 보성사에 도착하자, 이종일은 공장감독이었던 김흥규와 총무 장효근과 함께 모든 문을 걸어 잠그고 인쇄에 들어갔다. 그런데 그만 친일순사로 악명을 떨치고 있던 신승희가 보성사를 급습하여 독립선언서를 인쇄하는 장면을 목격하였다. 이종일은 눈감아 달라고 끊임없이 부탁하였지만, 신승희는 요지부동이었다. 결국, 손병희가 준 오천 원을 신승희의 손에 쥐여주자, 그제야 물러났다.
이토록 어렵게 인쇄한 25,000여 장의 독립선언서를 배부하고, 이튿날인 27일 추가로 인쇄한 10,000장을 옮기는 과정에서 또다시 일본 경찰에 발각되었다. 이때에도 일본 경찰에게 돈을 쥐여주면서, 독립선언서를 족보라고 거짓으로 말하여 또 한 번의 위기를 넘기게 된다. 이 당시 손녀였던 이장옥도 배부하는 일에 동참하고 있었다. 위험한 일에 손녀를 참여시킨 이종일에게서 진정 애국이 무엇인지를 배우게 한다.
그리고 민족대표 33인의 한 명으로 3월 1일 태화관에 들어갔다. 처벌을 받을 것이 자명한 일이었지만, 이종일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자리에 앉아 순서를 기다리던 이종일에게 손병희는 독립선언서 낭독을 권유하였다. 이종일의 역할이 매우 컸음을 안 손병희의 배려였다. 이종일은 역사에 길이 남을 독립선언서를 큰 목소리로 힘주어 읽어 내려갔다. 대한민국을 넘어 인류 역사에 큰 영향을 주었던 3·1운동의 시작을 알리는 낭독이었다.
일제는 이종일에게 3·1운동의 책임을 물어 3년 형을 구형했다. 그리고 2년 6개월 후에 출소시켰다. 3·1운동 당시 투옥된 사람들 대부분이 영친왕의 결혼으로 감형되어 일찍 나온 것에 비교해본다면, 이종일이 일제에 얼마나 미운 존재였는지를 보여준다. 일제는 끊임없이 이종일을 회유하고 겁박하며 압력을 행사했지만, 나라를 위한 굳은 의지는 변함이 없었다.
1922년 이종일은 50여 명의 보성사 직원들과 천도교 단독으로 진행되는 제2의 3·1운동을 준비하였다. 또한 ‘자주독립선언문’을 작성하고 ‘한국독립비사’를 발간하였다. 또한, 조선국문연구회 회장으로 취임하여 한글 맞춤법 연구에 크게 이바지를 하였다. 그러나 이종일을 쫓아다니며 감시하던 일본 경찰에 의해 제2의 3·1운동이 실패하고 책은 압수된다. 이로 인해 급격하게 몸이 약해진 이종일은 1925년 8월 31일 자택에서 68세의 나이에 영양실조로 죽음을 맞이한다.
오랜 시간 무시되고 억압받던 민중이 이 나라의 주인임을 인식한 이종일, 그리고 민중이 주인이라는 사실을 알려주려고 교육과 언론 활동에 평생을 헌신한 이종일, 한글이 체계화되고 보급될 수 있도록 노력한 이종일, 목숨을 걸고 독립선언서를 인쇄하고 배부한 이종일, 독립선언서를 최초로 낭독하며 우리가 주인임을 전 세계에 알린 이종일의 동상이 옛 보성사 터에 서 있다. 이제는 이종일이라는 독립운동가의 이름을 기억해야 한다. 이종일 선생을 시작으로 더 많은 애국지사를 알아야 한다. 이종일 선생의 ‘정신을 먼저 개조하고 난 다음에야 물질의 풍요가 뒤따라야 한다.’라는 말이 귓가에 더 맴도는 것은 분명 우리가 반성해야 할 부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