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대 이상은 영어를 공부하기 위해서는 영한사전이 꼭 필요했다. 영문을 해석하기 위해 책상 한편에 놓인 영한사전을 수도 없이 넘기며 발음기호와 뜻을 찾으며 부지런히 공부했다. 하지만 영한사전을 누가 만들었는지 생각할 틈도 없었고 궁금하지도 않았다. 영한사전을 만든 사람이 얼마나 뛰어난 능력을 갖추고 있었고, 그 노고가 얼마나 컸는지를 말이다. 그리고 영한사전의 제작이 우리의 역사에서 얼마나 큰 역할을 했는지 말이다.
우리나라 영한자전(1897년)을 만든 이는 캐나다 선교사 게일(James Scarth Gale, 1863~1937)이다. 그러나 혼자서 영한사전을 만든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게일이 짧은 기간 동안 한국어와 한자를 제대로 알고 구사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국문과 한문 그리고 영문에 능통한 이가 옆에서 도와주어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게일과 함께 영한사전을 만든 재주와 능력이 뛰어난 이가 바로 양기탁 선생(이후 선생은 생략)이다.
40대 이상은 영어를 공부하기 위해서는 영한사전이 꼭 필요했다. 영문을 해석하기 위해 책상 한편에 놓인 영한
양기탁은 1866년 미국의 상선이었던 제너럴 셔먼호가 교역을 강요하며 행패를 부렸던 평양에서 태어났다. 당시 평안도 관찰사로 제너럴 셔먼호 사건을 담당하며 많은 개혁을 주장했던 인물이 개화를 주장하던 박규수였다. 어려서 서구 세력의 힘과 만행을 보았고, 이를 이겨내기 위해 서구의 기술을 수용하여 부국강병을 이뤄야 한다는 박규수의 개화사상은 양기탁이 성장하는데 필요한 밑바탕이 되었다.
양기탁이 세상에 알려진 것은 조선의 변화를 끌어내기 위해 독립협회 일원으로 활동하면서다. 양기탁은 독립협회가 추구하는 자주국권·자유민권·자강개혁사상의 필요성을 이해하고 사회적 공감을 얻어 정책으로 실행될 수 있도록 동분서주하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양기탁은 활동을 인정받아 1898년 만민공동회의 부총무장이 되었고, 의회를 만들어 민주주의를 도입하려는 변화를 끌어내는 데 큰 공헌을 하였다.
그러나 고종과 수구파들은 의회설립이 자신들의 기득권을 상실해버릴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독립협회를 강제로 해산시켜버렸다. 조선의 밝은 미래를 기대하며 독립협회 일원으로 활동하던 양기탁의 실망감은 무슨 말로도 표현할 수 없었다. 양기탁은 좌절했지만 멈추지는 않았다. 더 큰 세상을 돌아다니며 생각의 폭과 역량을 키우기로 결정했다. 영한사전을 함께 만들었던 게일의 도움을 받아 일본과 미국을 3년 동안 여행하며, 대한제국이 바람 앞의 등불처럼 매우 위태로운 상황임을 확인했다.
귀국 후 기울어가는 나라를 구하기 위해 이상재, 이준, 이상설 등과 함께 개혁당 운동을 벌였다. 하지만 양기탁의 바람과는 달리 대한제국은 시간이 흐를수록 외세의 거센 압력에 무너져갔다. 그런 가운데 러시아와 일본은 대한제국을 자신들의 식민지로 만들기 위한 전쟁을 일으켰다. 러·일전쟁에서 승기를 잡은 일본은 황무지 개간권을 시작으로 약탈을 본격화했다.
양기탁은 나라의 이권이 빼앗기는 것을 그냥 볼 수만은 없었다. 보안회의 일원으로 일본의 만행과 의도를 널리 알리며 저지시키는데 온 힘을 기울였다. 양기탁의 노력은 그동안 축적되었던 민중의 반일감정을 자극하여 일본의 황무지 개간권을 저지시킬 수 있게 되었다. 이때의 성공으로 양기탁은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을 수 있었다.
특히 언론이 가진 힘을 인식한 양기탁은 영국 기자 출신으로 러·일 전쟁을 취재하러 온 베델(1872~1909)과 뜻을 같이하기로 약속하고 『대한 매일 신보』를 창간한다. 영국인 베델을 사장으로 한 『대한 매일 신보』는 일본의 통제와 압력에서 언론의 자유를 누릴 수 있었다. 양기탁은 『대한 매일 신보』의 총무이자 주필로서 우리에게 필요한 이야기를 신문에 마음껏 실었다. 이듬해에는 열강들에게 우리의 이야기를 전달할 수 있는 영문판 『코리아 데일리 뉴스(Korea Daily News)』를 발행했다.
양기탁의 『대한 매일 신보』는 자신만의 주장을 일방적으로 기재하지 않았다. 을사늑약으로 나라의 외교권을 빼앗긴 현실을 규탄했던 장지연의 『시일야방성대곡』을 영문으로 옮기는 등 우리에게 필요하고 옳은 글이라면 주저하지 않고 신문에 실어 세상에 알렸다. 양기탁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민중을 깨우치고 나라의 위급함을 알리기 위해 국한문으로 발행되던 『대한 매일 신보』를 한글판으로 발행하였다. 또한 신문사를 신민회(1907~1911) 본부로 활용할 수 있도록 빌려주고, 그 일원으로 활동하였다.
실질적으로 양기탁이 운영하던 『대한 매일 신보』가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 것은 국채보상운동과 관련이 깊다. 일제는 을사늑약 이후 대한제국을 경제적으로 예속시키고 식민통치에 필요한 기간산업을 만드는 데 활용하기 위해 차관을 강제로 빌려주었다. 그 금액이 대한제국의 일 년 예산에 해당하는 1,300만 원에 이르자, 많은 한국인이 근심과 걱정으로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런 가운데 1907년 대구에서 서상돈이 중심이 되어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났다. 대구라는 한정된 지역에서 그칠 수도 있었던 국채보상운동이 전국적으로 퍼질 수 있었던 것은 양기탁의 『대한 매일 신보』가 중추적 역할을 했기에 가능했다. 양기탁은 『대한 매일 신보』에 국채보상운동의 취지와 활동을 연신 기사로 내보내며 많은 이들의 관심과 호응을 끌어냈다. 더불어 신문사에 국채보상지원금총합소를 만들어 국채보상운동의 중심역할을 수행하였다.
양기탁의 노력에 힘입어 순식간에 전국에서 230여만 원이 모금되자 일제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이에 일제는 『대한 매일 신보』의 양기탁을 국채보상운동으로 모여진 돈을 횡령했다는 죄목으로 구속해버렸다. 다행히 베델이 횡령죄가 허위 조작이었음을 밝히는 증거를 제시하며 2개월 만에 석방되었지만, 국채보상운동은 양기탁이 없는 동안 추진력을 잃어버리고 무산되어버렸다.
하지만 양기탁은 자주적인 나라를 만들기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나라를 잃어버리자 양기탁은 나라를 되찾기 위해 더 큰 활약을 펼쳤다. 1910년대에는 신민회의 일원으로 만주에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기 위해 답사를 떠났고, 1920년대에는 동아일보가 창간할 때 고문으로 추대되어 언론이 나아갈 길을 알려주었다. 통천교라는 종교를 만들어 독립운동을 비밀리에 수행했으며, 의거 활동을 펼치는 의성단을 조직하기도 하였다. 특히 만주의 정의부와 3부 통합을 이끌며 일제와의 무력투쟁을 지도하였다.
1930년대는 일제가 만주를 점령하자 중국 관내로 이동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요인으로 활약하였다. 많은 요인의 추대로 35년 주석으로 재임하여 중국 관내 독립운동단체를 통합하고자 노력하였다. 그러나 자신의 몸을 아끼지 않고 독립운동을 펼친 결과 큰 병을 얻었고 결국 중국 강소성 율양 길당암에서 독립을 보지 못하고 돌아가시고 만다.
양기탁의 일생을 살펴보면 그의 삶 자체가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이기도 하다. 독립협회에서 보안회, 대한매일신문, 국채보상운동, 신민회, 105인 사건, 동아일보, 정의부, 3부 통합,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 민족혁명당 등 모든 독립운동사에 양기탁은 빠지지 않는다. 우리는 양기탁을 국채보상운동과 같은 한정된 사건에 국한해놓는 잘못을 범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양기탁 선생의 수많은 독립업적을 다 알 수는 없더라도, 그가 남긴 말은 기억하였으면 좋겠다. 양기탁 선생은 남들보다 우리가 스스로를 잘 알고 있어야 함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청년들에게 우리의 희망이 있음을 밝혔다. 그리고 오늘날에도 그 말의 가치는 무겁게 우리에게 다가온다.
무릇 어느 사회를 개조코저 하는 자는 반드시 그 사회의 사정을 잘 알아야 할지니 조선의 사업을 경영하는 자. 조선의 사정을 모르고서 어찌 가 하리오 - 양기탁
무릇 천하의 사(事)는 다 사상에 잇나니, 아무쪼록 조선의 사정을 잘 아는 청년들이 많이 생겨 먼저 조선이라는 사상으로 기초를 축(築)하고 그 위에 여러 외국 문물의 식(飾)할지어다. - 양기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