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대 일제의 민족분열통치로 친일파가 늘어나고 독립운동은 민족주의와 사회주의로 나누어져 독립의 희망이 무너지고 있었다. 더욱이 일제는 더욱 강대국이 되어 다른 열강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어 우리를 도와줄 나라는 어디에도 없었다. 일제가 중국으로 침략하는 과정에서 만보산 사건(일제에 의해 발생한 우리와 중국과의 유혈 사태)으로 한·중 간의 관계는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다. 더욱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도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 문제를 한 번에 해결한 이가 바로 윤봉길 의사(이하 의사 생략)다. 윤봉길이 일제가 일왕의 생일인 천장절 및 상해 사변 전승 기념식이 열리는 훙커우 공원에 수통형 폭탄을 던지면서 한·중이 연합하여 일제와 맞설 수 있는 계기를 만들었다. 중국의 장제스는 “중국의 백만 대군과 4억 국민이 하지 못한 일을 조선의 한 청년이 해냈다.” 극찬하고 우리를 동반자로 여겼다.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원하여 한국광복군을 창설할 수 있는 뒷받침을 하고, 제2차 세계대전 전후처리를 논의하는 과정에서 한국의 독립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이처럼 우리나라의 독립운동사에 있어 큰 획을 그은 윤봉길은 충남 예산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한학을 배우다 11살의 나이에 덕산공립보통학교에 입학했다. 그러나 학교생활도 잠시 3·1운동 당시 덕산시장에서 700여 명이 만세 부르는 것을 본 윤봉길은 일제의 식민지 교육을 거부하며 보통학교를 그만둔다. 그리고 인근에 큰 존경을 받던 오치서숙의 매곡 성주록 선생에게 수업을 받았다.
19살이 되던 해에 스승 성주록은 더는 가르칠 것이 없다며 매헌(梅軒)이란 호를 내렸다. 자신의 호인 매곡(梅谷)과 윤봉길이 평소 존경하던 성삼문의 호 매죽헌(梅竹軒: 한겨울 추위 속에서도 향기를 내뿜는 매화의 고고한 기품과 충의 정신을 간직하라)을 함께 엮으며 잃어버린 나라를 위한 큰일을 펼칠 수 있기를 바랐다. 사실 윤봉길은 한학을 배우면서도 <동아일보>와 <개벽> 등을 읽으며 나라를 잃어버린 현실과 앞으로 가야 할 길이 무엇인지 오랫동안 생각했다.
어느 날 가슴에 한가득 묘비를 안은 채 자신은 글을 읽을 줄 모르니 부모의 묘를 찾아달라는 마을의 청년을 보면서 “무지가 나라를 잃게 한 가장 큰 적이다.”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무지는 자신만이 아니라 주변 사람들에게도 큰 피해를 준다는 생각에 야학을 설립하고 농촌 계몽 운동을 펼쳤다. 그러나 교재로 사용할 만한 책이 마땅치 않아 스스로 책을 만들어야 했고, 그렇게 만들어진 책이 <농민독본> 3권이다. <농민독본>을 보면 1권은 한글을 가르치기 위한 내용이고, 2권은 예절과 인사법 등 기본적인 생활 개선을 위한 계몽 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마지막 3권은 자신이 생각하고 바라는 농민의 앞길을 적어놨다.
“조선에서 주인공인 농민은 이때까지 주인 대접을 못 받고 살아왔습니다. 그까짓 농군 놈들 촌놈들이라고 학대하고 멸시함이 정말 혹독하였습니다. 온 세상이 다 농민을 사람으로 역이지 아니하여 조금도 돌보지 아니하였습니다. 따라서 조선의 주인인 농민은 도리어 헐벗고 굶주리고 불쌍한 가난뱅이가 되었습니다. 주인이 못살면 다른 사람도 따라서 못 사는 법입니다. 우리 조선에서는 농민이 이처럼 가난하다는 것은 결국 전 조선이 못살게 되고야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힘을 농민(農民)에게로 돌려야 합니다.”-<농민독본 3권 중>
이를 위해 윤봉길은 수암체육회를 조직하여 인근의 황무지를 개간하여 운동장을 만들고 청년들을 모아 달리기와 축구를 통해 건강한 정신과 체력을 단련시켰다. 가족의 경사를 대비해 미리 목돈을 마련하기 위한 위친계를 만들었고, 농촌계몽사상을 실천하기 위한 월진회도 조직하였다. 특히 실질적인 농가소득을 높이기 위해 목계농민회를 만들어 양돈과 양계 그리고 특용작물 재배를 권장하였다. 예를 들어 돼지를 무료로 주어 기르게 한 뒤, 새끼를 낳으면 절반은 갖고 나머진 다른 농민에게 분양함으로써 일할 동기를 제공하였다.
이처럼 교육과 농촌계몽운동을 하던 윤봉길은 1929년 광주학생항일운동과 함흥수리조합의 조선인이 살해되는 사건을 보고 나라를 되찾기 위해 상해로 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어머니에게 큰 수건과 과자를 사드리고, 큰아들에게 볼을 비빈 윤봉길은 차마 아내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못 하고 “물 한 잔 주오.”로 인사를 대신했다. 윤봉길은 장부출가생불환(사나이가 뜻을 품고 집을 나서니, 그 뜻을 이루기 전에는 살아 돌아오지 않겠다)의 마음으로 1930년 상해로 떠났다.
가는 도중 선천역에서 붙잡혀 유치장에 갇히는 고역도 당했지만, 끝내 압록강을 넘어 중국 청도(칭다오)로 간 윤봉길은 일본인이 경영하는 세탁소에서 일하며 일본문화와 습관을 배웠다. 그 와중에 벌어들인 수입으로 독립운동의 뜻을 같이한 한일진에게 미국행 여비를 주기도 하였다. 그렇게 상해에 도착한 윤봉길은 모자공장서 일하며 자신에게 독립운동의 기회가 오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윤봉길은 고향에 남겨둔 가족이 계속 눈에 밟혔다. 노모와 사랑스러운 아내 그리고 2남 1녀의 자녀. 윤봉길이 큰아들 모순이가 아버지가 없음에 슬퍼한다는 소식을 듣고 보낸 편지에는 아버지로서 미안함과 함께 자신을 이해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겨있다.
“모순(아들 이름)아. 너는 아비가 없음이 아니다. 너는 두순(육촌 형제)이에게 ‘너는 아빠가 있어서 좋겠다.’고 하였다는데 사실이냐? 너의 아비가 이상의 열매를 따기 위하여 잠시적 역행이지 영구적 전전(이리저리 옮겨다님)이 아니다. 그리고 모순이는 눈물이 있으면 그 눈물을. 피가 있으면 그 피를 흘리고 뿌리어 가며 불변성의 의지력으로 훈련과 교양을 시킬 어머니가 있지 아니하냐? 후일에 따뜻한 악수와 따뜻한 키스로 만나자.”
대의를 위하여 자신의 생명과 가족을 포기했지만, 끊임없이 윤봉길은 괴로웠다. 자신의 생명을 나라를 위해 바치는 것은 아깝지 않았으나, 가족들에게는 큰 책임을 넘기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윤봉길은 두 아들에게 위로의 말고 함께 자신의 뜻을 이해하고 함께 해주기를 바라는 “강보에 싸인 두 병정에게”라는 편지를 남겼다. “너희도 만일 피가 있고 뼈가 있다면 반드시 조선을 위하여 용감한 투사가 되어라. 태극의 깃발을 높이 드날리고 나의 빈 무덤 앞에 찾아와 한잔 술을 부어 놓으라. 그리고 너희들은 아비 없음을 슬퍼하지 말어라.”
이후 윤봉길은 김구의 시계와 자신의 시계를 바꾸고 1932년 4월 29일 3만 명의 군중이 모인 홍커우 공원에 7시 50분에 도착했다. 장장 4시간을 초조함과 불안감을 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사명감으로 견딘 뒤 11시 40분경 폭탄을 던졌다. 총사령관 시라카와를 비롯한 거류민 단장, 주중 공사 시게미쓰 등 많은 이들이 죽거나 다쳤다. 한민족의 가슴속에 묵혀왔던 모든 것이 속 시원하게 터지는 순간이었다.
일제는 윤봉길을 일본으로 끌고 가 제대로 된 재판도 없이 처형했다. 그리고 윤봉길의 유해를 노다산 공동묘지 관리사무소에서 쓰레기 하차장으로 가는 통로에 봉분도 없이 비밀리에 매장했다. 수많은 일본인의 발에 밟히라고…. 그러나 정의와 대의는 살아있었다. 일제는 결국 패망하고 한국은 독립했다. 일본의 전권대표로 항복 조인식에 서명한 사람이 윤봉길에 의해 다쳤던 주중 공사 시게미쓰다. 그는 이 순간 윤봉길을 떠올렸을 것이다.
광복 이후 김구는 윤봉길의 유해를 고국으로 모셔오기 위해 큰 노력을 기울였다. 1946년 3월 6일 유해를 찾고 7월 6일 대한민국 최초 국민장으로 효창원 삼의사 묘역에 안장했다. 23살에 중국으로 망명 가서 25살에 의거를 한 윤봉길의 멋진 귀환이었다. 그러나 이승만 정부의 반민특위 활동을 방해하며 많은 독립운동가와 가족들의 고통은 끝나지 않았다. 윤봉길의 차남은 2살 때 죽고, 장녀는 29년도에 죽었다. 큰아들만이 살아남았지만, 생계를 꾸려가기에 어려움이 많았다. 오히려 윤봉길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숨겨야만 했다. 국가적 차원에서도 크게 도와주지 않았다.
유일하게 이들에게 도움을 준 이는 김구의 아들 김신 장군이었다. 김신 장군이 김포공항에 스낵코너를 열 수 있도록 배려해주는 바람에 가난에서 벗어났다. 윤봉길의 아들이 1남 6녀를 낳으면서 후손은 늘어났고, 현재 각자의 자리에서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다. 그중 한 분인 윤봉길의 친손녀 윤주경이 인터뷰에서 밝힌 말은 우리의 고개를 떨구게 한다. 그리고 잘못된 역사를 이제라도 바로 잡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그래도 우린 축복받은 편이에요. 다행히 대학까지 교육을 받을 수 있었으니까요. 그 무엇보다 교육과 취업의 기회를 주는 것이 정부가 해줄 일인 것 같아요. 제대로 배우기만 해도 스스로 자립할 힘이 생기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