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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호 Jan 14. 2020

미국이 기념하는 안창호(1878~1938)

이분을 기념하며 미국에서 동상 및 지명으로 사용할 정도로 위대한 분이 누굴까? 바로 도산 안창호 선생이다. 인종 차별이 여전히 남아 있는 미국에서 그리고 지금처럼 한국의 위상이 높지 않던 시대에 안창호 선생을 기억하는 것이 약간은 의아하기도 하다.


그러나 미국에서 안창호(이하 선생 생략)를 기념하는 모습을 보면 오히려 한국보다 더 나을지도 모른다는 조심스러운 생각까지 들게 한다. 미국은 리버사이드 시청 앞에 안창호 동상을 건립하고 인터체인지 이름을 도산 안창호 메모리얼 인터체인지로 명명하였다. 이외에도 도산 안창호 우체국, 패밀리 하우스(한국학 연구소)를 운영하고 있다. 기념일도 제정하여 리버사이드는 8월 11일을, 캘리포니아주는 11월 9일을 도산 안찬호의 날로 기념하고 있다. 


특히 2012년에는 세계 민권 명예의 전당에 아시아인 최초로 안창호의 이름과 발자국이 헌액되었다. 세계 민권 명예의 전당을 운영하는 트럼펫어워즈 재단 부이사장은 헌액사에서 "안창호는 평화를 사랑했던 한국의 마틴 루터 킹으로 절망에 빠져있던 한국인들에게 희망의 등불을 비췄다"라며 전 세계에 안창호의 이름과 한국의 이미지를 크게 높였다.

반면 우리에게 안창호의 업적과 활동을 묻는다면 선뜻 대답하는 사람이 많지 않다. 안창호를 기리는 도산공원이 서울에 있고, 학교와 언론에서 안창호에 대하여 수없이 들었다. 그러나 안창호에 대하여 설명하려고 하면 생각이 나지 않는다. 왜 우리는 안창호의 업적과 활동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을까? 


평안남도 강서에서 태어난 셋째 아들로 태어난 안창호는 어려서부터 한학을 배우며 충과 효의 가치와 중요성을 깨달았다. 그러던 중 조선을 속국으로 만들려는 청과 일본이 벌인 청·일 전쟁의 참상을 목격하면서 큰 충격을 받게 된다. 그들의 야심을 위해 조선의 국토를 짓밟고 한인을 무차별적으로 사살하는 과정을 보면서 안창호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된다.


더 큰 세상을 알기 위해 서울로 상경한 안창호는 무료로 공부를 가르쳐주는 구세 학당에 입학하면서 3년간 신학문을 익혔다. 1897년에는 서재필이 중심이 되어 설립된 독립협회에 가입한 뒤, 평양에서도 변화의 바람을 일으키기 위해 쾌재정에서 만민공동회를 개최하였다. 쾌재정에서 한 연설이 얼마나 많은 이들의 가슴을 울렸는지, 이승훈은 훗날 자신이 독립운동을 하게 된 계기가 이때 마련되었다고 하였다.

안창호는 말로만 자주독립을 외치지 않았다. 당시로써는 생각도 할 수 없었던 남녀공학인 점진학교를 세우고 황무지 개척사업을 벌이며 교육과 경제자립을 위해 노력하였다. 하지만 현실적인 한계에 부딪힌 안창호는 이혜린과 결혼한 이튿날 미국으로 공부를 하러 떠났다.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안창호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일하면서, 초등과정부터 공부를 다시 시작하였다. 


그러나 미국에 온 일부 한인들이 무지와 이기적인 행동으로 미국인에게 비난을 받고 차별받는 모습에 충격을 받았다. 안창호는 한 명의 한인이 조선을 대변한다고 생각하고, 그들을 변화시키기 위해 한인공동협회를 만들고 <공립신보>를 발행하며 생활 개선을 위해 노력했다. 변화할 것을 주문하지 않고 스스로도 ‘오렌지 한 개를 따더라도 정성껏 따는 것이 나라를 위하는 일’이라 외치며 늘 깨끗한 옷을 입고 일을 하며 모범을 보였다.


미국에서 안정되어 가는 안창호는 대한제국이 을사늑약으로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해가는 모습을 보며 고국으로 돌아왔다. 어떻게든 식민지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해 뜻있는 지사들과 신민회를 조직하였다. 태극서관과 도자기 회사를 세워 독립자금을 마련하고 해외에 독립군 기지를 건설하고자 동분서주했다. 더불어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대성학교를 세우고 청년학우회를 조직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105인 사건을 조작하여 신민회를 해체하면서 안창호는 그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후 일제는 안창호를 요주인물로 간주하고 계속 감시하며 경계하였다. 1909년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여 죽이자, 일제는 안창호를 안중근과 관계가 있다며 잡아들였다. 일제에 고초를 겪고 풀려난 안창호는 블라디보스토크와 북만주를 돌며 독립운동기지를 건설을 위해 민심과 지역을 살피고 미국으로 돌아갔다. 독립자금 마련과 교민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 대한인국민회를 조직하고, 이듬해인 1913년 흥사단을 통해 활동을 확대하였다.


1919년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내무총장 겸 국무총리 대리로 상해로 넘어갔다. 독립을 위한 큰 발걸음을 내디뎠다고 생각한 것도 잠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내부분열로 제 역할을 하지 못하자 큰 걱정에 국민대표회의를 개최하였다. 하지만 결과가 좋지 않자 미국으로 다시 넘어간 안창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했다. 흥사단을 통해 민주주의의 가치를 교민에게 알려주며, 경제적 자립과 시민으로서 역할을 다 할 수 있도록 지도하였다. 


미국에서만 활동했던 것은 아니었다. 안창호는 상해를 오가며 이상촌을 건설하려 노력하였고, 독립운동단체를 결성하기 위해 동분서주하였다. 태평양을 여러 번 건너며 독립운동을 펼치던 안창호를 일제가 가만둘 리가 없었다. 윤봉길 의거의 배후로 지목하고 상해에서 체포한 뒤, 국내로 압송하였다. 옥중에서 2년 6개월 동안 온갖 고초를 겪으며 안창호의 몸은 망가질 대로 망가졌다. 가출옥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상황에서 일제는 다시 안창호를 재투옥하였다. 결국, 안창호의 생명이 위독하여지자, 일제는 책임을 회피하고자 병보석으로 풀어주었다. 그리고 얼마 뒤 세상을 뜨고 말았다.


안창호는 자주독립이 멀리 있지 않다고 보았다. “나 하나를 건전한 인격으로 만드는 것이 우리 민족을 건전하게 하는 유일한 길이다”며 개인의 의식이 깨어있고, 실천하는 것이 나라를 위하는 일이라 생각했다. 그와 함께 우리를 강조하였다. 남을 탓하기보다는 자신부터 변하면 모두가 바뀔 것이라 강조하였다. 


“오늘 대한사회에 주인 되는 이가 얼마나 됩니까…자기 민족사회가 어떠한 위난과 비운에 처하였든지 자기의 동족이 어떻게 못나고 잘못하든지…자기의 지성으로 자기 민족사회의 처지와 경우를 의지하여 그 민족을 건지어 낼 구체적 방법과 계획을 세우고 그 방침과 계획대로 자기의 몸이 죽는 데까지 노력하는 자가 그 민족사회의 책임을 중히 알고 일하는 주인이외다.”

모든 독립운동가가 그러하겠지만, 안창호는 독립을 향한 노력이 번번이 막히고 무너질 때마다 남을 탓하기보다는 자신을 탓했다. 절대 자신의 잘못이 아님에도 자신의 능력 부족으로 많은 동포가 고생한다고 여겼다. 그리고 자신과 동포들에게 독립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도록 당부하고 또 당부했다. 


“나는 밥을 먹어도 대한의 독립을 위해, 잠을 자도 대한의 독립을 위해서 해왔다. 이것은 내 목숨이 없어질 때까지 변함이 없을 것이다.”

“나는 죽음의 공포가 없다. 나는 죽으려니와 내 사랑하는 동포들이 그렇게 많은 괴로움을 당하니 미안하고 마음이 아프다. 일본은 자기 힘에 지나치는 큰 전쟁을 하였으니 필경 이 전쟁으로 패망하오. 아무런 곤란이 있더라도 인내하시오.”


안창호는 무실·역행·충의·용감을 늘 강조하였다. 이 중에서도 참되고자 하는 무실과 힘써 노력하자는 역행을 통해 모든 청년이 자기계발을 통해 이 사회의 주인으로 올바른 세상을 만들기를 바랐던 안창호의 뜻은 비단 과거에 적용되지는 않는다. 

“낙망(희망을 잃음)은 청년의 죽음이요. 청년이 죽으면 민족이 죽는다. 그대는 나라를 사랑하는가. 그러면 먼저 그대가 건전한 인격이 돼라. 우리 중에 인물이 없는 것은 인물이 되려고 마음먹고 힘쓰는 사람이 없는 까닭이다. 인물이 없다고 한탄하는 그 사람 자신이 왜 인물이 될 공부를 아니 하는가.”


다민족국가인 미국은 한인들이 미국 사회에 안정적으로 정착하고 발전에 이바지할 수 있도록 만든 이가 안창호라 생각한다. 그리고 다른 이민자들에게 널리 알릴만한 모범사례로 제시하고자 한다. 우리는 미국이 인정하는 위인 안창호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안창호 선생의 뜻을 계승하여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의 말과 행동이 단순히 개인적인 것이 아닌 대한민국을 대표한다고 여겨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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